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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미셸푸코 / 23장 광기의 형상들 / 2018.08.05.() / 닥홍

 

180805 광기의역사 2부 제3장 광기의형상들 닥홍.hwp

 

광기는 현상의 충만함 속에서, 종들의 정원에 신중하게 배열된 풍요로움에 따라 주어지는 부정성이다. 광기에 대한 추론적 인식은 이러한 모순에 의해 제한되고 확정된 공간에서 펼쳐진다. 최종적 의미로서의 비이성과 광기의 진실이 표현되는 형식으로서의 합리성 사이의 관계로서 역사의 변전은 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장에서 문제되는 것은 정신의학의 갖가지 개념을 같은 시대에 탄생하는 의학적 지식, 이론, 관찰사항 전체와 관련시키면서 개념들의 역사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주의 시대를 따라 지속되어 온 주요한 광기의 형상들을 차례차례 다시 다룸으로써, 어떻게 그것들이 비이성의 경험 내부에 자리 잡았을까, 어떻게 그것들이 거기에서 제각기 고유한 일관성을 획득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광기의 부정성을 실증적 방식으로 나타내기에 이르렀을까를 부여주려고 애쓸 생각이다.

이 획득된 실증성은 광기의 갖가지 형태에 대해 차원도 성격도 강도도 동일하지 않다. 정신장애의 경우 실증성은 가느다랗고 엷고 투명하며 여전히 부정성에 가깝고, 조광증과 우을증에 의해 획득된 실증성은 좀 더 치밀해졌다. 히스테리와 심기증 그리고 신경질환의 실증성의 경유 이 실증성이 비이성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고 비이성의 구조에 그토록 통합되어 있지 않아서, 결국에는 비이성을 다시 문제삼게 만들고 고전주의 말기에 비이성을 전적으로 뒤흔들어 놓게 된다.

 

1. 정신장애의 계열

 

정신장애는 17~18세기에 의사들 대부분에 의해 질병으로 인정된다. 정신장애의 경우 광기의 본질에 가까운데 이 광기는 무질서, 사유의 붕괴, 오류, 비진실을 통해 경험된 것이다. 이성의 단순한 이면과 정신의 순수한 우연성으로서의 광기이다.

윌리스의 분석 속에서 정신장애의 고유의 모습을 찾는 것은 헛수고이다. 그 이유는 서술에 정확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장애가 신경계통의 어느 하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질을 포괄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정신장애는 원인들을 체계화할 수도 없고, 원인들의 발생부위를 정할 수도 없으며, 증후들의 형상에 따라 원인들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신장애는 가능한 모든 변질의 보편적 결과이다. 어떤 점에서 정신장애는 한 가지 형태의 광기에 특유한 모든 증후가 소거된 광기이다. , 본질의 순수성, 일반적 진실의 측면에서 광기인 것이 그저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광기의 일종이다. 정신장애는 대뇌, 신경섬유, 정기의 정묘한 기계적 작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합리적인 것 전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의 차원에서는 의료의 개념이 고안되지 않고, 대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순수하게 논리적인 이분법에 따라 유기적으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잠재성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실질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의학적 경험으로서의 정신장애가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는 것이다.

18세기 중엽에도 정신장애의 개념은 변함없이 부정적이다. 정신장애에 고유한 증후학은 없다. 어떤 정신착란이나 환각 또는 난폭함의 형태도 본래부터 또는 자연발생적으로 정신장애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장애의 진실은 병처로 형성될 뿐이다. 정신장애는 이성의 결여에 대한 이를테면 구체적 측면은 인실 할 수 있지만 실증적 측면은 지정할 수는 없는 현존으로서의 비이성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동시에 가장 부정적인 형태의 경험이다. 정신장애는 광기의 형태로서, 오직 외부로부터만, 즉 접근 불가능한 부재 속으로 이성이 사라지는 한계로부터만 체험되고 사유되며, 이 선험적 개념은 서술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통합력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존재와 비이성의 비존재는 거기에서 통일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정신장애와 광란의 구별은 전통적이다. 정신장애는 무열성 질환인 반면에 광란은 언제나 열을 수반하므로, 징후의 차원에서 확정하기가 쉬운 구별, 광신을 특징짓는 열은 광란의 가까운 원인과 본질을 지정할 수 있게 해준다. 정신장애의 선험적 개념은 여전히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반면에, 광란의 선험적 개념은 구체적인 질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면서 광란의 기원, 원인, 중추, 징후, 결과를 열기의 상상적 일관성, 거의 확연한 논리 속으로 통합된다. 논의들은 통합력을 지닌 동일한 주제, 곧 육체와 영혼의 격렬한 불길로서의 비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정신장애와 연관되는 두 번째 계열의 개념들은 어리석은, 저능, 백치, 우둔 등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기억력, 상상력, 판단력과 동시적으로 관련되는 손상이다. 정신장애와 무감각 상태 사이의 차이가 벌어진다. 무감각 상태는 감각의 영역에 작용한다. 얼간이는 빛과 소리에 민감하지 않고 정신장애자는 빛과 소리에 무관심하며, 전자는 받아들이지 않고 후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시한다.

정신장애의 개념은 비이성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에 아주 가깝고 광기의 구체적 형상들이 생겨나는 실제의 중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채 여전히 경험의 표면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장애는 정신이상의 의학적 개념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 이를테면 신화, 도덕적 가치평가, 상상적 꿈으로 가장 덜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정신장애의 개념은 그런 식으로 사로잡힐 모든 위험에서 벗어남에 따라 가장 은밀하게 일관성 없는 것이며, 이 개념 속에서 본성과 비이성은 조광증과 우울증이라는 선험적 개념이 활기를 띠는 상상계의 심층에서 구성되기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추성적 일반성의 표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2. 조광증과 우울증

 

16세기에 우울증의 개념은 증후에 의한 어떤 규정과 이 규정을 가리키는 용어 자체에 감추어진 설명의 원리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이해되었다.

부분적 정신착란과 검은 담즙의 작용은 우울증의 선험적 개념 속에 병치되어 있는데, 당장은 징후들 전체와 의미심장한 명칭 사이의 통일성 없는 마주침 이외의 다른 관계는 없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면, 이 체액의 차갑고 검은 특성은 정신착란의 주요한 색조, 조광증, 정신장애, 광란과 마주하여 정신착란이 갖는 고유한 가치, 정신착란의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핵심적 원리가 되고, 이런 상황에서 통일성이 발견되기에 이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환이 실현된다. 개념의 결정은 관찰에서의 새로운 엄밀성에 의해서나 원인의 영역에서 새로 발견된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명칭에 함축된 원인에서 결과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인식으로 이르는 특성의 전달에 의해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17세기 초까지 우울증에 관한 논쟁은 네 가지 체액과 이것들의 본질적 특성, 즉 유일하게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물질에만 속하는 안정된 특성의 전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질병의 통일성은 관찰된 징후로부터도 추정된 원인으로부터도 규정되지 않고 이 양자의 중간에서, 그리고 이 양자를 넘어 전달, 전개, 변형의 법칙을 갖는 어떤 질적 일관성으로 인식된다. 우울증이라는 선험적 개념의 변전을 정리하는 것은 의학이론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특성의 내밀한 논리이다.

우울증의 징후 전체와 출현방식을 재조직하는 것은 바로 세밀한 관찰을 넘어서는 이러한 감각들의 정리 작업이다. 우울증 환자의 주요한 증후로서 제시된 부분적 정신착란의 주제는 갈수록 사라지고 그 대신에 들어서는 것은 슬픔, 쓰라림, 고독의 취향, 부동 상태를 비롯한 질적 여건이다. 18세기 말에 사람들은 정신착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무력감, 절망, 일종의 침울한 혼미상태로 특정되는 광증을 쉽게 우울증으로 분류하게 된다.

고전주의 시대에 조광증과 조광증의 변화에 대한 분석도 동일한 일관성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조광증의 핵식점 증후는 대상이 환자에게 실제의 모습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조광증 환자의 정신착란은 판단력의 특별한 결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감지될 수 있는 인상들이 대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의 결함, 정보전달의 장애를 구성하는 것이다. 광기의 심리학에서 진실을 생각과 사물의 부합으로 간주하는 오래된 관념이 공명, 신경섬유를 울리게 하는 감각에 대한 신경섬유의 음악적 충실성이라는 일종의 은유로 옮겨간 셈이다.

우울증의 세계는 축축하고 무거우며 차가웠는데 반하여, 조광증의 세계는 건조하고 뜨거우며 격렬함과 동시에 취약성을 내보일뿐더러, 지각할 수는 없으나 도처에서 나타나는 열기로 인해 메마르고 부서지기 쉽게 되며, 언제나 축축한 냉기의 영향을 곧장 받게 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 모든 질적 단순화의 전개 속에서, 조광증은 내용의 풍부함과 동시에 통일성을 갖추게 된다. 아마 조광증은 열 없는 광분이라는 17세기 초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터이지만, 여전히 신호론적일 뿐인 이 두 가지 특성을 넘어 임상 증후표의 실질적 조직원리인 인식의 주제를 발전시켰다.

아마 열기와 한기, 축축함과 메마름의 세계 전체는 실증주의에 이르기 직정에 의학적 사유가 어떤 풍토 속에서 탄생했는가를 의학적 사유에 환기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적재는 회상일 뿐만 아니라 진통이다. 조광증이나 우울증의 실증적 경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들의 지평 위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귀속관계들의 체계 전체에 의해 서로 이끌리는 특성들의 그러한 인력이 필요했다. 우리가 앎을 통해 조광증과 우울증에서 알아보는 모습을 조광증과 우울증이 그 후로 띠게 된 것은 우리가 여러 세기에 결쳐 조광증과 우울증의 실제적인 징후에 눈을 뜨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인식을 투명할 정도로 정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광기의 경험에서 이 개념들이 어떤 질적 주제를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이 주제 덕분으로 통일성과 의미심장한 일관성을 부여받았으며 마침내 인식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험적 개념에 바탕을 둔 단순한 신호론에서 질적 영역으로 넘어간 셈인데, 이 영역은 언뜻 보아 덜 체계적이고 더 접근하기 쉬우며 덜 구체적으로 한정된 것이지만, 감지될 수 있고 인정될 수 있으며 덜 구체적으로 하정된 것이지만, 감지될 수 있고 인정될 수 있으며 광기의 전반적 경험에 실질적으로 현존하는 단위들은 유일하게 구성 할 수 있었다. 이 질병들의 관찰공간은 그것들에 양식과 구조를 막연히 부여하는 풍경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한편에는 인간이 자신의 독특한 공포가 아닌 모든 것에 귀를 닫고 눈을 감으며 잠들어 버리는, 흠뻑 젖어 있고 거의 대홍수가 난 세계,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단 하나의 세부사항만이 지나치게 커진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뜨겁고 사막 같은 세계, 모든 것이 지리멸렬, 무질서, 순간적 흔적인 공황의 세계가 있다. 조광증과 우울증의 경험을 조직하는 것은 관찰의 신중성에 가까운 것들이 아니라, 우주적 형태를 띠는 이 주제들의 엄밀성이다.

17, 18세기에 이미지들의 작용에서 영향을 받아 구성된 것은 개념 체계나 심지어 증후 전체가 아니라 인식의 구조이다. 이것의 증거는 전체적 형상이 변하지 않는 가운데 특성들이 거의 인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가령 컬렌은 우울증에서처럼 조광증에서도 정신착란의 주요한 대상을 발견하게 되고, 역으로 우울증의 원인을 뇌 수질의 더 건조하고 더 단단한 조직으로 돌리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작업이 관찰을 통해 설명한 이미지의 구축으로 이러지지 않았다는 점, 반대로 이미지가 애초부터 종합의 역할을 확보했다는 점, 이미지의 체계화하는 힘이 인식의 구조를 가능하게 했고, 이 인식의 구조 속에서 마침내 증후가 의미심장한 가치를 띠고 진실의 가시적 현존으로 조직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3. 히스테리와 심기증

 

히스테리와 심기증에 관해서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1) 히스테리와 심기증을 정신병으로, 또는 적어도 광기의 형태로 취급하는 것은 어느 정도로 타당할까?

(2) 마치 조광증과 우울증에 의해 매우 일찍 구성된 것과 유사한 잠재적 짝패를 히스테리와 심기증이 형성하기라도 하는 듯이, 히스테리와 심기증을 함께 다룰 당위성은 있는 것일까?

 

고전주의 시대의 의사들은 히스테리와 심기증에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광증과 우울증에 특이한 윤곽을 부여한 그 일관성이나 그 질적 통일성을 히스테리와 심기증에서는 결코 인식하지 못했다. 모든 특성은 서로 무효화하는 식으로, 이 두 질병의 깊은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무관하게 모순적으로 내세워졌다.

조광증과 우울증이 특성들의 일람표에 의거하여 쉽게 체계화된 것과는 달리, 히스테리와 심기증의 현상은 거기에서 쉽게 자리 잡지 못한다.

히스테리와 심기증 계열의 질병에서 엿보이는 기이한 질적 불안정성, 동태적인 속성과 화학적 비밀의 기묘한 혼동. 특성의 지평에서 조광증 및 우울증 판독이 단순해 보이는 만큼이나, 이 질병들의 해독은 불확실한 듯하다. 아마 조광증-우울증이라는 짝패의 구성에 결정적이었던 특성들의 그 상상적 풍경은 히스테리와 심기증의 역사에서 여전히 부차적이었을 것이고, 필시 언제나 되살아나는 장식의 역할만을 맡았을 것이다. 히스테리 연구의 진전은 조광증의 경우처럼 의학적 상상력의 견지에서 숙고되는 세계의 모호한 특성들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히스테리가 고찰된 공간은 다른 성격의 것이다. , 생체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의 일관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 육체의 공간이다.

 

히스테리와 심기증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1)생체 및 도덕 영역으로의 침투의 동태학, (2)육체적 연속성의 생리학, (3)신경감성의 윤리의 차원에서 복원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히포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 자궁을 생기있고 영속적으로 움직이는 동물로 만들었고 자궁의 움직임을 공간적으로 질서 있게 배분한 오랜 직관이 새로운 방식으로 표명되어 있는 셈인데, 그러한 직관은 욕망에 대한 충족의 가능성도 통제력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욕망의 억제할 수 없는 동요를 히스테리에서 인식했고, 가슴과 머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성기관의 이미지는 플라톤의 위대한 삼분법과 이것의 부동성을 결정하게 되어 있는 위계의 대혼란에 신화적 표현을 부여했다. 사이드햄의 경우나 데카르트 신봉자들의 경우나 도덕적 지관은 동일하지만, 그것이 표현되기에 이르는 공간의 풍경은 변했고, 플라톤의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는 체적으로 대체되었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이 가로지르는 공간이고, 이러한 것들의 무질서 상태는 정확히 하부에서 상부로의 순환이 아니라 혼란스런 공간에서의 불규칙한 수용돌이이다. 사이든햄이 정신의 눈으로 꿰뚫어보려고 한 그 내부의 육체는 중립적 관찰의 생기 없는 시선에 제공되는 객관적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상상하고 육체의 내부 움직임을 해독하는 어떤 방식과 육체에 도덕적 가치를 투입하는 어떤 방식이 서로 마주치게 되는 장소이다. 이러한 윤리적 인식의 층위에서 변화가 실현되고 작업이 행해진다. 의학이론의 언제나 변형될 수 있는 이미지가 휘어지고 굴절되는 것은 바로 이 윤리적 인식 속에서이고, 또한 커다란 도덕적 주제가 분명히 표명되고 점차로 애초의 형상을 변질시킬 수 있게 되는 것도 이 윤리적 인식 속에서 이다.

그렇지만 이 침투 가능한 육체는 연속체이어야 한다. 기관들로 병이 확산되는 현상은 병이 한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옮아가고 급기야는 모든 기관으로 파급되도록 허용하는 전파 움직임의 이면일 뿐이다. 심기증 환자나 히스테리 환자의 몸이 병의 침입 때문에 환자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탄력을 읽게 되는 다공질의 육체라 해도, 병의 공간의 연속성을 매개로 해서만 퍼질 수 있을 뿐이다. 질병이 돌아다니는 육체는 환자의 분산된 증후들이 나타나는 육체와 다른 속성을 갖게 마련이다. 18세기의 의학을 괴롭히는 문제. 심기증과 히스테리를 신경계통의 질병으로 다시 말해서 기관들의 모든 교감성을 좌우하는 일반적인 동인의 자발성 질환으로 만들게 하는 문제.

신경계는 본질적으로 교감성의 장애이고, 신경계의 일반적 경계상태를 전제로 하는데, 이러한 경계상태는 각 기관을 다른 어떤 기관과도 교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히스테리 환자는 이 내부감각이 가장 섬세한 사람이고, 심기증 환자는 반대로 이 내부감각이 무디어진 사람이다.

신경질환은 육체적 연속성의 질병이다. 내적 긴밀성이 있고 부위들의 관계가 너무나 밀접한 육체, 이를테면 기이하게 수축되는 유기적 공간, 이것은 이제 히스테리와 심기증에 공통된 주제가 된 것이고,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 육체의 내적 긴밀화는 분명한, 너무나 분명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이러한 교감성은 근본적으로 각 기관에 감춰진 속성, 이를테면 체인이 말한 그 감정일까, 아니면 매개요소를 따라 이루어지는 실질적 전파현상일까? 그리고 신경질환을 특징짓는 병리학적 인접성은 그 감정의 고조일까, 아니만 그 조직간 물질의 더 광범위한 이동성일까?

기이하지만, 18세기에 생리학자들이 신경계의 기능과 역할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애쓰고 의사들이 이 선험적 개념들을 생리학에 의해 제안된 것과 전혀 다른 도식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병리학적 인식의 불분명한 통일성 속에서 그것들을 막연하게 이용하는 시대에, 아마 의학적 사유를 특징짓는 현상.

이제 우리는 19세기 직전에 이르렀다. 신경섬유의 과민성은 생리학과 병리학으로 편입될 운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히스테리와 심기증이 정신병과 완전히 동류시되는 현상이다. 정신이 감성의 과잉 자체에 눈멀게 되기만 하면, 광기는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신경과민성은 고전주의 시대의 경험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죄의식, 도덕적 제재, 합당한 징벌의 내용을 이러한 광기에 부여한다. 광기를 도덕적 결함의 심리적 결과로 규정한다. 광기에서 비존재의 역설적 발현을 보여주었던 모든 것은 도덕적 죄악의 자연적 징벌이 될 판이다. 19세기의 과학적 정신의학이 가능하게 된다. 정신의학의 기원이 발견되는 것은 정신의학을 재빨리 조롱하게 되는 신경질환과 히스테리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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