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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 / 악셀 호네트 / 옮긴이의 말 / 18.09.05(OT) 

 

p11 : 악셀 호네트는 베를린 대학을 거쳐 위르겐 하버마스로부터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과 교수직을 물려받음으로써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2세대인 하버마스의 뒤를 이은 3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자로 주목받고 있다.

악셀 호네트는 1969(20)부터 본 대학과 보훔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12) 호네트는 레닌주의나 마오주의를 표방하던 주루의 노선과는 달리 이른바 비정통적 마르크스주의로 불리던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경고되어 있었다. 대개 그의 관심은 루카치, 블로흐, 코르쉬 등이었으며, 당시 한생운동의 적으로 규정된 하버마스의 이론과도 이미 친숙해 있었다. 특히 하버마스는 곧잘 좌파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운동권의 비판표적이 되었다.

이런 비정통적 태도 때문에 호네트는 학생운동의 본거지 격인 베를린으로 오면서 정치적 고립에 빠지게 된다. 즉 그는 베를린 대학 사회학과에서 활동하며 좌파에게는 수정주의자, 학생운동의 배신자로 매도되고, 보수 진영에게는 좌익으로 찍히는 수모를 겪었다. 호네트는 이런 비난에 자극받아 자신의 다른 입장을 이론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론작업은 우선 레닌주의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던 알튀세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에 있었다.

 

p13 : 호네트에게 재구성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객관적으로 축소해석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실천의 역사구성적 의미를 밝히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재구성은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이 아니라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중심 개념을 새로운 틀속에서 다시 구성해내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호네트가 염두에 둔 새로운 틀이란 바로 행위이론이었다. 마르크스주의가 노동범주를 통해 사회이론, 인식이론 등을 발전시켜왔다면, 이제는 행위범주가 인간의 변혁활동을 해명하는 이론적 중심 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호네트의 이론적 탐구는 사실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지평 위에서 이루어진다. 당시 마르크스(14)주의가 결여하고 있던 인간의 행위 일반에 대한 해명뿐 아니라 상호주관적 관계와 인간의 욕구에 대한 구체적 개념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호네트는 계몽의 역설을 극복하려 한다. 즉 호르크 하이머와 아도르노의계몽의 변증법이 비판하고 있듯이, 인류의 문명화 과정이 자연과, 자기 자신, 타인에 대한 지배라는 왜곡된 관계를 정착시키는 것으로 전락했다면, 이제 호네트가 밝히려는 삶의 실현 조건은 인간과 자연,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인간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호네트의 (15)인정투쟁 테제는 미드의 사회심리학을 토대로 청년 헤겔의 사유 모델에 경험과학적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또한 푸코의 이론을 투쟁모델, 하버마스의 이론을 의사소통모델로 규정하면서 이 둘을 통해 의사소통이론적으로 정초된 사회적 투쟁 모델을 발전시키려 하였다.

인정투쟁 테제의 핵심은 사회적 투쟁이 상호인정이라는 상호주관적 상태를 목표로 한다는 주장에 있다. 또한 인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각 개인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 즉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가지게 하는 심리적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인정투쟁 태제는 호네트에게 인간학적 문제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다.

첫째, 상호인정관계는 사랑이라는 형태 속에 있다. 사랑을 통해 그 당사자들은 정서적 욕구를 지닌 존재로 인정되며, 사랑을 통해 이 욕구 또한 충족된다. 둘째, 상호인정관계는 동등한 권리의 인정을 통해 형성된다. 이를 통해 각 개인은 자주적이고 도덕적 판단능력이 있는 존재로 인정된다. 셋째로 사회적 연대. (16)여기서 각 개인은 자기만의 특수한 속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인정을 통해 각 개인은 비로소 한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된다.

호네트가 미드의 사회심리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정체성형성과정이다. 이에 따르면, 주격 나(I)’는 타인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상이나 기대를 인지하면서 목적격 나(me)’에 대한 심상을 얻게 된다. 따라서 자기관계는 나에 대한 타인의 관점이 나에게 내면화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이 관계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적격 나와 대상화되지 않는 어떤 자발성으로서의 주격 나의 긴장관계를 전제한다. 미드에게 이 긴장은 특히 사회화 과정과 맞물려 있는 개성화 과정의 추진력이 된다.

호네트는 바로 이 긴장관계 속에 인정투쟁을 엮어놓는다. 주격 나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적격 나와는 다른 어떤 부분을 인정받으려는 투쟁에 서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투쟁을 통해 사회적 주체들이 눈앞에 그리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요구가 완전히 인정된 이상적 공동체이다. 물론 이때 인정을 위한 투쟁은 전 사회영역으로 확산되며, 그 형태 또한 집단화되고 조직화된다.

 

p17 : 사회적 무시나 모욕이 해당 당사자의 안녕을 해치려는 의도에서 일어난다면, 이는 분명히 도덕적 불의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인정관계를 둘러싼 무시나 모욕 행위는 일종의 도덕적 훼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도덕적 관점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의 실현을 이러한 훼손 행위에서 보호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면, 이러한 훼손 행위를 극복하려는 사회적 투쟁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점에서 인정투쟁은 이 책의 부제가 지적하고 있듯이 사회적 투쟁의 도덕적 형식이다.

권리나 사회적 연대 영역에서 각 개인이 겪는 무시에 대한 경험은, 그 무시가 그가 속한 집단에 전(18)형적인 것으로 해석될 때 집단적인 저항을 초래한다.

 

p19 : 호네트와 하버마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즉 이들은 모두 기존 사회에 대한 비판이 훼손 없는 상호주관성이라는 이상적 상태를 근거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이들은 이 훼손 없는 상호주관성을 통해서만 각 개인의 긍정적 자기관계도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 사회화 과정과 개성화 과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리고 서로 맞물려 있는 이 두 과정을 통해 서로 다른 개인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우선 이 이상적 사호주관적 상태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20)하버마스가 일상언어의 보편적 구조를 분석하는 언어철학에서 출발하여 대안적 합리성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이상에 접근하고 있다면, 호네트는 인간의 삶의 실현이라는 인간학적 관심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이상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p21 : 하지만 상호인정의 반대 형태인 무시 행위가 개인의 긍정적 자기관계를 파괴하고 건전한 정체성 형성의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인정투쟁이 정당화된다는 논리가 곧바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도대체 모든 개인의 개성화 요구가 어떤 기준 없이 인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만약 기준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또다시 하버마스식의 합리성 개념이 요구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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