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과 학문

  철학사에서 헬레니즘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망한 기원전 322(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지 정확히 1년 뒤)에 시작하여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족 출신의 마지막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한 기원전 30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시기에 철학의 학파라는 개념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립된다.(p. 291) 여러 학파들이 계속해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스스로의 입장을 고집하며 벽을 쌓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p. 292) 헬레니즘 시대에 비교적 일반적이었던 풍습대로 여러 학파에 소속된 제자들이 어떤 구체적인 철학적 입장을 취하거나 다양한 학설을 기반으로 복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전에 함께 모여 공부하는 것이 당시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p. 293)

 

1. 원자론과 우연성: 에피쿠로스와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세계관

  기원전 306년경에 아테네로 이주한 에피쿠로스는 이곳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교를 설립하고 그의 정원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p. 294) 기록에 따르면 에피쿠로스주의의 영향력은 적어도 서기 3세기 초반까지는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 및 학문 분야에서 에피쿠로스주의는 그리스도교의 등극을 이겨내지 못했다. 거의 모든 차원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그리스도교들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p. 295)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감각이 현실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회의주의자들의 의혹을 부인하고 감각이야말로 세상이 사실상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정확한 표상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p. 295~296)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현실 세계는 다양한 종류의 원자들 간에 발생하는 우연적인 충돌의 결과이지 어떤 정확한 목적을 가진 창조의 결과가 아니다. (p. 297)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원자들의 운동이 때로는 무게와 충돌의 규칙을 뛰어넘어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난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이탈 개념을 제시했던 것은 아마도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신들의 신성한 본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특성이나 걱정거리들을 스스로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부여한다고 보았다.(p. 298) 에피쿠로스주의자는 신을 그가 갈망하는 삶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었고, 모든 걱정, 근심을 떨쳐버리는 단계 아타락시아에 도달하면서 자기 자신을 얼마든지 신성한 존재로 추앙할 수 있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사후의 삶을 믿지 않았다.(p. 298~299)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우리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판단할 때 쾌락이나 고통의 경험이 진실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p. 299)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쾌락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지자마자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쾌락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 행복한 삶은 사치나 변덕을 모르는 삶을 의미했다. 이들은 인생의 목적이 모든 고통의 제거에 있으며 고통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연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 모든 욕망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p. 300)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우정과 사회가 행복한 삶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상당한 결속력을 갖춘 친분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우정은 철학의 효과적인 가르침을 위해 꼭 필요한 일종의 조건으로 간주되기도 했다.(p. 301)

 

2. 스토아학파

  기원전 300년경, 상인이었던 키티온 출신의 제논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나와 아테네의 그림이 있는 회랑에 스토아학파의 모체가 되는 학교를 세웠다.(p. 304) 이어서 수세기가 흐르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명맥을 유지한 스토아 철학은 최소한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스토아 철학의 뿌리였던 소크라테스주의, 둘째는 스토아 철학 고유의 체계적인 성격이다. 스토아학파의 소크라테스주의가 보여 주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에 하나는 이른바 윤리적 지성주의의 정립이다. 소크라테스는 스토아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량과 앎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뛰어난 정신적 기량의 옷을 입고 있어서 평범한 인간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현자만이 기량과 앎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다.(p. 305)

  스토아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아카데미 교장을 역임한 크세노크라테스의 분류법을 받아들이면서 철학을 논리학, 물리학, 윤리학의 세 영역으로 구분했다.(p. 305)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논리학은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이성적 원리로서의 로고스를 구체적인 대상으로 탐구하는 분야였다.(p. 305) 스토아 철학자들은 논리학을 다시 두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달변을 다루는 학문으로 정의되는 수사학, 다른 하나는 참인 것과 거짓인 것, 아울러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것을 다루는 학문’, 즉 변증법에 의해 구축되는 논리학이었다. 의미론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언급 가능한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형체 없는 실재에 상응하는 의미를 탐구하는 변증법의 한 분야다. 의미론이 실재를 반영하거나(참일 경우) 왜곡하는(거짓일 경우) 문장들을 다루는 반면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은 실재하는 사물들을 인식 주체의 정신 속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재생해 내는 표현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p. 306) 사람이 태어날 때 정신은 완전한 불모지와 같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이를 백지에 비유하면서 경험을 통해 개별적인 표현들이 그 위에, 아울러 프네우마pneuma(영혼) 위에 다름 아닌 지문처럼(제논의 정의에 따라) 혹은 애착의 형태로(크리시포스의 정의에 따라) 새겨진다고 보았다.(p. 307)

  스토아 철학자들은 물리학을 자연적 현상에 대한 지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스토아 철학에서 자연physis’, 즉 물리라는 용어는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를 예로 들면, 자연은 온 우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창조 원리로서의 프네우마가 일으키는 충돌의 힘이었다. 프네우마가 일으키는 충돌의 강도를 좌우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불의 결정력이다. 이성적인 실체가 가장 지적인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집중된 영혼, 다시 말해 영혼 속에 불의 힘을 가장 농축된 형태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 308) 우주의 영혼을 하나의 살아 있는 이성(p. 308)적 존재로 이해했던 스토아 철학자들은 따라서 에테르가 우주의 영혼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로고스가 우주의 로고스를, 소우주가 대우주를 반영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동일한 이성적 원리가 인간을 동시에 지배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주의 만물은 주기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불에서 탄생하고 불 속에서 분해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가 유한한 동시에 영원하다고 보았다.(p. 309) 우주의 순환 활동 이론이 가져온 중요한 결과 중에 하나는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론이다. 우주를 다스리는 것은 신성한 법칙이며 모든 사건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반복되는 법칙을 토대로 설명된다.(p. 310)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결정론은 개인의 책임감과 모순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자연이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스토아 윤리학의 중심에는 악습과 반대되는 기량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기량이 오로지 선을 추구하는 반면 악습은 악을 구축할 뿐이다.(p. 310)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기량은 사실상 하나의 목적이었고 어떤 고차원적인 선을 이루기 위한 도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량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현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고 행복은 기량에 따라 살아가는 데 달려 있었다. 선과 악의 본질과 연관되는 실제적인 오류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른바 감성pathe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생리학적인 차원에서의 감성은 영혼의 중추적 기능 가운데 하나인 애착, 즉 프네우마의 축소나 확장에 해당한다. (p. 311)

 

아크라시아: 고대인들의 의지와 의지의 왜곡

  윤리적 차원의 악이 철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분석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도시사회를 중심으로 윤리학의 토대가 마련된 기원전 5세기로 추정된다. 아티카의 비극을 통해 윤리적인 질문, 즉 인간은 왜 잘못된 방식으로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이 새로운 형태를 취하면서 한 개인의 책임감과 동기를 고려하는 새로운 대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p. 313) “성격은 곧 인간의 운명이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계승한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악은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는 외부적인 힘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에우리피데스는 행위자의 의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완결된 행위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던 고전적 정의(正義)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사람들이 최선으로 간주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결핍 상태,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뒤이어 아크라시아akrasia라고 부른 자기 제어 능력의 결핍 상태라는 개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했다.(p.314)

  소크라테스는 앎의 힘이 크기 때문에 스스로의 오류에 대한 인식과 하나가 되어 버린 아크라시아, 즉 자기 제어 능력의 결핍은 심리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하나의 순수한 모순으로 보았다.(p. 315) 반면에 플라톤은 아무도 악행을 일부러 저지르지 않는다는 논리가 인간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을 깨달은 사람도 얼마든지 그것에 위배되는 행위를 할 수 있고 모든 악행은 내면적 분열의 결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의 실현 여부가 기량의 실천에 달려 있다고 보고 기량을 윤리학의 핵심 영역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량의 정반대인 악습은 악행을 낳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자기실현과 행복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만들기 때문에 한 인간이 빠져들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구축한다. 악습이란 한 개인이 타고난 정신적 결함으로 인해 잘못되었거나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목표를 무언가 좋은 것으로 오해할 때, 이 그릇된 목표를 추구하는 영혼의 긴장 상태 혹은 욕망의 결과를 말한다.(p. 317)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7장에서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도록 유도하는 또 다른 성격의 조건 아크라시아에 대해 언급한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서 자신의 도덕적 관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행동을 낳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자기 제어 능력의 결핍 상태는 악습보다는 덜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p. 318)

  헬레니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거리를 두고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영혼psyche이 이성과 고스란히 일치한다고 보았고 이들의 윤리학은 악이나 다를 바 없는 정념pathos(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 자체를 도덕적 판단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의 제거를 위한 일종의 테라피아로 발전했다. 이들은 정념을 경험하는 훌륭하고 올바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념의 부재를 의미하는 아파테이아apatheia만이 유일하게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덕적 조건이라고 보았다.(p. 318)

  그리스 세계에서 행동의 탄생 경로가 오로지 이성과 욕망, 혹은 양자 간의 유희적인 조합을 통해 설명되었던 반면 아크라시아akrasia는 신약성서를 통해 대두된 의지라는 개념과 함께 새로운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의욕적인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선() 혹은 선으로 간주되는 것을 향한 자연스러운 기대의 차원에서 의지boulesis’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의지는 이어서 신약성서, 특히 바울의 서신을 통해, 아울러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통해 이성과 정념으로부터 자유롭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정신적 자유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영혼의 능력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으로 발전한다.(p. 320) 바울은 죄를 의지와 의지간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행위로 설명한다. 아크라시아는 이성에 대한 정념의 승리를 뜻하지 않으며 의지의 박약함에서 비롯되는 결과로서의 악행에 그대로 반영되는 개념이다.(p. 321)

 

3. 지식, 의혹, 확신: 고대의 회의주의

  회의주의 철학은 인문학의 일부 혹은 전체에 대한 판단의 보류를 권장한다. 피론은 사물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정해진 것도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의 느낌이나 견해도 참이나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

  흔히 아카데미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회의주의의 두 번째 학파를 이끈 인물은 아르케실라오스다. 아르케실라오스 철학의 본질적인 특징은 철학적 논제를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인 논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케실라오스가 집요하게 비판했던 것 중에 하나는 진실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스토아학파의 논리, 흔히 식별 가능한 표상이라고 불리던 원리였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식별 가능한 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식별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상 현자(p. 324)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순수한 의견을 가질 수도 없는 존재였다.(p. 325)

  카르네아데스는 아르케실라오스가 아카데미에 정착시킨 회의주의를 새롭게 발전시키면서 활동과 비평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의 철학이 도입한 가장 혁신적인 요소는 개연(p. 325)이라는 개념이다. 카르네아데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인정하는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지고의 선()을 정립할 수 있다는 이들의 선입견과 점복에 대한 신뢰, 점복이 전제하는 운명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그는 모든 참된 인상에 정확히 상응하는 그릇된 인상을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고, 따라서 어떤 인상도 사실상 식별이 가능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다.(p.326)

  아이네시데모스는 아카데미학파 철학자들이 믿음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하면서 철학적 대안으로 자신의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그는 인상과 사유를 상반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대립을 토대로 그는 판단을 보류하는 단계에 도달함으로써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p. 328)

  그리스 회의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료를 제공한 인물은 서기 2세기 후반에 의사 및 철학자로 활동했던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다. 그에 따르면, 회의주의 철학자 역시 교리주의나 아카데미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탐구에 몰두하지만 그의 탐구는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회의주의자는 탐구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능력, 즉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대상과 사유하는(그 방식이 어떤 것이든 간에( 대상에 대항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어울러 서로 상반되는 대상과 담론들이 실질적으로 발휘하는 동일한 효과 덕분에 그는 판단을 보류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고 이어서 평온함을 얻는다.(p.329)

 

4. 5공준의 수수께끼: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리

  에우클레이데스가 연구에 몰두했던 헬레니즘 시대의 태동기는 과거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체제와 사회 구조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시대다.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본질적인 변화가 이러났고 이러한 변화는 흔히 철학과 과학의 결별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되곤 했다. 이때부터 철학과 과학은 고유의 탐구 영역과 모형을 가진 분야로 받아들여졌다.(p. 333)

 

5. 천문학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우주 모형: 히파르코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까지

  헬레니즘 시대의 천문학자들이 제시했던 다양한 이론들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한편에는 우주의 지구중심설을 승리로 이끈 주전원 이론의 모형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16세기에 들어와서야 명예를 회복하게 되는 태양중심설 모형이 있다.(p. 338)

  태양중심설이 천문학적 현상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었다면 왜 아리스타코스의 동시대인들은 이를 곧장 수용하지 않았는가? 태양중심설의 보급을 방해했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원인은, 아르키메데스가 주목했던 것처럼, 별들이 고정되어 있는 천구를 너무 크게 설정해야 했기 때문이다.(p. 342) 두 번째 원인은 만약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태양과 스스로의 축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 운동을 한다면 왜 지표면 위의 사물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가에 대한 답변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원인은 새로운 우주론에 내재하는 균형 파괴적인 요소였다고 볼 수 있다.(p. 343)

 

6. 수학, 물리학, 천문학: 아르키메데스

  아르키메데스는 근대 물리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과 역학의 긴밀한 연관성을 역사상 처음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p. 351)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