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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올바른 이성

올바른 이성을 따르고 있기에 우리가 지나침과 모자람의 중간이라고 주장하는 중용의 상태들에 일종의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p 203)

 

영혼의 탁월성 = 성격의 탁월성 + 사유의 탁월성

영혼┏ ① 이성을 가진 부분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존재자들 = 학문적

┃ ┃ 인식의 부분

┃ ┗ 원리가 다르게도 있을 수 있는 존재자들 = 이성적

으로 헤아리는 부분 = (영혼 중) 이성을 가지고

있는 한 부분

┗ ② 비이성적인 부분

 

이 두 부분 각각에 있어서 최선의 품성상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만 한다. 이 최선의 품성상태가 각 부분의 탁월성이며, 탁월성은 다시 각 부분의 고유한 기능에 관련하는 것이니까(p205)

 

 

2장 성격적 탁월성과 사유

 

영혼 안에서 행위와 진리를 지배하는 것 세 가지, 즉 감각, 지성, 욕구가 있다.

 

성격적 탁월성이 합리적 선택과 관련한 품성상태이고, 또 합리적 선택은 숙고적 욕구이므로, 합리적 선택이 신실한 것이라면 이성(logos)도 참이고, 욕구도 올바른 것이어야만 하며, 동일한 것을 두고 이성은 긍정하되, 욕구는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실천적 사유이며, 실천적 삶이다.(p 205)

 

행위의 원리는 합리적 선택이지만 합리적 선택의 원리는 욕구 및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이성이다. 이런 까닭에 합리적 선택은 지성이나 사유 없이 생기지 않고, 또 성격적 품성 상태 없이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이란 욕구적 지성(orektikos nous)이거나 사유적 욕구(dianoētikē orexis)인 것이며 인간이 바로 그러한 원리(archē)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떤 것도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지성적인 부분들 둘의 기능은 참이다. 그러니 각 부분이 그것에 따라 참을 가장 잘 인식하게 하는 품성상태, 바로 부분에 있어서의 탁월성이다.(p 206)

 

 

3장 학문적 인식

 

긍정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참을 인식하게 되는 다섯 가지가 있다

기예 학문적 인식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 직관적 지성(p 207)

 

학문적 인식은 증명할 수 있는 품성상태이며, 우리가 분석론에서 덧붙여 규정한 다른 모든 것들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p 208)

 

 

4장 기예

 

참된 이성을 동반해서 무엇인가를 제작할 수 있는 일종의 품성상태이며, 기예없음은 반대로 거짓된 이성을 동반해서 제작된 품성상태로, 양자 모두 달리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계하는 것이다.(p 210)

 

5장 실천적 지혜

 

자신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들과 관련해서 잘 숙고할 수 있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때 숙고를 잘 한다는 것은) 건강이나 체력과 같은 부분적인 것에서 무엇이 좋은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과 관련해서 무엇이 좋고 유익한지 잘 숙고한다는 뜻이다(p 210)

 

실천적 지혜는 이성을 동반한 참된 실천적 품성상태로서 인간적인 좋음들과 관련하는 것이 필연적이다.(p 212)

 

기예에 능숙함이 있다는 이야기는 옳은 목적을 위해서든 나쁜 목적을 위해서든 기술적으로 능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천적 지혜는 옳지 않은 목적을 위해 쓸 수가 없으며, 따라서 목적과 상관없이 성립하는 기술적 능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p 212)

 

 

6장 직관적 지성

 

만약 우리가 그것에 의해(증명 ?) 참을 파악할 뿐 절대로 잘못 알지는 못하는 것들이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에 관련하건 아니면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련하건 간에 학문적 인식,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와 직관적 지성이라고 한다면, 또 이가운데 셋(학문적 지혜, 철학적 지혜, 지혜)은 그럴 수 (즉 원리를 대상으로 할 수) 없으므로, 직관적 지성이 원리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남는 것이다.(p 213)

 

 

7장 철학적 지혜

 

학문적 인식들 중 가장 정확한 것이 (철학적) 지혜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지혜는 직관적 지성과 학문적 인식이 합쳐진 것일 터이며, 가장 영예로운 것들에 최정점의 학문적 인식이다.(p 214)

 

실천적 지혜는 인간적인 좋음에 관계하며, 숙고가 가능한 것에 관계한다.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까지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p 216)

 

 

8장 실천적 지혜의 유형

 

실천적 지혜 자기 자신에 관하여(실천적 지혜)

가족에 관하여(가정 경제)

폴리스에 관하여(정치술) 보편적인 것(입법술)

개별적인 것(정치술) 심의

사법

 

실천적 지혜가 학문적 인식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실천적 지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종의 것에 관련하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직관적 지성과 대립해 있다.(p 219)

 

 

9장 잘 숙고함

 

잘 숙고한다는 것은, 따라서 숙고에 있어서 일종의 올바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먼저 숙고가 무엇인지, 또 무엇과 관련하는지 탐구해야 할 것이다.(p 221)

 

잘 숙고한다는 것은 유익함에 따른 올바름이자 마땅히 도달해야 할 것, 마땅히 해야 할 방식, 마땅히 해야 할 시간에 따른 올바름이다.

 

만일 잘 숙고했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숙고를 잘 한다는 것은 목적을 성취하는 데 유용한 것을 따르는 올바름일 것이고, 이에 대한 참된 파악이 바로 실천적 지혜이다.(p 222)

 

 

10장 이해력

 

이해라는 이름, 그리고 그것에 따라 좋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되는 그 이름 또한 여기에서, 배워 아는 것에서 성립하는 이해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우리는 자주, 배워 아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니까(p 223~224)

 

 

11장 실천적 지혜와 개별적인 것

 

우리는 경험이 많고 나이 든 사람들, 혹은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들의 증명될 수 없는 말과 의견들을 증명 못지 않게 경청해야만 한다. 그들은 경험으로부터 나온 눈을 가지고 있어 올바르게 보기 때문이다.(p 226)

 

 

12장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는 영혼의) 각 부분에 고유한 탁월성이기에, 설령 양자 모두 만들어 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반드시 선택할 만한 것임을 말해 두도록 하자(p 227)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을 올바르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만, 그 선택이 (실현되기) 위해서 당연히 행애야 할 것들을 관장하는 것은 탁월성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능력이다.

 

탁월성이 없다면, 영혼의 눈에 품성상태가 생기지 않는다, 실천적인 것들에 관련한 출발점을, 목적이자 최고선은 이런 것이므로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천적 지헤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p 229)

 

 

13장 실천적 지혜와 성격적 탁월성

 

탁월성은 단순히 올바른 이성에 따른 품성상태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동반하는 품성상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것들에 관련한 올바른 이성이란 (다름이닌) 실천적 지혜이다. 그래서 스크라테스는 탁월성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던 반면(그에게 있어서 탁월성은 앎이었으므로), 우리는 탁월성이 이성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 없이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또 성격적 탁월성 없이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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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피해야 할 품성

 

품성과 관련해서 피해야 할 것들에는 세 종류,

즉 악덕과 자제력 없음과 짐승같은 품성상태가 있다.(p 233)

 

 

2장 자제력 없음에 관한 통념과 난제들

 

절제 있는 사람의 특징은 지나침을 갖지 않고 나쁜 욕망도 갖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자제력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한편으로 욕망들이 유용한 것들일 경우 그러한 욕망에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품성상태는 나쁜 것이고, 따라서 모든 자제력 있음이 (반드시) 신실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p 238)

 

자제력 없는 사람은 다른 확신을 가지게 된 후에도 여전히 그 행위를 할 것이다.

(p 239)

 

 

3장 자제력 없음에 관련하는 무지

 

현전하는 앎이 참된 앎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에 (자제력 없음이라는) 감정상태가 생기는 것이며, 감정상태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은 참된 앎이 아니라 단지 감각적인 앎이기 때문이다.(p 244)

 

 

4장 단적인 자제력 없음

 

자제력 없음에 있어서도 분명 절제와 무절제가 관련하는 것과 동일한, 대상에 대한 자제력 없음과 자제력 있음만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유사성에 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그런 까닭에 명예에 대해, 또 이익에 대해 자제력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정하는 조건을 부가하면서 자제력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p 248)

 

 

5장 짐승 같은 품성상태

 

못됨의 한 부분은 인간적인 것에 따르는 것으로, 이것은 단적인 못됨이라고 불리는 데 반해, 다른 한 부분은 어떤 한정 조건에 따라 못됨, 짐승같은 유형의 못됨이나 병적인못됨이라고 불릴 뿐 단적인 못됨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그렇듯이 자제력 없음도 동일한 방식으로 한편으로는 짐승같은 유형의 자제력 없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병적인 유형의 자제력 없음을 이야기하지만, 단적인 자제력 없음은 오직 인간적인 무절제에 따라서만 그렇게 이야기되는 것이 분명하다(p 250)

 

6장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더 창피한 것이다. 분노에 대해 자제력 없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이성에 지는 데 반해, 욕망에 대해 자제력 없는 사람은 욕망에 지는 것이지 이성에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p 251)

 

짐승 같은 품성상태는 악덕보다 저 무서운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더 작은 것이다.(p 253)

 

나쁜 인간은 짐승보다 천 배나 더 나쁜 일을 행할 수도 있으니까(p 254)

 

7장 자제력 없음과 무절제, 유약

 

자제력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은 이 중에서 즐거움에 관계하고, 유약한 사람과 강인한 사람은 고통에 관계한다. 사람들 대부분 품성상태는 중간이다. 보통 더 나쁜 쪽으로 기울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p 254)

 

자제력 없음의 한 종류는 성급함이고, 다른 한 종류는 마음 약함이다. 마음 약한 사람은 숙고를 통해 결심해 놓고도 감정 때문에 자신이 결정했던 것에 머물지 못하며, 성급한 사람은 숙고를 하지 않아 감정에 의해 이끌리기 때문이다.

(p 257)

 

 

8장 자제력 없음과 무절제

 

감정 때문에 올바른 이치를 거슬러 (곧잘) 벗어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올바른 이치에 행위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에 지배당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을 마땅히 무한정 추구해야 한다고 설득될 정도까지는 지배당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사람이 자제력 없는 사람으로, 무절제한 사람보다 낫고 단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최선의 것, 즉 원리적 출발점이 그에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자.(p 260)

 

 

9장 자제력 있음

 

자제력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든 육체적인 즐거움들 때문에 이치에 어긋나게 행하지 않을 사람이며, 절제있는 사람 또한 그러하지만, 자제력 있는 사람은 열등한 욕망들을 가지고 그런 반면, 절제있는 사람은 (열등한 욕망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러하며, 절제 있는 사람은 이치에 어긋하게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닌 반면, 자제력 있는 사람은 즐거움을 느끼되 이끌리지는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p 262)

 

 

10장 자제력 없음과 품성

 

자제력 없음과 자제력 있음은 대부분 사람들의 품성상태를 넘어서는 것에 관계한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견디는 반면,

자제력 없는 사람은 그것보다 못 견디기 때문이다.(p 264)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가운데 불같은 성질의 소유자가 보여주는 자제력 없음이, 숙고는 하되 숙고한 바에 머물지 못하는 자제력 없음보다 더 고치기 쉽다.

또 습관으로 말미암아 자제력 없게 된 사람이 본성적으로 그러한 사람보다 고치기 쉽다. 습관을 바꾸는 것이 본성을 바꾸는 것보다 더 쉬우니까,

사실 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그것은 습관이 본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p 265)

 

 

11장 즐거움과 좋음에 관한 통념들

 

일반적으로 즐거움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모든 즐거움은 본성(의 충만)으로 가는 감각 가능한 생성인데, 그 어떤 생성도 목적과 동류일 수 없기 때문이다(p 266)

 

가장 좋은 것이 즐거움이 아닌 이유는, 즐거움이 목적이 아니라 생성이기 때문이다.

(p 267)

 

 

12장 즐거움에 관한 통념의 검토

 

모든 즐거움이 생성이거나 생성과 함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즐거움은 활동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다. 또 즐거움은 무엇이 생성될 때가 아니라 (어떤 능력이) 발휘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목적은 모든 종류의 즐거움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본성의 완성으로 이끄는 즐거움과만 다른 어떤 것이다.

 

이런 까닭에 즐거움이 감각 가능한 생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본성의 상태의 활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감각 가능한대신 방해받지 않는’(활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p 268)

 

 

13장 즐거움과 행복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삶이 즐거운 삶이라고 생각하며, 행복 안에 즐거움을 집어넣는 것이다. 이것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어떤 활동도 방해를 받아서는 완전해지지 않는데, 행복은 완전한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행복한 사람은 육체 안에 있는 좋음들과 외적인 좋은들, 그리고 행운을 추가적으로 필요로 하는데, 바로 이런 점들에 있어서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다.(p 271)

 

 

14장 육체적 즐거움과 인간 본성

 

신은 언제나 하나이며 단순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운동이라는 활동뿐만 아니라 운동하지 않음이라는 활동도 있으며,

즐거움은 오히려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변화는 무엇이든 달콤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일정의 나쁨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변하기 쉬운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처럼 변화를 필요로 허눈 본성 또한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본성은 단순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니까(p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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