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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말기의 전통 철학과 신학

트라야누스에서 콘스탄티누스에 이르는 시대 AD1~4세기는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이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된 평화의 시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문화 전통을 습득하고 해석하며 발전시키는 데 주력할 뿐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던 시대이다.

이러한 시기에 이성을 중시하는 전통철학을 반대 하는 일종의 종교사상이 등장, 이후 혼합주의라 불리는 이 종교사상은 다양한 형태의 신비주의와 계시종교사상들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제 다신주의에 실망한 영혼들에게 독특한 종교적 성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의식했던 것은 세계의 보편적인 영혼이었고, 신비주의였으며, 다른 성격의 믿음이었다.

 

1.그리스도교

1.1 200년 동안의 그리스도교

나사렛 예수의 활동시기에서 3세기 초에 이르는 200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자율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를 창시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예수의 생애와 함께 시작된 왕국에의 초대를 의미하는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으며,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어졌던 믿음을 모든 민족에게 허락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고 믿을 뿐이었다.

예수를 믿는 비유대인의 늘어남과 모세의 율법을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는 확신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차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후 유대교가 율법을 토대로 재건을 길을 걸으면서 그리스도교도들과 그리스도교가 아닌 유대인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이시기에(200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한 명의 주교가 여러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맡아 지도하는 체계를 가지게 되었고 신약성서를 구성하게 될 작업이 이루어졌고, 율법을 고수하며 예수를 인간으로 간주하던 신도들은 공동체에서 소외되었고, 예수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신학사상이 거부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를 가장 우수한 종교인 동시에 사회가 신의 뜻에 부응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도 정치지도자들이 받아들어야 할 종교로 간주하고 소개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1.2 그리스도교는 언제 시작되었나?

그리스도교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예수나 바울의 활동이 유대교라는 종교적 내부에서의 움직임이었고, 후대 문헌상으로도 그리스도교라는 명칭1세기 말 이후에 집필된 <사도행전>에서 안티오키아의 예수 추종자들을 부를 때 외부인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고, 또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유대교와 상반되는 종파로 제시한 것으로 볼 때, 종교라기보다는 유대교 내부의 종파를 일컫는 용어였다.

두 종교가 서로 다르고 상반되는 종교라는 역사적 사실은 예수를 믿는 신도들을 배척하고 깎아내리려는 담론의 결과로, ‘명명은 이단을 정의하고 배척하는 과정이었다. 66년에서 73년 사이 일어난 유대인 반란이 실패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성문화된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파의 랍비들은 구전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파와 함께 유대교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율법이 아닌 신과 이스라엘을 중재자의 존재(하느님의 아들’)는 분열을 초래하는 위험한 요소로 비춰졌고, 또한 구약성서의 모든 계시를 한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랍비와 바리새파의 재건방식은 예수의 제자들에서 율법해석에 대항 할 수 있는 해석 방식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1.3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라는 이름의 목수. 서기 20년 대 말에 고향인 갈릴리와 이스라엘 국경 지역을 돌아다니며 설교활동을 펼침,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임박했음을 예언했다. 예루살렘 유대교 지도자 계층의 협력으로 로마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죄명을 받고 서기 304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을 통해 신이 그를 지지했고 여전의 그의 뜻을 지지한다고 확신한 그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포교 활동함.

예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왕국으로, 유대인 사이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을 물리치기 위해 신이 곧 세상에 나타나 그의 주권을 선포하게 될 것이며 이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을 지배하리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예수는 이러한 기다림을 공유하면서도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인성을 통해 신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의 왕국을 실현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이것이 그가 특별했던 점이다.

그는 가족을 떠나 세상을 떠도는 설교자의 길을 선택, 그의 인간됨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호의에 의존하며 살았는데 이런 삶은 종교적인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빈곤이 지배할 때 위기에 대한 하나의 답변으로 기능하곤 했다. 예수는 왕국의 도래를 외치는 예언자가 아니라 왕국의 첫 단계를 실현할 인물, 메시아였다.

문헌상으로는 예수의 말씀 복음서혹은 ‘Q문서라 불이는 문서가 50년대 실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1~2세기 사이에 예수에 관한 글이 곳곳에서 읽히고 전파되었다.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는 후에 신약성성가 될 그리스도교 문서 선별과정에 이미 결정된 문서들이다.

 

1.4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서

예수의 죽음 이후 제기된 문제는 누가 그의 활동을 어떤 식으로 계속 이어 가느냐의 문제, 즉 복음의 전파는 예수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조마간 세상에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과 신이 예수를 사망의 어두움 속에 버려두지 않고 그와 함께하는 영생으로 인도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복음의 전파과정은 예수를 통해 드러난 신의 역사는 구원과 동시에 종말을 예정했고, 이것은 예수의 메시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1.5 비유대인을 향한 말씀의 전파

예수에 의해 시작된 복음운동은 이스라엘 내부에 국한된 깨어남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후 복음의 전파가 예루살렘을 시발점으로 점차 사마리아와 안티오키아, 소아시아, 그리스를 거쳐 로마까지 이어졌으며, 12사도들이 이 전파 사업을 주도했다고 사도행전은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에서는 실제 사건(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이 일어나는 시기 12사도는 이미 해산되었고 지도자 역할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라고 한다. 유대 고대사에 의하면 62년 당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진정한 수장 역할은 계율위반으로 투석형에 처해지기 전까지는 야고보였다.

예수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으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비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 예수를 믿는 비유대인이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내부에서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언약을 통한 율법의 준수를 기본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전통적인 원리가 예수의 존재로 인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신전과 법률 간의 중재라는 전통적인 도식은 사라졌으며 유일하게 결정적인 요소는 예수에 대한 믿음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태도가 율법을 우선하는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우선하는 이들을 탄압하게 만들었다.

 

1.6 타르소스의 바울

그리스문화권의 유대인이며, 부활한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았다(이스라엘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믿으며 이것을 유대인이 아닌 자에게도 전하라는 뜻으로 이해). 안티오키아 그리슫도교 공동체의 의탁으로 선교사 바르나와 협력하여 활동.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 그리스도교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에게 검거 로마로 후송되었고, 64년에 일어난 로마 화제 이후 황제 네로가 일으킨 그리스도교 박해 기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신들은 특별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현한 가치 전복과 이를 토대로 하는 깊이 있고 급전적인 신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공동체들의 다양한 상황과 요구에 대한 답변은 그리스도교의 모든 역사와 교리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깨달음도 포함되어 있다.

 

1.7 1세기에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의 성장

1세기 말 그리스도교 포교의 중심지는 헬레니즘과 로마문화에 젖어 있던 대도시로 로마와 안티오키아며, 에페소스는 선교활동의 요충지였으며 예루살렘은 유대인 반란을 계기로 펠라로 이주,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2세기 주도권을 쥔 정교는 율법을 지키며 예수를 믿는 신도들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교는 매 10년 마다 40% 증가 310년 신도 수는 대략 8819765명에 달했다.

 

1.8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적인 요소

1세기 후반 그리스도교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비유대교인으로 유대교 계율 때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복음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사람에게도 호응을 얻었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난한자와 약자들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며, 후원과 봉사를 통해 약자와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들을 도왔다. 로마교회의 영향력은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켜졌다.

 

1.9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조직

교회는 실질적인 공동체를 형성 했던 그리스도교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기 교회에는 다양한 구조를 지닌 지도부와 행정부가 존재했으며, 신도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은사를 허락하는 성령의 현존과 역사였다.

공동체 안에는 관리자와 협력자가 있으며, 장로로 구성된 심의 기관 형태도 있었다. 그리스도교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지역 공동체들의 끈끈한 결속력이었다. 하지만 일인 주교 제도가 2세기 후반에 드러나기 시작, 주교들은 공동체 뿐 아니라 도시 주변에 산재하던 소규모 공동체까지 권한을 주장, 3세기 대규모 교회들이 지방 주교회의의 결정권을 거머쥐면서 영향력을 확장, 4세기 이르러 황권과 결탁. 교회는 믿음과 사랑의 결속만 의미하지 않으며 군력의 배분과 교리의 통일성 유지를 위해 상호의존 관계도 동시에 의미기 시작했다.

 

1.10 그리스도교의 다양성, 정교와 이단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가져온 결과는 그리스도교 정교의 등극이다. 처음에는 다양한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존재, 예수와 구원을 제시하는 방식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안티오키아의 아냐시오와 몇몇 문헌들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육화가 신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인간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기에 예수의 인성을 하나의 순수한 가면으로 보는 여러 형태의 해석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적으로 말하면 예수의 존재와 메시지에 대한 상이하면서도 모순되는 해석들이 동시에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던 몇몇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의 신학체계들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중 하나가 영지주의.(502~503)

그리스도 영지주의는 유대교나 다른 유형의 고대 종교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특징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였다.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 인물 신학자 마르키온은 이스라엘 신보다 더 높은 곳에 다른 신, 완벽하고 초월적이며 본질적으로 사랑과 일치하는 영적 세계의 주인이 있다고 믿었고, 하등의 신에 의해 탄생한 인간의 참담한 현실을 보고 가엾게 여겨 헛된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보냈다고 여겼다.

특히 정교 신학자들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분리시키고 신의 선의와 상벌을 토대로 하는 정의의 양립 가능성을 거부하는 신학이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 잘 이해했다. 몬타나스 주의가 이를 잘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교의 혼란스러운 경쟁 구도는 신의 본질, 신이 창조한 세상 및 인간과 그의 관계, 신과 이스라엘의 보다 구체적인 관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계시의 가치, 예수와 그의 업적, 예수와 복음에 관한 문헌들의 정통성 등에 관한신학적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교단을 수립해야 한다는 반응과 입장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답변을 마련한 인물은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다. 이레네오는 이라는 주제 하에 상이한 성향의 종파들을 분류하고 논박, 이레네오는 받아들일 수 있는 담론의 영역을 규정하는 규칙들의 총체 진실의 규칙을 제시했다. 그는 구전을 통한 전파 보다는 문헌들을 중심으로 한 경전 구축을 고집했다. 구전을 중시하는 파피아스도 있었지만 이레네오의 전승에 전통성을 보장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구전을 고집하던 공동체이며 사도가 아닌 주교들의 계승이었다는 점이다. 이레네오는 구약을 통한 계시와 예수를 통한 계시를 유기적으로 조합 구약에서 예수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역사 및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된 운명의 영광스러운 완성과 일치시켰다.

 

1.11 그리스도교와 정치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이해한 사람들은 이 종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한편 바울은 예수 재림에 자신의 처지나 사회적 위치를 뒤바꾸기위해 애쓰지 말라고 한다. 바울은 세상의 권세에 복종할 것을 권고한다. 이것이 신에게서 왔고 좋은 일에 상을 주고 나쁜 일에 벌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보았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세계는 내면적 세계였다. 정치와 권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입장은 호교론을 통해 계속유지, 로마의 권력자들과 지도자 계층에게 신의 계율이야말로 백성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며 모든 인간 사회를 이끌어야 왕이라면 당연히 모든 백성들이 존중하도록 조치해야 할 윤리관에 부합하는 계율이라고 강조헸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은 수많은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에서 발견되며 유대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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