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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1 : 윤리를 악에 대한 합의된 표상이나 타자에 대한 배려로 규정한다면, 윤리는 무엇보다도 오늘날 세계에 특징적인 선을 이름짓고 열망하는 것에의 무능력을 뜻한다.

1. 필연성에 봉사하는 윤리

p42 : 오늘날 의회주의 정치는 경제의 스펙터클을 체념적인 합의된 의견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정치가 그 운동을 조직한다고 하는 가능성들은 사실상 경제적 준거의 외적 중립성에 의해 미리 제한되거나 폐기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주체성은 어쩔 수 없이 일종의 불쾌한 무능력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무능력의 공허함을 선거나 정당 당수들의 미사여구들이 매워준다. (43) 사람들이 윤리의 회귀를 가능케 한 복음처럼 내세우는 그 유명한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란, 사실상 필연성의 궤변에의 동참을 뜻하는 것이고, 원칙들의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가치의 현저한 빈곤화를 뜻하는 것이다.

 

요컨대 진리란 그 의도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의한 것인 유일한 것으로, 지배적 의견들에 대항해서만 작동될 수 있다. 지배적 의견들이란, 항상 모든 자가 아니라 특정인들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44 : 윤리는 스스로를 명시적인 합의를 위한 영혼의 보족물로 내세운다. ‘둘로 갈라지는 것은은 윤리를 겁먹게 한다. 그리하여 윤리란 모든 관념과 모든 정합적 사고의 기획을 금지시키는 것을 구성하며, 사고되지 않은 익명적 상황들에 인도주의적 잡담들을 덧씌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도 아직 탐사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우리 상황에, 종국적으로 우리들에게 귀속시켜 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권 등은)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다. 법의 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즉 법을 지탱하고 있는 그 보소적 정체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p45 : 그렇지만 올바로 간파해야 할 것은, (경제적) 필연성에의 굴복이 윤리가 땜질하는 공공정신의 유일한 구성요소도 아니고 최악의 구성 요소도 아니라는 사실이. 왜냐하면 니체의 금언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게 하는 것은, 모든 무력성은 무에의 의지에 의해 노동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에의 의지의 또 다른 이름은 죽음충동이다.

 

2. 죽음의 서양적정복으로서의 윤리

p46 : 너무도 많은 악과 타자로부터 양분을 공급받고 있는 윤리는, 그것들(악과 타자)을 가까이에 놓고 보면서 침묵(그 수다의 혐오스러운 이면인 침묵) 속에서 즐긴다. 왜냐하면 윤리에 내재적인 관할의 핵심은, 항상 누가 죽고 누가 죽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허무주의적이다. 윤리 밑에 깔려 있는 확신은 인간에게 진정으로 도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죽음이라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동태에 대한(47)가능한 지지자로서의 인간과 죽음을-향한-존재(마찬가지로 행복을-향한-존재’)로서의 인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선택은 또한 철학과 윤리 사이의 선택, 진리들에게 용기와 허무주의적 감정 사이의 선택이기도 하다.

3. 생명윤리

p48 : 윤리는 오로지 표면적으로만 모순일 뿐인 두 가지 충동의 이음매에 위치한다. 윤리는 인간을 악이 아닌 것에 의해, 행복과 생명에 의해 정의하면서도 한편으로 죽음에 의해 매혹당하고, 또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사고 속에 기입시키는 데 무능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 그 자체를 최대로 은밀한 스펙터클로 변형시키며 동시에, 산 자들이 개념 없는 만족이라는 그들의 착락적 습관을 저해하지 않을 것으로 희망할 권리를 갖는 그러한 사라짐으로 변형시키면서이다. 따라서 윤리적 담화란 숙명주의적 것이고, 동시에 결단코 비극적이다. 즉 윤리적 담화는 죽음을 방치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불사의 것을 죽음에 대립시키지 않고서 말이다.

 

근본적으로 나치즘은 삶의 윤리학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 나치즘은 자신에게 고유한 품위 있는 삶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품위 없는 삶들을 종식시키는 임무를 집요하게 떠맡았던 것이다. 나치즘은 윤리가 잡담이기를 멈추고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을 획득하자마자, 윤리적 장치의 허무주의적인 핵심을 고립시켜 그 절정에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p49 : 생명과 품위에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들은 좋지 않은 징조이다. 윤리와 생명의 결합은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다. 적어도 치욕적인 우생학과 존중받아야 할 안락사 사이의 접두사의 동일성이 위협적인 것이든 말이다. ‘행복하게 죽는다라는 쾌락주의적 교리는 명백히 잘 산다에 속하는 층위인 잘 낳는다라는, 그야말로 치명적이고 막강한 열망에 장벽을 드리우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뿌리는 행복에 의해 인간을 정의하는 모든 시도가 일정하게 허무주의적이라는 데에 있다.

 

4. 보수주의와 죽음의 충동 사이의 허무주의

p50 : 허무주의적 형상으로 간주되는 윤리, 우리 사회들이 보편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미래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되는 윤리는 한 쌍의 욕망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 하나는 보수적 욕망으로 야만적인 객관적 경제와 권리와 담화가 겹쳐진, 우리 서양적풍경에 고유한 질서의 정당성을 도처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는 욕망으로 생명에 대한 완전한 정복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은폐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서양적정복에 예속시키는 것이다.

(51) 그리하여 윤리를 지복한 허무주의라고 명명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보수주의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선포된 것을 열망한다고 선언하면서이고, 무에의 욕망에 대항하여 진리들을 긍정하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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