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고대중세편)

움베르토 에코, 리카르도 페드리가 편저

 

고대인들을 바라보며

 

중세 철학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혹은 적어도 중세 철학 속에서 하나의 일관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세월과 혁신을 통한 사유의 발전 과정을 토대로 하는 일관성을 원칙적으로 부인할 필요가 있다.

중세 철학자는 항상 전통적인 사상의 충실한 수호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우연히 혁신을 이루어 냈을 때 조차도 그것을 내세우기보다는 감추려고 노력했다.

중세 문화는 일종의 도서관으로, 즉 다른 어떤 종류의 탐구보다도 먼저 세계 혹은 우주의 축소판으로 간주되던 책들을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공통된 의식을 기반으로 하나의 도서관처럼 탄생했고 발전했다.(p. 555)

이상적인 연속성의 차원에서 고대인들을 바라보며 중세 초기의 저자들은 우리에게 지혜에 대한 열정과 탐구로서의 철학 개념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중세 철학자들에게 앎을 사랑하고 탐구한다는 것은 성경의 연구와 함께 고대인들의 지식을 가르치고 보존하고 전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p. 556)

 

1 끝없는 탐구: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

1.1 아우구스티누스의 삶과 사상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여정: 두 종류의 움직임(p. 558)

1) 외부세계에서 유래하는 감각적인 세계에서 진실과 행복을 탐색하는 내면의 세계로 나아가는 움직임

2)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움직임, 즉 영혼이 탐구하는 피조물과 세상이라는 하등한단계에서 궁극적인 논리와 답을 찾아야 할 공간으로서의 내면이라는 우월한단계로 나아가는 움직임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에서 진실의 탐구 과정은 항상 삶의 실존적인 측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의 글에서는 어떤 성찰의 최종적인 결과인 듯 보이는 이야기들도 다시 논의의 대상이 되곤 한다. 결론들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거나 삶의 또 다른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항상 새로운 문제, 새로운 질문과 새로운 연구 과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p. 559)

 

1.2 삶과 저서: ‘고백을 통한 여정

-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의 로마 식민지 타가스테에서 서기 354년에 탄생.

- 어머니 모니카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를 어릴 때부터 접함.

- 성경의 문학수준이 고전저자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성서 공부 포기.

- 악의 문제를 추적하던 중 마니교에 관심을 가짐.

- 카르타고에서 교사생활 중 만족을 못 느끼고 로마로 다시 밀라노로 이주.

- 성공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며 산책하던 중 집어서 읽어라라는 목소리를 듣고 성경에서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바울의 문장을 읽게 됨.

- 그리스도교로 개종후 교수직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며 대화록 집필.

- 서기 387년 세례를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로마 근교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게 됨.

- 서기 395년 히포 레기우스에서 주교로 임명 됨.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속문화의 관계는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상당히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던 토론 주제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전통 세속 문화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열린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입장을 상당히 강조한 저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분명히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전 문화에서 유래하는 자유학예를 권장하기까지 했다.(p. 566)

 

1.3 삼위일체론, 기억, 유추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에 대한 탐구를 종용하는 영원과 진실의 흔적은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신은 사실상 인간 스스로의 가장 고차원적인 동시에 가장 은밀한 내면에서만 발견된다.

 

성경의 첫 구절들을 해석하는 고백록의 마지막 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존재하는 세 가지 방식, 존재’, ‘’, ‘의지에 대해 언급하며 의지에 아주 독특한 역할을 부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렷하게 다르지만 사실상 분리할 수 없는 존재 방식들이 삼위일체와 유사하다고 보았다.(p. 567)

 

삼위일체의 교리에 분명한 구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 세계의 이라는 개념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수식어는 주어의 실체에 대해 말하거나 부차적인 특성을 언급할 때 주어와 조합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인격체를 수식하는 수식어들(아버지, 아들, 성경)이 순수한 관계의 수식어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이 신성한 세 인격체들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설명할 뿐 서로 다른 세 가지 실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부차적인 특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고대에 신 혹은 근원 원리의 개념이 실체라는 범주의 절대화였다면, 이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그의 뒤를 잇는 신학 전통 속에서 관계라는 범주의 절대화로 변한다. 여기서 사랑으로서의 신이 언급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두 주체의 관계와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사랑의 개념이 바로 관계의 순수한 구조를 표상하기 때문이다.(p. 568)

 

1.4 주교와 정통성: 이단과의 전쟁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가 얼마든지 외부세계처럼 불완전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으며, 따라서 복음 전파라는 고유의 임무 속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하고,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동시대 신학자들 가운데 팔라기우스주의자들로 불리던 이들은 원죄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물려받은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신의 도움 없이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가 세대를 통해 육체적으로 전달되며 막 태어난 어린아이들조차도 성적 쾌락을 통해 태어난 만큼 죄인이라는 반론을 펼쳤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악에 물들어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류학적 입장이다.(p. 579)

 

1.5 역사에 도전장을 던진 주교: 신국론

서기 410824, 고대인들에게는 역사와 문명 그 자체와 다를 바 없던 로마가 알라리크의 고트족 침입으로 인해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하나의 문명이 저무는 대신 문명 자체가 저물었고, 하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체제가 위기에 빠진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와 문화 자체가 위기를 맞이했다. 이 사태를 바라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와 로마 문화가 쇠퇴한 원인으로 그리스도교를 지목하던 사람들의 논리에 이견을 제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오히려 로마 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전적으로 새로운 요소이며 로마의 쇠퇴는 악습과 위선에 빠진 로마인들이 역사 속의 문인들이 설파했던 위대한 덕목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p 571-572)

 

1.6 은사(恩賜)의 교리

신플라톤주의가 존재론적 위계질서의 여러 단계들 간에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소통을 인정한 바 있듯이, 동일한 차원에서 인간에게 신을 사랑하고 갈망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하는 사건 같은 것이 바로 은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은사는 영적 삶의 공간인 동시에 인식 활동의 중심인 영혼의 완전한 실현과 일치한다.(p. 573)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고 반달족이 히포를 향해 접근하던 시기에, 로마 문명이 막을 내리고 그리스도교가 한 줄기의 마지막 희망인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택한 것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통해 그의 신도들에게 더 이상 의혹이 아닌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었다.(p. 574)

 

 

2 신의 이름: 위 디오니시우스와 신비주의 신학

2.1 한 정체불명의 저자

위 디오니시우스는 시리아 출신의 그리스교도로 추정되며 아테네 신플라톤주의학파의 마지막 철학자들, 즉 프로클로스와 다마스키오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신플라톤주의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사실상 여러 가지 언어적이고 교리적인 측면의 특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교리적인 특징의 몇 가지 예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보류-발전-회귀의 삼중 개념, 악을 존재론적 결핍으로 보는 관점, 신과 영혼의 신비주의적 결합이라는 개념, 플라톤의 대화록 파르메니데스의 신플라톤주의적인 해석(첫 번째와 두 번째 가정)을 모형으로 하는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에 지속적으로 의존하는 경향 등을 들 수 있다.(p. 585)

 

위 디오니시우스는 교부 철학자들, 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키로스의 테오도레토스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p. 586)

 

2.2 저서들

15장으로 구성된 천상의 위계질서는 구약과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천사들의 고유한 특성과 기능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높은 단계

치천사

지천사

좌천사

중간 단계

주천사

역천사

능천사

가장 낮은 단계

천사

대천사

권천사

모든 단계의 천사들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특성을 뛰어 넘어, 천사들의 계보는 이들의 상호 관계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포함한다. 가장 높은 단계의 천사들은 직접 신으로부터 빛을 통해 존재와 삶과 지성을 부여받는다. 이어서 이 빛을 낮은 단계의 천사들에게 전달하면서 깨달음을 주고 정화를 통해 이들을 완전하게 만들면서 신의 신비 안으로 끌어들인다.(p. 586)

 

교회의 위계질서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전례(典禮)양식(세례식, 성찬식, 견진성사, 성품성사, 장례)을 알레고리 차원에서 묘사하고 해석하면서 천사들의 계보가 교회의 위계와 상응하는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디오니시우스 전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신의 이름1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경에서 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들을 분석한다. 30개 정도의 용어들이, 예를 들어 ’, ‘’, ‘아름다움’, ‘사랑,’ ‘존재’, ‘’, ‘지성등등이 신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에게 다가서는 일은 부정의 길을 통해서만, 즉 이전에 받아들였던 신의 모든 이름들을 점진적으로 지우는 데 성공할 때에만 가능하다.(p. 587-588)

 

신비주의 신학신의 이름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내용의 정리라고 할 수 있다. 부정의 길은 신성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절정에 이르는 신비주의 여정의 도구로 사용된다. 신은 실제로 어떤 긍정이나 부정도 초월하는 존재이며 그와의 결합은 감각적이거나 지적인 모든 경험을 초월한다.(p. 588)

 

2.3 사상: 신의 본성에 관한 성찰

위 디오니시우스의 성찰은 신의 본성과 그의 창조 활동, 아울러 피조물들이 그에 대한 앎을 완성해 가는 방식에 집중된다. 이러한 주제들의 관계는 총체적으로 신플라톤주의에서 유래하는 보류-발전-회귀의 원리에 의존한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보류 단계와 발전 단계에 있는 신의 본성을 플라톤이 제시한 파르메니데스의 첫 두 가정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인 해석, 결정적으로 프로클로스에 의해 정형화된 해석을 토대로 묘사한다. 첫 번째 가정의 대상은 하나, 즉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이며 결과적으로 어떤 종류의 수식어도, 심지어는 ‘~이다라는 수식어도 허락하지 않는 하나. 두 번째 가정의 하나는 첫 번째 가정에서 부인되었던 모든 특성들을 수용하는 하나.

 

위 디오니시우스 사상의 혁신적인 면은 첫 번째 가정과 두 번째 가정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 즉 신에 적용하면서 보류단계와 발전단계를 유일신의 두 측면으로 고려했다는 데 있다. 디오니시오스의 신은 사실상 보편적이고 유일무이한 원인인 동시에 이에 상응하는 모든 결과를 단순하고 불분명한 형태로나마 이미 품고 있는 신이다.(p. 589)

 

신이 발전을 통해 이룩한 모든 것들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신이라는 원리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단계가 바로 회귀. 인간에게 회귀의 과정은 성경이 신을 가리키며 언급하는 상징들, 즉 감각적으로 인식이 가능한 요소들의 발견과 해석을 요구하는 종교적 정화와 깨달음의 과정이다.

 

부정의 길은 창조의 결과에 불과한 피조물의 입장을 토대로 규정되는 신의 긍정적인 특성들이 불충분하고 편협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긍정의 담론에 따르면 신이 피조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존재나 선이라는 특성의 기원이 되는 만큼 존재와 선의를 아울러 그의 특성으로 부여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해 보이지만, 한 차원 더 높은 부정의 담론에 따르면 사실상 존재라는 개념도 선이라는 개념도 피조물에게만 적용이 가능할 뿐 신의 본성을 적절한 방식으로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거나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위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흔히 최선의 길로 간주되는 부정의 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길이 존재한다. 이 길의 과제는 긍정이나 부정을 뛰어넘어 신비로운 침묵, 즉 어떤 형태의 앎보다도 우월하고 신의 붙잡을 수 없는 초월성과 유일하게 어울리는 무지의 신비로운 암흑에 도달하는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위 디오니시우스는 분명히 신에 관한 전통적인 형태의 담론, 즉 교부 철학과 신플라톤주의 담론의 복원과 수정 작업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p. 591)

 

신이 실행에 옮긴 창조의 가장 분명한 특성은 위계의 측상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처럼 위 디오니시우스 역시 신이 무소부재한 존재이기 때문에 없는 곳이 없다 하더라도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것이 동일한 방식으로 신성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차별화란 신의 능력이 쇠퇴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피조물이 그것을 어디에서든 동일한 방식으로 수용하지 못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p. 591-592)

 

3 억압받는 자를 위한 목자: 보에티우스와 위안의 철학

3.1 ‘최후의 로마인

보에티우스는 그가 사는 시대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다름 아닌 시대의 요구라는 측면에서 문화 계획을 추진한 지성이었다. 서로마제국의 쇠퇴와 함께 진행되던 지식 세계의 퇴폐를 지켜보면서 보에티우스는 천문학, 음악, 수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첨단 과학지식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주요 그리스 사상가들의 철학을 라틴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저서들을 번역 출판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서들을 함께 집필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p. 596)

 

3.2 번역과 주석

그의 원대한 계획에 비해 실제로 보에티우스가 완성한 번역서와 주석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보에티우스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 중에는 명제론범주론,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변증론, 소피스트 논쟁에 관하여가 있다.

보에티우스가 다른 번역서들에 대해서도 주석을 집필했다. 명제론주석 두 권, 변증론주석 한 권을 비롯해 키케로의 변증론에도 주석을 달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전서에는 몇몇 용어 설명을 첨부했다. 범주론에 대해서는 두 권의 해설서를 집필했다.

 

3.3 철학과 신학

보에티우스의 저서들 가운데 몇몇은 분명히 신학적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신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보에티우스의 논리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이 논리학적인 요소들은 일련의 개념들을 분명하게 정의하는 데 활용된다. (p. 599)

또렷한 정의, 견고한 논리,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의 용어 등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신앙의 실상을 좀 더 명확히 하고 이단자들의 주장을 단죄하기 위해 사용된다.

예시) 신의 선의와 피조물에 내재하는 선의의 차이 / 삼위일체의 신비(p. 600)

 

3.4 철학의 위안

만년에 감옥 생활을 하면서 쓴 철학의 위안에서 보에티우스는 무대에 올라 철학과 대화를 나눈다. 철학의 위안을 뒷받침하는 관점은 인간의 역사와 저자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이해, 역사를 지탱하는 섭리와 이 섭리를 아는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주어진다. 철학의 위안을 통해 비춰지는 보에티우스의 이미지는 고대 말기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각양각색의 사상들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려는 한 적극적인 지식인의 모습이다.(p. 600-601

 

4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4.1 다재다능한 학생

에리우게나는 라틴계 교부 철학자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 연구에 몰두하며 교부 철학을 전파하고 보전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성서 연구가 다른 어떤 활동이나 방법론보다도 우선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p. 605)

 

에리우게나의 여러 저서에서 우주는 피조물을 창조주에게 인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완벽한 기계로 묘사된다.(p. 606)

 

신의 이중적 예정에 관한 논쟁

수도사 고트샬크 본 오르베는 신이 예정한 것은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는 이중적이라는, 즉 선한 자에게는 구원이 악한 자에게는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한 에리우게나의 의견: 예정론서문

전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찰을 토대로, 진정한 종교와 진정한 철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밝히면서 모든 진리의 기원이 하나뿐이라는 가정 하에, 아울러 모든 학문과 해석의 정통한 규칙들을 준수한다는 조건하에, 인간이 탐구를 통해 발견하는 모든 진리는 신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관찰했다.

반론1: 이중적 예정론이 비모순율에 위배되기 때문에, 즉 신이 하나이면서 순수하다면 사실상 스스로의 실체 안에 고트샬크가 말하는 예정론의 이중성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이러한 모순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반론2: 신이 인간에게 신학적 주제를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했다는 것 자체가 이 학문의 권위와 존엄성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만약 신이 이미 모든 것을 예정해 놓았고 모든 인간을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으로 분류해 놓았다면 인간은 사실상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을뿐더러 이성의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선택없이 학문을 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p. 607)

 

서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2세가 에리우게나에게 디오니시우스 전집의 번역을 의뢰했다. 중세에 디오니시우스 전집은 그리스도교의 계시에 무릎을 꿇은 헬레니즘과 철학적 이성의 굴복을 상징하는 책이었다. 디오니시우스가 묘사하는 우주는 신이 부여한 질서와 함께, 이 신의 초월성에 도달한다는 것이 어떤 정의나 묘사로는 불가능하며 오로지 부정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디오니시우스 전집의 연구와 번역 작업은 어쨌든 에리우게나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 서양 세계에 창조주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엄격하고 구체적인 관점을 심어주었다. 에리우게나는 자연뿐만 아니라 말씀까지도 신이 세상에 현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인간은 신과의 결속을 이루기 위해, 즉 인식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구별이 더 이상 불가능한 최종적 신격화에 도달하기 위해, 신의 현현과 정반대 방향으로 이를 답습할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p. 607-608)

 

4.2 자연의 분류에 관하여

이 책은 인간이 두뇌활동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즉 피조물과 인간의 인식능력을 뛰어 넘는 것, 다시 말해 신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개념을 찾아내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은 신과 피조물을 동시에 가리킬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이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그것의 수많은 의미들을 하나의 거울에 비춰 보았을 때 오히려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을 토대로 하는 직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p. 608-609)

 

에리우게나는 신을 수식할 때 인간의 언어가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들이 무엇인지 증명해 보인다. 사실상 어떤 긍정적인 형태의 주장을 통해 신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도 사실은 부적절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신에게선 어떤 특성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마치 신에게 한계를 부여하려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긍정적이지도 않고 전적으로 부정적이지도 않은 초월적 신학이 필요하며, 신은 사실상 인간이 부여하는 모든 수식어가 의미하는 것보다 우월한 존재로서 언어의 표현 가능성 자체를 초월한다고 보았다.(p. 609)

 

에리우게나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긍정이나 부정에 의한 정의를 초월하는 신학을 추구하거나 신이 세상에 남겨 둔 기호를 추적할 수 있다. 성서와 자연은 사실상 모두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첫 번째 경우는 영감을 통해, 두 번째 경우는 현현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p. 610)

 

4.3 해석학 저서들

에리우게나가 관찰한 내용은 라틴 교부철학의 전통과 그리스 신학과 성서학이라는 세 분야를 모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듯이 보인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이 강하게 표명하는 신의 무한성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에리우게나는 어떤 식으로든 신을 부적절한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하나의 신학적 언어를 도출해 냈다. 모든 긍정적인 주장은 사실상 정반대되는 내용의 부정이다. 신에게 부여 가능한 모든 수식어는 가장 긍정적인 것 역시 그것의 정반대를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즉 신이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일은 곧 신이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어떻게 보면 그의 무한함에 일종의 한계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p. 610-611)

 

요한복음 주석에서 에리우게나의 사상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사도 요한의 사유를 추적하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아는 것과 알려진 것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지식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창조된 모든 하늘과 모든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일어서는 존재다. 에리우게나는 사도 요한에게서 발견되는 신격화 과정이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정반대되는 의미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답습하며 그것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앎의 단계로 끌어올린다고 보았다.(p. 611-612)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