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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ous Badiou’s Ethics

인간 동물

생물학적 동료들

불사적 존재

시간의 주인

죽음에 저항하는 기능들의 합체

시간의 피해자

인간성의 한계를 뛰어 넘음

생존과 만족의 이해 관심 추구

동물적 이해 관심

단순한 본능에 준거함

원칙들의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가치

주관적인 체념, 주어진 것에 대한 동의

진리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

차이에 무관심한 모든 이에게 동일한 진리

지배적 의견: 특정인들만을 위한 봉사

선을 설정하고 자신의 집합적 능력들을 그 선에 부합시키는 것

선험적 악에 대한 정의, 선이란 악의 부재

의심될 수 없는 가능성들의 도래를 위해 노동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는 법

주체(구성)는 이미 주어진 것 속의 일상적 기입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요구하는 것

지금 주어진 것(다양성들, 무한한 차이들, 객관적 상황들: 사랑의 만남 이전의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평범한 상태

직접적인 포획, 만남

의견, 의사소통

충실성

끈질김

선과 악의 구분 가능

선과 악의 구분 불가

 

바디우_윤리학_20030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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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의 문제

 

 

윤리적 이데올로기 악의 합의된 자명성

But 진리들의 긍정적 (구성)과정이 윤리의 개별적 도래의 주된 핵심

그렇다면 악이 갖는 타당성은 부정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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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진리들,

 

인간 삶을 포함한 모든 삶은 선과 악에 미치지 못함.

생존의 일상사, 이해 관심에 대한 모든 추구는 선과 무관.

 

을 생기게 하는 것은 진리 과정들의 희소한 존재들에만 배타적으로 관계함.

 

선은 삶의 계속되는 교란의 내적 규범.

 

악은 선으로부터 사고되어야 함. (진리)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삶의 잔혹한 결백성만이 존재.

 

악은 다양태적 존재의 한 형태로 식별되더라도 선 그 자체의 효과로서 출현해야 한다.

 

 

 

B. 악의 존재에 대하여

 

악에 대한 합의된, 선험적 식별 인정(X) But 진리의 과정()의 가능한 차원으로 정의

윤리적 이데올로기 지지자들’ - 악에 대한 합의된 식별은 근본적 악이라는 전제에 준거

 

* 나치의 유럽 유대인 인종 말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모방과 반복을 막아야 하는 사례 그것의 비반복이 상황에 대한 모든 판단의 규범을 이룸 악 그 자체, 유일한, 비교될 수 없는, 초월적인 척도

 

인종 말살과 나치는 악의 절대적 형태.

 

사담 후세인(이라크),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세르비아) 등과 부단히 비교. 동시에 인종 말살과 나치는 유일한 것이며 그것과 비교하는 것 모독이라는 역설.

-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사례로서의 그 범죄는 모방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범죄가 그에 대한 모방

 

개별성을 사고해야 함

핵심은 개별성의 장소를 포착하는 일(인종 말살의 환원 불가능한 개별성)

인종 말살의 개별성은 정치로서의 나치즘의 개별성을 사고해야함.

*유대인을 하나의 범주로 구성(정치로서의 나치즘) -> 스스로를 대중적 주체성으로 형성-> 히틀러의 권력 -> 인종말살을 지휘할 수 있었음

유대인이라는 나치의 범주는 안에서부터 몰아내야 하는 외부의 구성을 통해 독일적 내부, ‘함께 모여 있음을 명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나치적 정치의 개별성 - 정복적 주체성을 부여하여야 할 역사적 공동체를 선언

 

나치적 정치는 진리의 과정이 아니었을 것. 그러나 나치적 정치는 오직 진리의 과정으로 표상됨으로써만 독일적 상황을 사로잡을수 있었다. 주체적 존재의 파악은, 잔혹한 집행에 의무를 행하듯 참여하는 어떤 자들의 문제는 정치적 진리의 과정의 내재적 차원에 준거되어야 한다.

 

진리들의 윤리학은 모든 개별적 진리로부터 가능해지는 악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C. 사건, 충실성, 진리로의 회귀

 

1) 사건은 위치해 있으면서(특정한 상황의 사건) 동시에 잉여 부가적이다.

사건을 사건이게 하는 것은 선행했던 상황에서의 공백(바로크적 양식에서 존재한 음악적 건축술에 대한 진정한 사고)

하나의 상황은 거기서 순환하고 있는 지식들로 구성되는 것이므로, 사건은 상황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명하면서 공백을 명명.

 

2) 어떤 자가 충실성 속에서 끈질기게 밀고 나간다는 것은 우발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이러한 우발성으로 인해 진리들의 윤리학이 요구되는 것이다. (충실성 <-> 끈질김)

충실성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님.

끈질김의 유일한 원리는 관심의 원리

 

3) 결과로서의 진리에 대해서는 특히 그 힘을 강조해야 한다.

진리가 지식을 촉성(force). (과학자들의 이론이나 법칙 발견 및 발전 -> 산업이나 공학에 많은 도움)

수학적 진리들은 사회성의 정비를 위해 요구되는 지식들을 촉성하는데, 이것은 수학적 진리들이 인간 동물의 이해 관심으로 회귀하는 형식

 

악에 대한 사고는 진리의 과정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 의존한다. 첫째, 상황의 공백이 사건에 의해 호출되는 것. 둘째, 충실성의 불확실성, 셋째, 진리에 의한 지식들의 촉성의 힘.

 

사건이 공백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 상황의 충만성을 호출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시뮐라르크 또는 테러로서의 악

 

충실성이 쇠퇴하는 것은 우리의 불사적 존재에 대한 배반

 

하나의 진리를 전능한 힘으로 간주하는 것은 파국

 

 

 

D. 악의 이론과 윤곽

 

 

 

시뮐라르크와 테러

 

모든 새로움이 사건인 것은 아님 사건에 의해 소환되고 명명되는 것은 사건을 이루고 있는 그 상황의 중심적 공백이어야 함.

나치 민족사회주의 혁명: 형식적으로 유사하지만 충만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

 

나치의 사건이 존재에게 도래시키고 명명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선행적 상황의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 그 충만성인 것 - , , 종족의 특질들에 뿌리내린 공동체의 절대적 특수성

 

하나의 진정한 사건이 유일하게 모두를 위한 것이자 진리의 기원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사건이 바로 상황의 공백을 통해서만 상황의 특수성에 연결되다는 사실. 공백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구속하지 않는다.

 

나치는 형식적으로 구분되지 않지만 오로지 민족적인 실체와 독일인으로 규정된 자들에게만 호소하는 것. <-> 1792년 혁명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보편적 사건들에서 기능

 

시뮐라크르의 충실성은 사건의 충실성과 달리 자신의 단절성을 공백의 보편성에 의해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집합(독일인, 아리안족)의 닫혀진 특수성들에 규제한다. (독일의 공동체적 실체는 모두가 아니고 모두에 대해 지배를 하려는 어떤 자에 불과하다)

 

전쟁과 학살은 그러한 충실성의 실상. , , 인종, 관습, 공동체에 대한 모든 언급은 직접적으로 진리에 반대하여 작동한다.

 

악이란 진리에 대한 시뮐라크르의 과정이다. 악은 그 본질에 있어서 그가 발명한 이름 하에서 모든 자에게 행해지는 테러이다.

 

 

 

2. 배반

 

인간 동물을 주체로 생성시켜주는 무관심한 관심이 이해 관심 자체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는지는 이미 말했듯이 고유하게 결정불가능한 문제이다.

 

: 연인이 겪는 위기의 시점, 학자가 겪는 절망의 시점, 투사의 비겁함의 시점, 예술가의 불모성의 시점, 수학적 논증을 읽는 자의 지속되는 몰이해, 시의 불투명성.

 

진리의 윤리학의 계속하시오!’와 사멸적 존재로서 나의 존재 속의 끈질김의 논리 사이에서 순수한 선택이 펼쳐진다.

 

나의 내부의 불사적 존재에 대한 부인은 어떠한 방기나 중단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나는 내 속에서 주체의 생성을 배반해야 하고, 어떤 자로서 내가 종종 타자들과 더불어 그 주체를 구성했던 진리의 적이 되어야만 한다.

과거의 혁명가가 자신의 오류와 광기에 빠졌었다고 선언하게 되는 것.

 

* 단절을 다시 단절하려는 것은 연속성을 위한 것이다.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이 그것이다.

 

 

 

3. 명명될 수 없는 것

 

의견들은 참된 것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단지 의견은 다른 것이 될 뿐이다.

우리는 의견들을 이처럼 재조직화하는 효과를 진리의 힘이라고 불렀다.

 

Q. 진리의 힘은 잠재적으로 전능한 힘일 수 있는가?

 

의견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해주는 상황의 언어 <-> 진리의 기입을 허용해 주는 주체적 언어

 

의견들을 향한 진리의 힘이 실용적 명명들(객관적 상황의 언어)로 하여금 주체적 언어와의 접촉을 통해 굴절되고 변형되도록 촉성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이 기존의 의사소통 코드들을 진리의 효과 아래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진리의 힘 = 주체적 언어의 힘

 

진리들의 전능한 힘을 설정하는 것은 그 진리들을 담지하는 것을 황폐화시키게 된다.

진리들은 오로지 의견들의 피륙 속에서만 자신들의 개별적 창구를 열 수 있을 뿐이다.

 

선의 힘에 대한 모든 절대화는 악을 조직한다. 그러한 악은 상황 속의 파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실행되는 진리의 과정의 중단이기도 하다. 주체로의 자신의 구성에 있어서 이해 관심의 이중성(무관심한 관심과 이해 관심 그 자체)을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가 전능한 힘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종국적으로 뜻하는 바는, 진리 과정의 생산물인 주체적 언어가 상황의 모든 요소들을 명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적 명명이 행해질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실제적 요소가, 상황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다양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요소는 오직 의견에만, 상황의 언어에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진리가 촉성할 수 없는 지점이 그곳이다. 그러한 요소가 하나의 진리에 있어서 명명될 수 없는 것이다.

 

: 비모순적 사고를 전형적으로 표상하는 수학의 비모순, 정치 속 공동체와 집합성

 

모든 진리는 또한 상황의 요소들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진리의 과정은 상황의 요소들을 사건의 지점으로부터 검토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CONCLUSION

 

윤리의 이데올로기 인권의 교리, 인도주의적 개입, 생명 윤리, 민주주의주의, 차이의 윤리, 문화적 상대주의 등 보수주의와 죽음의 충동의 혼합

 

윤리 준칙 진리의 생성에 종속

똑같은 인간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진리의 사건적 과정에 의해 포착되고 전위된 어떤 자이기를 계속하라는 것

 

악의 진정한 형상 세 가지 시뮐라크르, 배반, 파국

윤리학은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하에서 식별의 자원과 용기, 유보를 결합시킨다.

 

 

진리들의 윤리학은 세계를 권리의 추상적 지배하에 예속시키려고 하지도 않으며, 외적이고 근본적인 악에 대해 투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진리들의 윤리학은 진리들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충실성을 통해 악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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