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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 수도권과 스승
이전 시대의 지식세계가 주로 전통적 지혜에 대한 해설의 형태를 띠었던 반면 이 시기에는 혁신 자체를 문화로 간주하는 관점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혁신의 숨은 공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도시였다. 산과 숲의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중세 초기의 수도원 학교에서 도시에 세워진 학교로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도시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은 상인이나 장인 같은 직업과 다름없는 전문직으로 받아들여졌다.(p. 617)
철학과 수도 생활
1.1 기원
“숨어서 살아라” 에피쿠로스의 말이다. 그는 정통하고 깊이 있는 자아와의 결속을 도모하고 그 안에서 앎을 얻기 위해 욕망을 억제하고 극복하라고 가르쳤다.
앎에 대한 사랑, 탐구의 욕망, 앎의 절대적인 필요성(‘진정한’ 의미에서의 앎, 즉 신에 대한 앎)이 바로 인간에게 고독과 고립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최상의 고립이 가능한 곳은 당연히 사막이었다. 고독의 경험과 명상으로 이루어진 은둔 생활이 처음으로 실험된 곳도 바로 이집트 테베 사막이었다.(p. 620-621)
1.2 은둔 생활과 수도 생활
고립된 생활과 완성의 추구가 어떤 결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고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극단적인 경험이었고 삶의 열악한 조건으로 인해 더욱 두려운 경험으로 변하면서 악마가 유혹을 위해 개입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은둔주의가 수도원주의로 대체되게 만들었던 질문들(p. 621-622)
사막에서 과연 원하던 것을 찾아 돌아올 수 있는가?
사막에서 돌아온 이들이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인가?
사막에서 그들이 만난 신은 환영이 아닌가?
수도사는 일종의 살아있는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만의 영적 수양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그가 수양의 효율을 보장받기 위해 공동체에 가입해, 서로를 감시하며 서로에게 증인이 되어 주는 그와 비숫한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지시와 지속적인 영적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p. 62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제로 임명된 카시아누스에 따르면, 고행은 수도원장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했고 반면에 그의 권위는 모든 수도사들의 자율성과 본질적인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했다. (p. 623)
1.3 『규칙』: ‘새로운’ 성경
성 베네딕투스의 『규칙』으로 인해 수도 생활의 기초가 수도원장에서 규율서로 바뀌었다. 『규칙』이 수도사에게 설명하던 것은 경험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법과 그가 따라야 하는 삶의 모형들, 이루어야 할 목표 등이었다.(p. 623)
1.4 겸양의 12단계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식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것은 겸양의 실천을 바탕으로 하는 연구, 명상, 금욕 등이다. 이것이 바로 베네딕투스의 『규칙』이 말하는 ‘겸양의 12단계’다.
사리를 분별하고 절제(고대의 ‘선한 사람’이 갖추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 할 수 있는 힘을 겸비해야 하며 아울러 항상 자기를 버리고 스스로의 의지를 아버지(아바스), 즉 수도원장의 손에 맡길 줄 알아야 했다. “영적 아버지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은 공로로 인정될 수 없고 단지 허영과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수도사는 아버지 수도원장에게 스스로의 구원을 전적으로 맡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양보해야 했다.(p. 625)
한편 변증론을 옹호하던 의전사제들은 학생들을 모으고 학문을 장려하며, 전통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개성의 말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자신들이 ‘거인 앞에 선 난쟁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그들만의 힘으로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았다.(p. 626)
1.5 베네딕투스 수도사들과 의전사제들
신성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베네딕투스회의 수도생활이 유일한 수도사 생활양식으로 정착(p. 627)
클뤼니 수도원 |
시토회 수도사 |
- 고위층 귀족 가문들의 후손들을 받아들임. - 수도원은 고급 양피지와 바실리카 성당의 위용과 경건한 미사와 아름다운 성가로 가득한 성스러운 공간을 선사. - 성스러움을 고귀하고 엄숙하게 표현했던 전례의 미사 실시. - 황홀경과 환희를 표현하는 성가. - 신에 대한 앎보다는 신에 대한 경험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임. |
- 베네딕투스회의 수도 생활과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원천적인 순수함 추구. - 그들의 순수함은 정결과 순결의 논리적 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삶의 일관성에서 근거. - 환희에 찬 표현을 세상이 나약하기 때문에 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의 진지하고 엄격한 증언으로 변형. - 지혜란 개인적인 노력을 통한 섭리의 깊은 이해를 의미했지만 한 개인의 여정을 보장하는 것은 엄격한 규율에 의해 통제되는 공동체의 삶. |
로마에서는 모든 베네딕투스회 수도사들이 시토회의 제도를 모형으로 받아들였지만 미래의 주인공은 인들이 아닌 논리학자, 즉 논리학자와 다름없는 신학자와 법률학자였다.(p. 632)
※ 자유학예
로마의 행정제도가 실질적인 기능을 서서히 상실해 가던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성서와 교부 철학 저서들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세속 철학이 제공하는 경쟁력까지 갖춘 상태에서 전 유럽에 확산되고 있었다.
교회의 교육기관을 이끌던 지식인들은 고대 문화와 교부 철학의 명맥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전통에서 유래하는 다양한 문헌들을 최대한 수집할 필요성을 느꼈다.
고전 문화의 정체성과 지식세계를 당시의 세기말적인 상황으로부터 지켜내야겠다는 것이 바로 카시오도루스의 생각이었다. 그가 집필한 『성서와 세속 문학의 기초』는 지식과 지혜의 조화라는 이념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정보들을 수록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먼저 성서의 이해를 통해, 이어서 세속 학문을 통해 독자들을 통일된 지식세계로 인도하는 이중구도를 가지고 있다.(p. 633)
카시오도루스는 성서에 대한 앎이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위 책의 2부는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자유학예의 일곱 개 학과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있다. 문법, 수사학, 변증법, 수학, 음악, 기하학, 천문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틀림없이 필요한 지식의 일부라는 것이 카시오도루스의 의견이었다.(p. 634)
2. 믿음의 지성: 베랑제와 란프랑코
2.1 논리학과 신학
11세기에 베네딕투스의 수도원 개혁을 통해 드러난 종교적 혁신의 필요성은 신학적인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경향의 점차적인 강세 현상을 가져왔고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계시의 언어를 참과 거짓의 논리적 구분을 통해 해석하는 기술의 역할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p. 636)
논리학의 규칙을 과연 신학적 성찰에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투르의 베랑제를 중심으로 시작된 성찬 논쟁을 통해 정점에 이른다. 성찬 논쟁은 성체와 역사적 예수의 관계가 어떤 유형의 관계인지 규명할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p. 636-637)
2.2 투르의 베랑제
투르에서 자유학예를 가르치던 베랑제는 빵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성체의 완벽함과 불변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성찬의 신비를 상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빵과 포도주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과 속성 개념을 인용하며, 문법적인 차원의 논제를 제시하였다.(p. 637)
하지만 베랑제는 개혁파를 대표하는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1049년부터 1079년 사이에 개최된 수많은 공의회에서 지속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자신의 교리를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2.3 파비아의 란프랑코
베랑제의 교리에 반대했던 이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파비아의 란프랑코다. 란프랑코는 계시의 내용보다 성찬의 본질에 대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탐구를 중요시하는 베랑제를 비난하면서 성찬의 신비에 대한 믿음은 어떤 이성적 선입견에도 좌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p. 638)
믿음에서 유래하는 진실이 우선한다는 원칙을 토대로 란프랑코는 인간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으며 신의 전지전능함이라는 불가사의한 원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만큼 성찬의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 즉 속성은 불변하는 반면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변화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p. 639)
3. 아오스타의 안셀무스
3.1 삶과 이상적인 수도 생활
11세기에는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 쓰일 이성적 도구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깊어지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에 재개된 삼위일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루었던 비교의 차원에서 계속 멀어져, 동일한 실체의 통일성과 다양성 개념처럼 서로 모순되는 용어들을 인정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된다.
결과적으로 독립적인 실체 외에는 어떤 실재성도 인정하지 않았던 콩피에뉴의 로스켈리누스는 사실상 서로 다른 세 개의 이름에 세 개의 서로 다른 실체를 부여하는 셈이었고 결국 세 명의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로스켈리누스의 입장을 비판했던 인물이 바로 안셀무스이다.(p. 641)
3.2 신학, 논리학, 언어: 안셀무스의 저서들
안셀무스는 인간적인 경험을 토대로 신의 삼위일체적인 구도를 제안한다. 그렇다면 분명해지는 것은 『모놀로기온』이, 아직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 그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발견하는 사물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아울러 그가 이 모든 것을 알아 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이러한 사물들을 기초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명상이라는 사실이다.
『모놀로기온』에서는 창조된 세상을 기준으로 높은 곳을 향해 설정되어 있는 완전성의 단계에 대해 성찰하며 끝없는 퇴보를 막기 위해 신앙과는 별개의 분석에 기초하여 완전성의 특성들을 포착해 내고자 했다.
하지만 『프로슬로가온』에서는 다름 아닌 신앙이 그 지고의 한계에 대해 관심을 고정시키고 아래 단계에서는 단지 추측만이 가능했던 담론을 높은 단계에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p. 643)
안셀무스는 스스로의 영혼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네가 그걸 발견했다면, 왜 느끼지 못하지? 주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을 찾았다면 왜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안셀무스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로서의 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한다. 이제 신을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지는 듯이 보이는 가운데 부정신학의 길이, 즉 신에게는 인간의 정신으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논리가 펼쳐진다.(p. 644)
안셀무스는 『프로슬로기온』에서 신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존재로 정의한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는 사실상 신의 부재를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실제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만을 떠올릴 뿐이다.(p. 645)
안셀무스는 『문법학자에 관하여』를 통해 훨씬 더 기술적인 성격의 언어학적 문제들을 다룬다. 안셀무스는 일반적인 언어와 기술적인 언어, 말들의 일반적인 활용법과 말들의 독특한 특징 사이에 조재하는 차이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p. 646)
담론의 규칙과 용어들의 의미에 대한 안셀무스의 지대한 관심은, 비록 그의 이론적 성향이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맥락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당시에 철학과 신학과 논쟁에서 논리학이 얼마나 널리 활용되었고 또 일반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았는지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안셀무스가 스콜라주의적인 방법론의 구체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신은 사람이 되었는가?』에서 안셀무스는 어떤 이유에서 원죄의 대가를 신이면서 인간인 그리스도라는 존재 이외에는 치를 수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인간은 죄의 빚을 갚아야 하지만, 인간보다 열등한 어떤 피조물도 신에게 만족스러운 속죄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안셀무스가 다루었던 또 하나의 문제는 ‘자유’와 ‘자유의지’다. 안셀무스는 죄의 가능성을 힘의 형태로 다루면서 결과적으로 죄를 짓거나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유의지로 간주하는 것은 언어의 부적절한 활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죄는 능력의 결핍이지 일종의 긍정적인 기회와는 거리가 멀다.(p. 648)
4. 피에르 아벨라르
4.1 도시의 철학자
당시에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서 경제적 성장을 이룬 몇몇 대도시들이 성당에서 운영하는 혁신적인 형태의 학교들을 수용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완전히 새로운 분석과 토론 방식이 가장 혁신적인 요소였고 학교가 도시 안에 있다는 것도 새로운 특징이었다. 수도사들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누구든 다닐 수 있는 학교였다는 점이 달랐고 산의 깊은 침묵 속에 잠긴 수도원에서와는 전적으로 다른 형태의 교육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파리를 바라보는 수도사들의 시각은 달랐다. 이들은 파리를 오히려 고대의 부패한 도시 바빌론에 비유했다.(p. 649-650)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아벨라르가 “도시의 광장을 지나는 행들을 붙들고 철학과 신학을 논한다”고 비난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벨라르의 의견이 학교의 문턱을 벗어나 훨씬 더 많은 수의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아벨라르는 자서전 『나의 불행한 이야기』를 집필했다. 아벨라르가 당시에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던 자서전 집필에 착수했다는 것은 스스로의 우월성과 그의 삶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 얼마나 또렷하게 의식하고 있었는가를 증명해 준다.(p. 650)
베르나르는 그의 신학 저서에서 논리학의 활용도가 지나치게 높다고 비난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세속적’이며 위험하다는 평을 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결국 1140년에 아벨라르의 사상을 검토하기 위해 상스에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그의 신학과 윤리학 저서들은 토론조차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단죄 판결을 받았다. 그에게는 머지않아 파면 명령이 내려졌다.(p. 651-652)
아벨라르는 지성인의 작업 역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농부나 수공업자들의 수작업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p. 652)
4.2 논리학, 신학, 윤리학
아벨라르에게 논리학은 ‘학문 중의 학문’이었고 철학의 ‘일부’이자 ‘도구’였다.(p. 652)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것은 오로지 여러 개체에 공통되는 일반적인 개념과 개체 들을 가리키는 이름들뿐이라고 보았다.
아벨라르에 따르면 논리학 또는 언어과학은 다름 아닌 진실을 탐색한다는 고유의 특성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리스도교 신앙에 해가 되거나 위험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p. 653-654)
아벨라르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감각적인 경험의 정보와 직결되어 있으며 초자연적인 현실을 수용하는 데 부적절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벨라르는 신학을 통해 ‘진실을 가르치기보다는 오로지 진실에 가깝고 성서에 위배되지 않는 것만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p. 654)
아벨라르는 그리스도교의 진실(예를 들어 신의 초자연성과 유일성, 창조론, 창조된 세상의 질서, 영혼의 불멸성 등)이 플라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이 ‘말과 행동을 통해’ 증명해 보인 이론에서 예시된 바 있는 자연의 이성의 진실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그리스도교적인 계시의 역사적인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벨라르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저서 『윤리학』에서 죄악의 의미를 논리적인 방식으로 분석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교적 윤리관과는 무관하게 도덕적 선의 기준을 철학적 차원에서 도출해 냈다.(p. 655)
‘의도’를 도덕적 기준으로 보는 관점에서 아벨라르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신학 논제를 제시했다. 아벨라르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죄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는 그들 입장에서 (아마도) 옳은 일이라고 믿고 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를 처벌해야겠다는 의도 자체가 그리스도를 모략가로 잘못 인식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
아벨라르는 일부가 소실된 상태로 전해는 『윤리학』 마지막 부분에서 부패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탐욕에 눈이 먼 주교들과 사제들은 금전을 취하기 위해 자비를 베풀며 면죄부를 발행한다. 이들은 베드로를 그가 이룬 업적의 존엄성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의 차원에서 모방할 뿐이다”(p. 656)
4.3 평화 기획: 종교들 간의 대화
『한 철학자와 한 유대인과 한 그리스도인의 대화』에서 아벨라르는 이성과 신앙의 화합이라는 첫 번째 목표에 이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두 번째 목표, 즉 서로 다른 양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관점을 탐구하고 비교하면서 굳건한 상호 관용의 관계를 구축할 필요성을 제안했다.
타 종교에 대한 불관용은 사실상, 아벨라르가 몇 번에 걸쳐 강조하듯이 스스로의 신앙을 문자라는 엄격한 틀 안에서 이해하기 위해 ‘문자를 넘어선’ 의미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종교적 믿음이 ‘철학적’이면 철학적일수록 다른 종교와의 화합에도 더욱 열린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아벨라르가 신학 저서들 속에서 빈번히 강조하는 기본적인 입장이다.(p. 657)
지적인 차원에서 열린 자세를 가진 신도는, 아벨라르가 씁쓸한 어조로 언급했던 것처럼, 사실상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벨라르의 비교 자체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모든 종류의 지적 비교를 거부하던 그리스도교들과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벨라르에게 그리스 철학자들의 로고스는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최초의 ‘자연적 계시’이자 역사 속에 등장한 종교적 계시들(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공통된 기원이었다.
12세기에 그리스도교의 내부 혹은 경계에 머물던 ‘타자들’의 존재는 수많은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에게 종교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아벨라르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두려움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이 두려움이 관용 대신 자기방어를 부추기고 철학적 탐구 자체를 메마르게 만든다고 주장했다.(p. 658)
※ 두 개의 검: 중세 초기의 정치철학
5. 엘로이즈와 중세의 윤리관
5.1 엘로이즈와 그의 스승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사랑과 철학의 편지들은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아벨라르의 윤리학이론에 대한 생생하고 비극적인 증언일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아주 독창적이고 때로는 아벨라르의 교리와 대조를 이루기도 하는 성찰의 흔적들을 보여 준다.(p. 663)
5.2 “매일같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시다”
엘로이즈는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피조물도 ‘진정한 사랑’을 절대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보았다. 진정한 사랑(아벨라르를 향한 사랑)은 인간이 신을 향해 간직해야 할 사랑과 마찬가지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엘로이즈의 시대를 지배하던 도덕적 관념의 실제적인 위상은 일반적으로 중세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종교적 윤리관, 즉 전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강압적인 규례에 의존하는 윤리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p. 664)
아벨라르의 학교뿐만 아니라 아서 왕 혹은 트리스탄의 사랑이야기 같은 궁정문학의 소설들, 심지어는 몇몇 수녀원들의 규율까지도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 즉 저자들이 인간의 내면을 도덕적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p. 665)
‘고귀한 사랑’의 이론가들과 엘로이즈에게 사랑은 신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자에게 힘과 간절함을 선사할 수 있는 ‘한계나 조건 없는’ 자연스러운 열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도덕적인 차원에서 ‘진실한’ 사랑이란 ‘순수한’ 사랑, 즉 사랑을 생생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의도의 힘으로 인해 순수해 질 수밖에 없는 사랑이었다.(p. 666)
사랑의 세속적인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의 관찰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중세의 윤리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주제와 사랑의 내면적인 차원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아벨라르가 『윤리학』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행동에서 영혼 혹은 의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p. 667)
※ 존 솔즈베리의 논리학 옹호론
존 솔즈베리가 『논리학 옹호론』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은 인간의 지식세계에 대한 한없는 믿음을 표명하면서 자신들의 관점을 절대적인 진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들의 태도였다.
솔즈베리의 존은 이러한 태도가 독단과 파멸을 낳을 뿐이며 무엇보다도 지나친 교만과 진실 자체를 경멸하는 태도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가 강조했던 것은 올바른 언어 사용에 대한 탐구 자체가 가지는 비평적 도구로서의 기능이었다. 개연성과 타당성의 한계 안에 머물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간의 성찰에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지혜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자세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인식론적인 측면, 바로 학문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 668)
6. 도시의 학교: 샤르트르와 생 빅토르
6.1 수도원에서 학교로
중세 초기에, 특히 7세기와 9세기 사이에 서방 세계가 문화적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공간은 수도원이다. 이 시기에 전 유렵에 걸쳐 건축된 수많은 수도원들의 복잡한 조직망이 구축되었고 훌륭한 도서관을 갖춘 수도원들은 숲의 침묵 속에 고립되어 전통 학문을 보전하고 고대 서적의 주해를 작성하는 공간으로 발전했다.
중세의 전형적인 수도원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요소들은 12세기부터 시작된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 및 도시의 확장이었다.(p. 670)
도시에 새워진 새로운 학교들은 교회의 직접적인 관리 하에 운영되었고 주교 혹은 수도원장이 임명하는 학장이 업무를 담당했다.
도시의 학교들은 입지를 마련하는 사이에 스승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도 새로운 특징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소도원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가르치고 배우는 입장을 떠나 서로 격려하며 함께 기도하는 관계였던 반면 도시의 학교에서 이들은 ‘스승’이라는 직업적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을 좀 더 강조하고 인정하는 차원의 관계로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로 교육과정 자체도 크게 달라졌다.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저서들은, 비록 오래전부터 알려진 책들이지만, 전적으로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했다.(p. 670)
‘자유학예’의 개념도 변화했고 ‘자유’라는 표현은 더 이상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학예 자체의 특성, 즉 인간을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지적인 목표를 향해 매진하도록 인도한다는 차원의 자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교수법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논제’란 원래 전통적인 원전의 인용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교리적인 차이점들을 극복하고 융화시키기 위해 기용되던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12세기가 흐르면서 선생은 더 이상 다른 저자의 책을 읽고 해석하는 해석자라는 제한된 역할에 머물지 않고, 변증법 분야의 전문가 및 경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리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규정’하고 이들을 해결하는 방법론까지도 제안하는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서 선생은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차원에서 직접 원전의 문제점들을 찾아 제시하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p. 671)
6.2 플라톤학파: 샤르트르의 선생들
샤르트르의 대성당 학교는 10세기에 주교 퓔베르의 열성적인 장려를 통해 성장했지만 사실상 샤르트르학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주론 성찰이 꽃을 피우는 것은 12세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샤르트르학파의 사상가들이 성찰을 위해 빼놓지 않고 주목했던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이들이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것은 12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그것도 미완역본으로만 읽을 수 있었던 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다.
샤르트르학파의 사상가들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과 성서의 창조론을 조화롭게 융합시킬 수 있는 자연철학을 연구했다. 이들은 저술 활동을 통해 자연을 그 자체로 충족적이고 결정적인 원인들의 체제로 보는 관점, 즉 자연을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방식에 따라 연구할 수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모형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중세 초기의 상징적인 우주관을 대체하며 등장했던 것은 자연세계가 감추어진 의미를 밝혀야 할 비유들의 베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법칙에 순종하며 구체적인 실체와 힘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명백한 현실이라는 생각이었다.(p. 673)
베르나르는 『티마이오스 주해』에서 칼키디우스의 해설에서 발견한 “선천적 형석”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형식은 신의 생각과 물질세계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원리인 동시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의 생각이 존재와 사물의 질서로 인도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테오도리쿠스는 인문학 강의를 위한 백과사전적인 저서 『칠종 학과』와 철학을 도구로 창세기의 문장들을 해설하는 『6일간의 창조에 관한 논고』를 집필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총제적 존재의 존재 방식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방식, ‘필연적으로 관계에 의존하는’ 방식, ‘절대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방식, ‘결정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방식.(p. 674) 『6일간의 창조에 관한 논고』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을 기준으로 창조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이 이야기의 과학적 근거를 증명해 보이는 데 주력한다.
기욤 드 콩슈는 아랍의 의학 서적에서 하나의 통일된 세계라는 개념을 도출해 냈다.(p. 675) 기욤은 플라톤의 ‘세상의 영혼’ 개념을 발전시켜 이를 피조물에 내재하는 일종의 자연적인 힘으로 간주하면서 이 힘이 우주라는 신의 구상을 완성 단계로 이끌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베르나르 실베스트르의 『우주구조론』은 헤르메스주의나 점성술, 플라톤주의, 자연주의 철학의 논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혼용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p. 676)
6.3 신비주의와 철학: 생 빅토르의 학교
생 빅토르학파의 스승들은 성서에 관한 지식을 이성적인 방법론 및 세속적인 지식과 융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위그는 『해설서』에서 철학은 현실세계와 신성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따라서 신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의 그릇 역할을 하는 학문으로 간주한다.
생 빅토르의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 학문의 가치가 세상의 초월적 원리를 탐구하는 데 잇다는 생각을 수용했다. 위그는 세상의 창조와 창조의 역사에 관한 탐구가 세속 학문의 몫이라고 보았다.
신은 성사sacramenta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성사란 인간이 지적인 노력을 기울여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형상들, 예를 들어 플라톤이 인간에 내재하는 신의 흔적으로 보았던 선험적인 진실의 원리와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세계가 상징 혹은 신의 현현으로 가득하다는 세계관이었다.(p. 678)
생 빅토르학파는 시대에 부응하며 중세 플라톤주의의 기본적인 가정들을 수용했다. 하지만 샤르트르학파의 기본적인 탐구 대상이 플라톤의 우주론이었던 반면 생 빅토르학파의 주된 관심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영향을 받은 영혼의 신플라톤주의 교리였다.
리샤르는 신비주의 사상의 핵심인 신에 대한 사랑이 성찰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의 사랑이라고 보았다. 성찰 자체가 신에 대한 일종의 ‘지적 사랑’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앎의 형태로 그를 이해하는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p. 678-679)
※ 신학, 신비주의, 종교적 논문
변증론자와 반변증론자
중세 초기의 사상가들에게 신학이라는 용어는 관조, 혹은 이론을 뜻하기도 하는 사색과 동의어였다. 11~12세기에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문법과 변증법이 적용되면서 신학의 개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1세기에는 학교에서 흔히 변증법이라는 과목으로 가르치던 논리학이 신앙과 관련된 논문에서 활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이 성직자들과 수도사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신학의 가장 열성적인 수호자였던 피에르 다미아니는 세속 문화와 철학을 세속적인 권력의 도구로 보고 그것의 유용성을 전적으로 거부했지만, 한편으로 자유학예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수사들의 무지를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도원의 도서관에 종교 서적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주제의 책들을 보급하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p. 680)
아오스타의 안셀무스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 대립이 성립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로지 이성’만을 토대로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믿음의 이치’에 관한 엄격한 교리를 구축해 냈다.
혁신과 신비주의 사이의 수도원 신학
11세기부터는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재임 기간에, 교회와 종교인들의 삶 전반에 걸쳐 혁신이 요구되었고 혁신의 요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복음서가 표명하는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로 복귀를 장려했던 수도원이었다.(p. 681)
당시에 이루어진 논의들 가운데 몇몇은 성직 매수 및 성직자 혼인 문제에 연루된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는 논쟁과 이들이 교회에서 맡은 직분의 부적절함에 대한 논쟁에 집중되었다.
수도 신학의 고행과 혁신이라는 이중의 임무를 수행하는 차원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인물은, 1140년 상스의 공의회에서 피에르 아벨라르를 단죄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다.
그는 인간이 겸손한 태도를 취할 때 자신이 죄를 짓기 쉬운 비천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신에 대한 사랑과 일치시키기 위해 모든 육체적 욕망을 벗어던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학적 성찰에 내재하는 신비주의적 이상을 심도 있게 연구한 인물로 고차원적인 논문 『신에 대한 고찰에 관하여』의 저자 생 티에리의 기욤 뿐만 아니라 생 빅토르 수도원을 중심으로 모인 아우구스티누스학파의 성직자들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아우구스티누스학파의 신학은 스콜라주의 신학의 이성적인 접근 방식과 수도 신학의 정서적인 접근 방식을 중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생 빅토르의 리샤르 역시 계시 내용을 이성적인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이성과 신앙의 관계가 아니라 ‘내면적 인간’을 향해 있었고 그의 『격정적인 사랑의 4단계에 관하여』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면서 서정적이고 황홀하며 감동적이고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는 신비주의적 성찰의 심리학을 추구했다.(p. 682-683)
예언문학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집필한 묵시록적인 성격의 『스키비아스』에서 신에게 직접 영감을 얻은 그녀의 예언들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다양한 측면과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세상의 종말을 앞둔 마지막 시대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듯이 보인다.
조아키노 다 피오레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성서 해석학 저서들을 통해 삼위일체의 세 인격체가 각각 상징하는 세 시대를 기준으로 결정되어 있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p. 683)
그리스도교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과의 영적 교감이 이루어질 미래의 삶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지상에서의 삶은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된 일시적인 경험에 불과했다. 바로 이러한 주제를 다룬 저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베르나르와 로타리오 추기경의 작품이다.(p. 684)
스콜라 신학과 조직해석학
12세기에 새로운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떠오른 도시를 기반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학교들은 이른바 신학의 이성화를 추진하는 동력의 기능을 수행했고 이러한 이성화 과정은 베랑제와 안셀무스가 마련했던 길을 토대로, 무엇보다도 변증법의 승리를 가져온 피에르 아벨라르의 공로에 힘입어, 신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신학은 12세기와 14세기에 이르러 완전한 학문세계를 구축하게 된다.(p.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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