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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아감벤 외(20.03.2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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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관한 권두노트 조르조 아감벤

때로는 정치로, 때로는 정부로 묘사되는 정치의 이 기본 개념이 지닌 중의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르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는(22) 구성권력(폴리테이아)과 구성된 권력(폴리테우마)은 주권권력(최고 권력)의 형태 속에서 서로 묶인다. 주권권력은 정치의 두 면을 함께 지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왜 둘로 나뉘며, 최고 권력은 무엇을 통해 이 분열을 봉합하면서도 절합하는가?

주권과 통치의 구분과 절합이 루소 정치사상의 토대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야말로 관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주권은 구별의 용어들 중 하나(, 정부/통치)인 동시에 정체/구성과 정부/통치를 풀 수 없는 매듭으로 묶인다.

 

p24 : 오늘날 인민주권은 모든 의미를 차츰 상실해버렸으며, 행정과 경제가 그것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통치를 단순한 행정()으로 파악하는 오해는 서구 정치사에 초래된 결론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오류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정치의 중심에 있는 신비는 주권, , 왕, 법 등이 아니라 통치, 천사, 장관, 경찰이라 생각한다. 주권자에게 그것들의 정당한 결합을 확보하고 보장하는 권력을 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기계의 중심은 텅 비어 있으며, 두 요소 그리고 두 합리성 사이에는 가능한 어떤 절합도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허구가 관건이 아닐까? 그 두 요소를 탈구시킴으로써 통치할 수 없는 것을 출현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사유가 이 매듭, 그리고 그것의 모호한 어법과 씨름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토론은 탁상공론이 될 위험이 있다.

 

2. 민주주의라는 상징 알랭 바디우

우리 사회의 실재를 건드리려면, 그저 우리 사회의 상징을 박탈하기만 하면 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제쳐두고 민주주의자가 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이에게 정말 나쁘게 보일 위험을 감수해야겠지만, 그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관한 진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9)

요컨대 민주주의자들의 세계모든 이의 세계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이미 민주주의는 보수적인 과두정을 집결시킨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며, 살고 있다고 믿는 성벽들의 성벽지기이자 상징이다.

한 영토가 자신은 민주주의라는 상징 아래에 있는 세계라고 기만적으로 내보일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을 따라야 하는가?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 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p33 : 우리는 이 상징이 위험할 만큼 빛이 바랬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플라톤과 그의 수호자-철학자들이 이미 좀먹은 귀족정의 깃발을 다시 드높여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말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향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향수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플라톤이 제출한 두 가지 테제는 아래와 같다.

1) 사실상 민주주의적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2) 민주주의적 주체는 자신이 누리는 향락의 견지에서만 구성된다.

우리가 젊을 때 맺게 되는 첫 번째 관계형태는 디오니소스적인 격정이다. 우리가 늙었을 때 맺게 되는 두 번째 관계형(34)태는 향락에 대한 비구분이다. 사실상 지배적인 사회생활이 민주주의적 주체에게 제공하는 교육은 모든 것이 이용가능하다는 환영으로 시작한다.

민주주의적 삶 자체는 모든 가치가 똑같다는 황혼녘의 의식으로 마무리된다. 그 의식에 따르면, 가능한 모든 가치의 표준인 돈, 그리고 돈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하는 기제인 경찰, 법원, 감옥이 아니면 아무것도 쓸모가 없다. 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에서 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바로 이것이 시간의 흐름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라톤에게든 나에게든, 모든 세계는 세계를 구축하는 차이들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요컨대 세계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첫째, 진리와 의견의 차이를 통해서. 둘째, 서로 유형이 다른 두 진리들(가령 사랑과 정치 또는 예술과 과학)의 차이를 통해서. 만물의 등가성을 공준으로 삼자 마자 우리는 무제한의 표면, 바탕, 이양을 갖게 되지만, 이로부터는 그 어떤 세계도 출현할 수 없다. 즐겁고 무정부 상태이고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평등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종의 평등을 배분해주는통치 형태가 민주주의라고 주장할 때,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젊은이는 민주주의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즐거움은 충족된 욕망 또는 권리상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의 민주주의이다. 불평등한 자와 평등한 자 사이에 세워진 평등은 우리 눈에는 화폐원리와 다를 바(35) 없다. 그것은 실제적 차이나 이질성 자체(그것의 본보기는 진리 절차와 의견의 자유 사이의 간극이다)에 대한 모든 접근을 차단하는 일반적인 등가성일 뿐이다. 수적인 양에 굴복한 이 추상적 평등은 세계의 정합성을 방해하며, 플라톤이 무정부 상태라고 부르는 것의 지배를 강제한다. 이 무정부 상태는 무가치한 것에 기계적으로 부여된 가치와 다름없다. 보편적 대체가능성의 세계는 고유한 논리를 갖지 않는 세계이며, 그래서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외양의 무정부 상태의 체제일 뿐이다.

이 무정부 상태에서 교육 받은 민주주의적 인간을 정의해주는 것은 바로 그 인간이 만물의 대체가능성이라는 원리를 주체화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욕망, 이 욕망이 매달리는 대상, 이 대상으로부터 끌어내는 찰나의 향락이 공개적으로 순환하고 있는 셈이다. 이 순환 속에서 주체가 구성된다. 앞서 봤듯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민주주의적 인간은 (근대화의) 순환의 우위라는 이름으로 대상들에 대한 어떤 비결정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인간의 눈엔 순환의 상징인 돈밖에 안 보인다. 그러나 향락의 무한한 잠재력에 매달리는 타고난 정념만이 그 순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p36 : 플라톤은 결국 민주주의라는 가짜 세계가 청춘의 폭주를 경계하면서도 청춘을 숭배할 수 밖에 없음을 꿰뚫어본다.

영원한 청춘을 상징으로 삼는 집단적 삶은 무엇이 될까? 첫째 이 형상은 테러리스트가 된다. 왜냐하면 그 형상은 젊은이들의 거침없음과 무의식을 별 제한 없이 높게 사기 때문이다. (37) (둘째) “즐겨라는 모두를 위한 격언이다. 그다지 즐길 수 없는 사람들도 거기에 붙들린다. 거기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머저리 짓이 생겨난다.

어쨌든 플라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사회를 세 가지 동기의 뒤얽힘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세계의 부재, 순환에 굴복한 주체성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상징, 그리고 모두가 젊은이처럼 즐기라는 정언명령. 플라톤의 태제는 이 조합을 펼치는 사회가 반드시 총체적인 파탄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는 시간의 규율을 조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인간은 순수한 현재만을 산다. 스쳐가는 욕망은 법이 된다. 오늘은 기름진 진미를 술에 곁들여 먹고, 내일은 부처를 위해 금식하고 청정수를 마시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수요일엔 철학책을 읽겠다고 선언하고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며 책장을 덮는다..(38)주말엔 또 위기이다. 다음 주가 되면 이 모든 것을 보게 되리라. 어쨌든 이런게 삶이다! 질서도 없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즐겁고, 행복하며, 무엇보다 의미 없지만 그만큼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미에 대한 대가로 자유를 지불하라.”

 

p39 : 플라톤의 테제는 이날 저날 뒤집히는 실존방식(그 본질은 시간의 무규율성이다)과 그에 적합한 국가형태(대의민주주의)가 가시적인 방식으로 그 전제주의적 본질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리도 잘나고 활기차다고 제시된 것의 실체가 죽음충동을 조직하는 전제주의의 군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보기에 민주주의적 즐거움은 참주의 악몽으로 마무리된다. 플라톤은 우리의 세계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를 고찰하는 순간 민주주의/니힐리즘의 접속이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적인 비-세계는 시간이 새나가는 것이다. 소비로서의 시간은 탕진으로서의 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 세계의 상징은 민주주의이며, 청춘이 이 상징의 상징이다. 청춘은 잡아두지 못한 시간을 상징화하기 때문이다. 청춘에는 분명히 어떤 내실있는 실존이 없다. 그것은 도상적 구축물,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런 구축은 신체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 신체는 세 가지 특질을 둘러싸고 구축된다. (오락으로만 살아가는) 즉각성, 유행(대체 가능한 현재들의 계기적 연속), 제자리 운동(“우리는 움직인다.”)

만일 민주주의가 죽음충동을 조직하는 화폐의 추상이라면, 그것의 반대는 결코 전제주의나 전체주의일 수 없다. 그것의 반대는 집단적 실존을 이런 조직화의 지배에서 빼내는 것이다.

(40)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생성을 결단코 사적 소유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인민의 생성을 주체적으로 제어하고, 사유-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정치는 과학이나 예술처럼 그 자체의 것이 될 수 있는 비시간적 규범을 따라 그 자체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정치를 권력과 국가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정치란 결집된 능동적인 인민 속에서 국가와 법의 고사(枯死)를 조직하는 것이다.

수호자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것과 공유만이 지배한다. 그들의 권력은 이데아의 권력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라에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지식을 갖춘 귀족에게만 한정했던 이 격언들을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의 실존으로까지 일반화할 것이다.

우리는 괜찮다면 모두를 귀족이 되게 하기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의 귀족되기는 공산주의에 대한 최고의 정의이다. 알다시피 19세기는 노동자 혁명가들에게 플라톤은 공산주의의 제일가는 철학적 형상이었다.

 

p41 :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도 독재도 아니다. 그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는 헤겔식으로 말하면 제한된 민주주의의 형식주의를 흡수하고 지양한다.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남을 수 있는 기회, 인민의 역사적 삶과 동질적인 사람들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오늘 천천히 발명되고 있는 형태들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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