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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극

예나 지금이나 승리한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적 형식주의의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서 인민주권의 유령이 꿈틀댈까봐 내심 미심쩍어 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결국 상품 전제주의, 그리고 시장의 왜곡되지 않은 경쟁에 붙은 가짜 코[위장]에 불과하다.(p. 46)

 

관료적 전제주의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회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민주주의라는 부유하는 기표는 승리한 서구, 승리자 미국, 자유시장, 왜곡되지 않은 경쟁의 동의어가 됐다.(p. 47-48)

 

선한 목자들의 회귀

자유무역과 자본의 자유로운 유통만이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소란스러운 평등주의 원리의 표현이기도 했다.

 

같은 땅에서 났으면 기꺼이 받아야 하는 시민으로서의 평등에 맞서 신의 선택이라는 고귀함과 계보상의 위계를 선전하는 소리가 재차 들렸다.(p. 47)

 

사회의 유령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한 몸으로 뭉친 민주공화주의자들은 조상에 대한 존경을 호소한다. 그들은 조상, 능력, 명령의 권위를 불러들였다.(p. 48)

 

상품민주주의에 대한 불만

피에르 로장발롱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진단한다. 그 불만은 선거기능에 대한 탈신성화,’ ‘행정권력의 중심성 상실,’ 공무원 형상의 가치절하를 통해 드러난다. 민주주의의 승리는 결국 민주주의의 상실에 대한 서막일 뿐이었다는 것이다.(p. 48-49)

 

계급 없는 정치가 정치 없는 정치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향해 웅크린 현재의 기대 지평이 붕괴함에 따라 전략적 이성으로서의 정치 역시 무로 돌아가는 데, 이는 그저 도구적인 이성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로장발롱이 선출직을 줄이고, 임명직을 확대하고, ‘독립적인 권위를 늘려 정당성을 잃어가는 투표를 뒷받침할 버팀대를 찾고 있는 것도 놀랍지 않은일이다.(p. 49-50)

 

진정한 민주주의의 유령

클로드 르포르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연결된 동시에 그것과 구별된다는 것을누가 부정하겠냐고 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역사적으로 연결되며(영토에 바탕을 둔 시민권의 도래, 권력과 법의 세속화, 천부신권에서 인민주권으로의 이행, 신민에서 인민으로의 이행 등)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구별되어 그것을 비판하고 지양하는 가를 정하는 데 있다.(p. 50-51)

 

정치의 희박성, 민주주의의 간헐성?

민주주의의 요구가 지닌 모순과 양가성은 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험대에서 명약관화해졌다.

 

수의 독재와 다수결의 원리에 맞서는 플라톤의 비판을 통해 알랭 바디우는 정치를 복수의 의견들 간에 전개되는 진리 없는 대결에 맞세운다. 자크 랑시에르의 경우에는 영구하게 확장되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정치학에서 파악하는 제도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맞선다. 두 사람 모두 선거가 인민을 통계의 형태로 환원하는 것이라며 비판한다.(p. 52)

 

철인왕

당신들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나는 보통선거를 그 자체로는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존중 여부는 선거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보통선거는 그것이 산출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존중해야 할 유일한 것이라고들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수와 선거의 법칙에 맞서는 이 도전은 수적 다수가 꼭 진리나 정의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환기시켜준다.

 

민주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급진적 비판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및 상품등가성과 순전히 동일하다고 보는 데 기초한다. 상품등가성에 따르면 모든 것은 값어치가 같고 등가적이다.(p. 53)

 

선거민주주의는 그것이 먼저 자본주의, 오늘날 시장경제라고도 불리는 자본주의의 합의적 대의인 한에서 대의적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원리의 부패이다. 맑스가 그런 민주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이행기적 독재밖에 없다고 봤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맑스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렀다.(p. 53-54)

 

민주주의의 적은 일단 전제(전체주의라고 불리는 악)였다. 이 전제가 공산주의 이념의 첫 시퀀스를 끝장냈던 한에서 말이다. 유일한 진짜 물음은 공산주의 이념의 두 번째 시퀀스를 열어젖히는 것이다.”(p. 54)

 

바디우는 공산주의의 세 번째 단계를 끌어들인다. 그 단계는 사회주의적 분열의 종언, 제 주장만 하는 이기주의의 거부, 정체성을 옹호하는 모티브에 대한 비판, 군대 같지 않은 규율의 제안을 중심으로 한다.” 공통의 기획을 위한 민주적으로 합의된 동의가 없다면 그것은 종교적 신앙이나 철학적 지식, 그리고 그런 신앙과 지식이 내뱉는 진리의 말이 지닌 권위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처음부터 공산주의 가설은 현대 의회주의로 이르게 될 민주주의 가설과 전혀 다르다. 공산주의 가설은 다른 역사, 다른 사건을 포섭한다. 맑스는 아무리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이나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부르주아 국가는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 국가가 파괴된 이후에는? 텅빈 서판, 백지, 사건적 순수성 속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히기?(p. 55)

 

환원불가능한 민주주의적 과잉

완전히 틀릴 위험을 무릅쓰고, 무지하고/거나 게으른 저널리스트들은 세골렌 루아얄이라는 소스를 친 협소한 참여민주주의민주주의적 과잉에 대한 랑시에르의 애정과 혼동해버렸다.(p. 57)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과두적 통치로부터 공적 삶에 대한 독점을 끊임없이 뽑아내고, 부로부터 삶을 둘러싼 모든 역량을 빼앗는 행위이다.”(p. 58)

 

정치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나키적인 것입니다.”다시 말해서 최초의 토대 같은 것은 없다.(p. 59)

국가 그리고/또는 정치의 고사

1971년 봄, 6주간 지속된 파리코뮌의 자유를 두고 맑스는 국가권력이 이제 폐지됐다고 적었다.

 

모든 기능이 사회적 자주관리나 단순한 사물의 관리에 흡수되는 것으로 국가의 고사를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몇몇 주요 기능은 계속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

 

국가의 법령을 통해 국가가 폐지됐음을 추상적으로 공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료적 폐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조건들을 결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p. 60-61)

 

루소의 잘못?

민주주의의 실질적 모순은 사회계약의 아포리아에 기입되어 있다. -자크 루소의 말처럼 힘이 법[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 인간은 오직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되자마자 정당성의 토대 문제, 그리고 적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긴장의 문제가 제기된다.

 

만일 자유가 스스로 만든 법을 좇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의 부정을 내포한다.(p. 61)

 

연합행위는 공적인 것과 개별자들의 상호약속이다. 이것은 모든 계약자가 국가의 일원이자 주권적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신과 계약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속한 전체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의 본성이 함축하는 바에 따르면, 주권자는 자신이 어길 수 있는 법을 스스로에게 부과할 수 없다.

 

이 사실로부터 대의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뒤따라 나온다.(p. 62)

 

권력은 스스로에게 위임할 수 있으나 의지는 그럴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직접민주주의의 토대이며, 루소에 따르면 주권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대의 [대표]될 수 있다.” 로장발롱은 오늘날 이것을 거부한다.(p. 63)

 

일어날 법 하지 않은 기적

확실히 일반의지는 언제나 공명정대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민의 의결이 언제나 한결같이 올바르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 인민은 결코 타락하지는 않지만 기만당하는 일은 종종 있다.”(p. 63)

 

일반의지는 민주주의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사회생활을 규제하는 더 나은 규칙들을 제정하려면 인간의 모든 정념을 다 알고 있으되 자신은 그 어느 것도 느끼지 못하는 …… 우월한 지성이 필요한 법인데, 이것은 수학자 피에르 플라스가 말한 악마의 법-도덕적 쌍둥이나 마찬가지 이다.

 

이 입법자는 폭력을 쓰지 않고도 다스릴 수 있으며, 논리를 동원하지 않고도 납득시킬 수 있는다른 질서의 권위에 기대야 할 것이다. 아렌트가 헌법의 악순환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루소는 꼼짝 없이 규약의 초월성, 시민 종교 등을 원용하기에 이른다.(p. 64)

 

제도를 사유하기

테르미도르의 반동 직전에, -쥐스트는 루소의 사유가 멈춘 곳에서 공화주의 제도의 필요성에 관한 질문을 뒤이어 던졌다. “제도는 공화적 자유의 보증이다. 제도는 정부와 시민의 상태를 교화하며, “정의의 군림을 확고히 한다.” 실제로 제도가 없다면 공화국의 힘은 취약한 인간들의 공로나 불안정한 수단 위에 세워지게 된다.”

 

-쥐스트(그리고 훗날의 체 게바라)에게 영웅주의의 힘과 모범이 되는 미덕은 제헌권력과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비극적 간극을 메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p. 65)

 

불확실성을 견디며

르포르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부른다.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가기로 동의한 사회형태.” “거기서 정치활동은 하나의 한계에 부딪힌다.” 민주주의는 정의상 상대주의적인 회의주아자의 역설에 노출되어 있다.

 

민주주의를 속화해야 한다. 신학적 문제를 세속적 문제로 계속 변형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이나, 잃어버린 신화적 단일성에 대한 탐구로 환원하기를 멈춰야 한다.(p. 67)

 

민주주의를 속화하라?

존 듀이처럼 리프먼에게도 민주주의를 속화하기란 세계 너머의 모든 것, 모든 초월성, 세계 배후의 모든 것, 모든 궁극적 토대를 거부한다는 뜻이었고, 정치적 판단의 넘을 수 없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p. 68)

 

리프먼은 사회를 신비스럽게 개념화하는 데 항의했다.

리프먼이 올바른 인민의 의지가 투표를 통해 표현되리라는 환상을 품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들은 시간이 없어서 문제를 다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하나의 직업이 아니며,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의 무능이 합쳐져 집단적인 유능이 될 수도 있다는 무모한 가설에 리프먼은 회의적인 통찰력을 맞세운다.(p. 69)

 

시간과 공간의 엇갈림

대의민주주의는 대표들이 자신을 지명해준 시민들 대신 정치권력에 참여해서는, 흔히 심각한 왜곡을 대가로 치르며 사회에 상대적인 가시성을 부여해주는 체계인 것만이 아니다. 대의민주주의는 조합적이지 않은 공통의 이해관계가 출현할 수 있게 해주는 논란의 공간을 정해주기도 한다. 대의민주주의의 역동적인 원리는 사회의 갈등을 온전히 인정하고, 정치적경제적법적미학적 영역의 차이를 인정하고, 습속과 태도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다.(p. 70)

 

대의제는 축소할 수 없는 사회의 이질성이 낳은 결과이자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사회운동이 유지해야 하는 자율성과 다원성을 정초하는 사회적 시공간의 엇갈린 다원성이 낳은 결과이다. 엇갈린 시간성의 변속기, 탈구된 공간의 미터기처럼 작동하는 정치투쟁이 총체성의 관점에서 늘 일시적인 단일성을 결정한다.(p. 70-71)

 

직접민주주의냐 조합적 민주주의냐?

인민을 영구하게 집결시킬 수 있는, 엄밀한 의미에서 매개 없는 직접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시공간적 여건을 상상하지 않는 한, 또는 선출된 자가 위임장도 안 받고 누구도 대표하지 않은 채 추첨 절차에 따라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상황을 상상하지 않는 한, 위임과 대의는 피할 수 없다. 그 문제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꼭 껴안고서, 위임자가 수임자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권력의 전문화를 제한하는 대의방식을 찾는 것이 낫다.(p. 71)

 

영토에 기초한 대의제(소비에트는 원래 영토에 근거한 기관이었다)를 제거하고 싶다면 노동조합을 행정기관 또는 국가기관으로 변형시키는 한편, 조합들의 파편화를 유지함으로써 일반의지의 출현을 막아야 한다.(p. 72)

 

지방분권화된 권력과 지역경제 민주주의의 네트워크는 사회 전체의 헤게모니를 쥐는 기획을 제안할 수 없기에 관료주의적 보나파르티즘의 통솔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p. 73)

 

수의 상대성에 관하여

수는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수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

 

다수결의 원리(그것은 부득이할 뿐이다)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은 추첨이다.(p. 73)

 

대의제를 단순히 추첨으로 대체하는 것은 국가, 그리고 완수해야 할 제안이나 기획을 만들어내는 심의로서의 정치 자체를 페지하는 것이나 같다.(p. 74)

 

당파의 매개

모든 대의제를 거부하는 것은 당 개념을 단호히 거부함을 함축한다. 당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표명인 셈이다.(p. 74-75)

 

피에르 부르디외는 말년에 개인적 의견들의 수학적 총합이 옳다고 보는 민주주의의 믿음을 거부했다. 이는 논리적으로 집단행위의 중요성을 복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집단에 어떤 이름을 부여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정당은 계급이 아니다. 게급은 계급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정당을 언제나 초과한다. 그러므로 정치에 내재해 있는 이율배반이 있을지도 모른다.(p. 75-76)

 

정당들의 신학적 무화에 관하여

오늘날 -형태에 대한 거부는 보통 [당들의] 일시적 연합, 유동적이고 그물처럼 유연한 간헐적 당-형태에 대한 변론을 동반한다.

 

베이유는 정당을 폐지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정당은 집단의 정념을 제조해야 하고, 각자의 생각에 집단적 압력을 행사해야 하는 기계이다.” 모든 정당은 맹아와 열망에 있어서 전체주의적이다.”(p. 77)

 

그렇다면 정당 폐지야말로 거의 순수한 선이 될 것인가하지만 무엇으로 정당을 대신할 것인가베이유는 어떤 선출체계를 상상한다. 거기서 후보자들은 하나의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대신 순전히 주관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데 만족하게 된다.

 

세속적인 정치, 그 비순수성비확실성허술한 규약을 거부하면 불가피하게 신학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적인 영구혁명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맑스는 자신이 형식적이라고 규정한 민주주의적 자유를 전혀 무시하지 않았다.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 해방과 종교의 관게 문제정치적 해방과 인간해방의 관계문제로, 또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관계 문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혁명화하는 이 과제는 1848년 혁명을 현실이 됐으나, 실제로 현존하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권위주의적 해결책과 신화적 공동체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려면 마저 할 일이 남아 있다.(p. 80-81)

 

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p.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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