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20.0329.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11장 철학자와 신학자 발제. 풍경

2020.3029. 11장 철학자와 신학자.hwp
0.09MB

 

 

철학자와 신학자

 

13세기는 과학과 철학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12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번역과 주해 집필의 열기를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경험했던 세기다.

13세기가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스콜라 철학의 등극을 알린 시대였고 이 철학이 이전 시대의 신학적인 문제들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에서 연구했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과 무엇보다도 그의 분석론 후서에서 드러나는 논리적 증명 방식의 원칙들은 중세 철학자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탐구의 모형을 제시했다. 이러한 지적 도전을 깊이 있게 받아들였던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인정하는 문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과연 그리스도교 사상과 조합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상이한 입장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

비잔티움의 철학

1.1 중기 비잔틴 시대의 철학적 성찰

비잔틴 형성기(4~6세기)에 플라톤의 사상을 재조명하려는 운동의 기반이 마련되면서 신플라톤주의가 탄생했다면, 중기 비잔틴 시대(7~13세기)에는 철학과 신학의 중첩 현상이 일어난다.

9세기 비잔틴 휴머니즘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은 플라톤과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리스 이전의 동방철학과 상통하는 면들을 가지고 있엇고 그리스도교 교리와도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특징을 보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상이 출발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양립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고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과 수도원주의를 모드 수용하는 경향이 강했다. 13세기부터는 스콜라 철학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서양 전통철학의 주제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에 적용하는 독창적인 사상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2 라틴 세계와의 논쟁에서 미스트라스의 유토피아까지: 비잔티움 황혼기의 철학

14세기 남부에 있던 그리스 수도원들은 비잔틴 세계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를 연결하는 독특한 중재가 역할을 담당한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도미니크 수도회가 이탈리아의 그리스 수도원과 유사하지만 상반되는 역할을 수행했다.

플레톤은 비잔티움의 시민에게 플라톤의 국가를 재건설하고 위대한 휴머니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자고 제안, 이후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반면 겐나디오스 2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후에 동방 정교회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 플라톤 철학을 토대로 하는 모든 교리의 관점에서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2

이슬람의 철학

2.1 팔사파

팔사파로 불리는 이슬람의 아랍 철학은, 8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에스파냐에서 북 아프리카를 거쳐 인더스 강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발전했다. 이 넓은 영토에서 이슬람교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용어로 사용,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타 종교 공동체의 학문에 개방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팔사파 연구에 요구되는 두 종류의 지식은 그리스 철학서들의 아랍어 번역본에 대한 지식과 이 번역본에 대한 아랍 철학자들이 주해에 관한 지식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이슬람세계의 아랍 철학을 통해 전해졌다. 이로 인해 팔사파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성격의 그리스 사상과 엄격한 유일신주의를 토대로 하는 이슬람 신학의 중재를 시도했다는 점과, 플라톤의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일치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1세대 번역가들의 노력으로 아랍철학의 일관적인 용어체제가 구축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알 칸디의 형이상학을 통해 빛을 보았다. 알칸디는 코란이 말하는 신의 유일성 신앙과 양립할 수 있는 존재론을 제시, 플라톤적이 차원의 철학으로 수정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지성과 일치하는 부동의 동자 개념을 모든 존재가 하나를 향해 움직이고 하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 우주 개념을 대치하고 인간에 대한 연구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통의 본질적인 일치를 주장하는 관점의 해석을 제시했다.

 

2.2 알 파라비의 정치철학

10세기에 알 파라비는 알렉산드로스의 아프로디시아의 지성에 관하여를 통해 지성 이론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이론을 구축했다.

아바스 왕조가 몰락하던 9세기와 10세기 사이 바그다드에서 그리스도교와 무슬림들로 구성된 철학자들과 번역가들이 하나의 학파를 형성, 알 파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리스의 과학적, 철학적 유산과 이슬람 문명의 전통 학문들을 융합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학문체계의 중심에 위치, 더 나아가 종교와 정치 공동체의 움직임을 운명적으로 조율하는 전통 학문들과의 조합 속에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통해 이슬람 사회에서 차지하는 철학자의 재정립하고자 했다. 그에게 정치학이란 곧 훌륭하게 도시를 다스리는 자의 통치술과 일치, 정치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훌륭하고 고귀한 행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었다. 문제는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이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2.3 이븐 시나: 팔사파의 성장과 신학자들의 비판

이븐 시나와 함께 동방의 아랍철학은 인식론뿐 아니라 형이상학 분야에서 한 차원 성숙한 분야로 도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본질과 존재, 사물과 실재를 구분. 이러한 구분법을 여러 영역에, 특히 신과 피조물의 영역에 적용한다. 이러한 그의 이론들은 그리스와 아랍의 철학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2.3 알 가잘리와 전통주의자들의 목소리

알가잘리는 그리스의 전통 철학과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은 모든 아랍 철학자들의 사상을 거부, 이들이 모두 계시와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지식을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2.4 이븐 루시드: 진실의 문제

이븐 루시드는 알 가잘리의 비판에 답변을 시도했다. 알 가잘리의 주장으로 이슬람세계에서 철학문화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3

유대인들의 철학

3.1 전통, 계율, 설화

유대인들의 철학 전통은 일종의 규율체제, 다시 말해 성서를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랍비들의 잠언으로 구성된 하나의 법전을 토대로 구축된다. 구전되던 성서가 탈무드로 문서화되었다. 유대교는 인간의 실천적인 삶을 토대로 하는 종교로 탄행, 어떤 교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신학이나 철학적 성찰을 토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행동이나 자세를 규제하는 일련의 규율을 토대로 탄생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 철학을 법과 전통을 연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질적인 지혜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7세기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634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이 지역을 침범하면서, 경전을 지닌 세 종교의 교류가 시작, 칼람(신의 말씀을 탐구하는 학문)이 발전했다. 유대인 가온은 철학적인 담론과 성서의 계시가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고 보아서, 모든 철학적 문제는 하나의 해답을 가지고, 이 해답은 성서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증명을 토대로 마련되었다.

 

3.2 유대인들의 신플라톤주의

칼람에 이어 중세 유대사상은 철학 혹은 논리적인 사유체제와 계시의 내용을 조합하는 데 집중했다. 유대 전통사상의 몇몇 기본적인 요소들과 신플라톤주의 관점의 만남은 융합될 수 없는 몇가지 특징을 부각시켰다. 신의 이미지에 대한 관점 차이로, 성서의 신은 창조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인간과 약속을 통해 소통하는 신이었다면 신플라톤주의의 하나는 의지와는 무관한 힘의 발산을 통해 세상을 생산해 내는 존재였다.

10세기 전후 사상가인 이삭 이스라엘리는 신이 무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전통적인 창조론을 수용, 최초의 질료. 최초의 형상이 존재하고 이들의 조합으로부터 지성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븐 가비롤은 존재 안에 세 가지 실재가 있고, 하나의 실재를 이루는 것은 질료와 형상이 있고, 실재와 신의 중재자로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신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지만 앎을 통해 플라톤이 말하는 감옥(영혼이 물질세계에 갇혀있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근원, 신을 찾아 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고, 인간의 영혼과 우주의 구조 사이의 존재하는 연결고리와 이들이 상관 관계 덕에 영혼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동시에 우주와 모든 사물을 이해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대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대한 유대적인 해석의 특징은 고대 말기의 사상과 아랍 사상의 중재를 통한 철학의 수용, 신플라톤주의와 대조적인 논제들의 발전,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성서 내용과 상응하는 방법론의 모색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이모니데스는 성서를 아리스코텔레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기준으로 해석, 전통사상의 탈신화화를 시도하면서 성서해석학과 철학 간의 소통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의견과 세상은 어느 한 순간에 시작되지 않았고 영원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비교, 실제로 성직자들의 논리를 증명할 길은 없고, 믿음의 대상이며, 철학적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2세기까지 유대인들의 문화적인 성장이 주로 아랍세계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 후로는 프로방스와 이탈리라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3.3 카발라, 신비주의와 철학적 성찰 사이에서

카발라는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독서의 기술 혹은 해석의 기술로 탄생, 라인강 지역과 에스파냐, 플방스를 중심으로 12세기부터 발전, 신학적인 성격의 카발라와 신비주의적인 성격의 카발라로 구분된다.

 

4.

앎의 모형, 중세의 백과사전

4.1 과거의 앎에 대한 하나의 관점과 현재에 대한 판단

백과사전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지식에 대한 관점과 지식의 현 상태에 대한 판단이었다. 중세의 백과사전에도 두 가지 요소가 발견된다. 첫째는 소개된 지식의 일반적인 연구현황을 점검하는 경향이며, 둘째는 암묵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지식의 선전 계획이나 소개 목적을 표명하면서 수집된 지식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하여에서 신학적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는 원칙을 지적했으며, 이시도르의 어원연구는 말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적절한 사용법을 정립하고 동시에 말들이 표상하는 현실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원사전은 라틴어가 통용되던 중세에 상당히 널리 전파되면서 고대의 지식세계를 정치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4.2 12세기와 13세기 백과사전

대성당의 학교 운영이 활성화되면서 서유럽에 백과사전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생 빅토르의 위그가 디다스칼리콘에서 인간적인것과 신적인 것의 이치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학문으로 정의한 철학에 신학, 수학, 윤리학, 논리학, 역학이 포함, ‘조합에 기초하거나 기계적인인 성격의 일곱 개 학과는 철학 혹은 진정한 앎의 범주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초기에, 이 일곱 가지 자유롭지 못한학문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활동 영역이었던 반면 12세기에 도시 내에서 일어난 노동의 분업화는 이 분야들을 각광받는 직업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학교에서 탄생한 백과사전과는 달리 작은 규모의 백과사전들이 12세기 말부터 출간, 비전문가나 일반 대중, 혹은 쉽고 빠른 참조가 가능한 글을 통해 학문적이거나 도덕적인 주제들에 관한정보를 얻기 원했던 새로운 시민 계층을 위한 일종의 매뉴얼이었다. 이 매뉴얼들의 출판과 인용은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3세기 뱅상 드 보베의 백과사전과 알베르투스만뉴스의 논문들이 성공을 거두었는데, 뱅상의 백과사전에서 기술분야에 관한 글들은 중세사를 다루는 본격적인 다큐멘터리라고 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였고, 알베르투스는 마술적인 성격의 천문학적인 관점으로 세상이 별들의 움직임에 좌우된다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4.3 백과사전의 위기와 13세기의 백과사전 기획

한 시대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 모음집으로서의 백과사전 개념은 사라지고 앎의 새로운 구도를 통해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사회의 개혁을 전망하는 설계도로서의 백과사전 개념이 자리 잡게 된다. 즉 복합적 개념을 단순한 요소로 분해하고 상징과 문자로 변역, 이들이 완벽하게 논리적인 언어를 창출해 내도록 하는 해석의 열쇠, 보편적 열쇠에 대한 생각이었다.

 

5

검열과 단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학

5.1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논쟁

13세기 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대학 교육의 기초학문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두고, 저서에 대한 검열, 금서 조치 등 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은 교황의 실질적인 의도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논쟁을 종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파리의 대학에 평화를 보장하고 신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신학자들에게 철학자 놀이에서 멀어질 것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1215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들에 대한 강의를 금한다는 천명에서, 주교그레고리 9세의 의도는 물리학과 형이상학 교육에 몰두하는 신학자들을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277년 주교 에티엔 탕피의 단죄는 철학이 대변하는 부분적 진실은 어쨌든 신학적 담론의 절대적 진리 안에서 결론을 찾아야 한다는 경고였다. 이 단죄는 14세기 이후까지 효력을 잃지 않았다.

 

5.2 이성적 진리와 신앙의 진리: 시녀로서의 철학을 뛰어넘어

1277년 단죄 조치로부터 표면으로 떠오른 논제 중 하나는 이성적 앎의 인식론적 위상이라는 주제였다. 알베르투스 만뉴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에서 신앙의 도그마에 대한 비이성적 접근 방식과 이성적 탐구를 구분해야 한다는 요구와 기적에 대한 모든 유형의 호소를 거부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그는 철학과 신학이 서로 다른 질문에 서로 다른 답변을 제공할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배척한 보에티우스는 철학이 보편적 철학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이론화하면서, 신앙의 진리와 상반되는 철학적 결론의 거부는 철학적 진실의 조작이 아니라 상대화를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적 활동의 지속적인 전문화 경향이 가져올 인식론적 변화를 인식했던 사상가로, 그의 목적은 철학자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성인이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안정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체제 변화를 배경으로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대립관계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철학적 결론과 그리스도교적 진리가 대립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결국 신학자들과 인문학과 교수들 간의 날카로운 분쟁을 일으켰다. 13세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신앙과 반대되는 철학적 결론이 하나의 오류라고 보았다. 하지만 인문학 교수들은 저항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6

알베르투스 만뉴스와 쾰른학파

6.1 알베르투스 만뉴스의 생애와 저서

도미니크회에서 경력을 쌓았다. 1248년 쾰른으로 이주 고등 교육기관 일반학교를 설립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등 모든 저서에 대한 체계적인 강의 착수, 1263년까지 이어졌다. 형이상학의 주해를 집필,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설명하기 위해 논제에서 벗어난 주제들을 다루면서 이슬람과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뿐만 아니라 플라톤주의의 다양한 입장들을 검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완벽한 철학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인문학과가 이븐 시나와 아베로에스의 주해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벗어나고 도미니크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교과서로 채택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그의 주석이 문화적으로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근거로 평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철학 전통이 표명하는 다양한 입장의 또렷한 근거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설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학문적인 탐구에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며 과학적 추론을 근거로 하는 철학은 그만큼 계시로부터, 즉 신화적 담론의 확실성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고 보았다.

 

6.2 쾰른학파

아베로에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신플라톤주의, 헤르메스주의적인 요소들이 함께 나타나는 알베르투스의 지성과 정신적 행복에 관한 이론은 쾰른학파, ‘일반학교를 드나들던 독일의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에 의해 수용, 발전되었다.

그의 제자 율리히와 테오도리쿠스는 자연의 섭리가 지배하는 물리적인 세계가 철학자들의 신성한 학문적 대상인 원인들의 관계를 토대로 구축되며 의지의 섭리는 신학의 대상인 의지와 가치들의 세계를 표상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은 대상 자체에 이른바 부가된범주적인 차원의 수식어들(관계, 본질, 시간, 등등)을 통해 지적 대상을 취할 뿐이다. 테오도리쿠스의 우주의 형성이 지성의 행위, 최초의 원리 또는 신의 본질적 발현이라고 보았던 지성의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생각, 이 발현과정을 이미지의 과정이라 불렀는데, 인간 지성의 발현은 그것의 기원이 되는 원리()의 완벽한 이미지이며, 그런 의미에서 능동적 지성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원리가 되는 신 또한 인식하는 지적 실체의 활동이다. 그렇기에 한 인간의 지적 원리를 진정으로 깨닫는 일은 오로지 다른 삶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베르톨트는 쾰른학파의 주요 개념들 가운데 몇몇을 프로클로스의 철학적 관점에서 검토, 즉 자연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또는 모든 것의 최초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원인들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우주를 연구, 에크하르트에서 발견한 신성한 인간을 부각, 통일성의 형이상학을 하나의 새로운 윤리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러 차원에서 베르톨트는 영혼의 본질을 구축하고 이성적인 기능의 기초가 되는 원리인 동시에 온 우주의 기원이 되는 최고선을 지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일치하는 초이성적 원리인 인간의 영혼은 하나라는 주제를 프로클로스로부터 발견한다.

 

7

토마스 아퀴나스

어린 시절 수도원에서 수사로 지내며 기초 교육을 받고, 18세에 나폴리 대학의 인문학과에서 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공부, 또한 고대철학자들과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저서들을 읽으면서 주해서를 집필, 다양한 외국 문화를 섭렵, 그리스와 아랍 세계의 지식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 당시의 철학과 신학을 전통을 혁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나폴리에서 그의 생애 전환점이 되는 도미니크 수도회와 만난다. 파리의 도미니크 수도회로 이주, 스승 알베르투스 만뉴스를 만나 퀼른으로 이주, 4년 교육과정을 수료, 다시 파리로 거처를 옮겨 대학의 신학부에서 학사 자격으로 명제집 주해를 완성, 교수 생활을 시작, 파리,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강의, 교수로의 삶은 그가 폭넓은 영역에서 연구 성과를 이룩할 수 있게 했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강독, 토론, 설교로 분류된다.

 

그의 저술들 또한 이 세 형태로 분류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신학자 즉 성스러운 교리의 스승이라는 점을 항상 분명히 했다. 그는 그가 다루는 교리가 신의 광채가 관여하는 영역의 지식임을 분명히 했다.

계시는 앎의 수단이며 신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앎의 완벽한 지각 가능성에 뿌리를 둔 수단이다. 신성한 앎인 광채를 통해 인식과 계시가 가능한 모든 사물과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총체적인 지식에까지 확장된다. 그에 따르면, 신학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특징, 계시를 통해 받아들인 신앙의 내용을 전제로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학이론이 사실상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음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의 몇몇 내용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 신의 특성들, 불멸을 보장하는 지적 영혼의 본질적으로 영적인 성격과 같은 내용은 이성이 다루어야할, 즉 신앙의 내용을 위한 전제들이라 정의하면서 이것들이 사실은 기초적인 진리라고 보았다. 신이 이러한 전제를 계시의 진리 속에 포함시켰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들이 신앙과 이성의 은밀한 조화를 표상한다고 보았다.

 

신학대전에서 그는 어떻게 철학적인 방법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경험을 통해 주어진 정보들의 분석을 토대로 경험적 세계를 초월하는 원리의 존재를 규명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동일한 과정

 

 

 

8

보나벤투라 다 반뇨레조

1217년 치비타 디 반뇨레조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남.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공부한 뒤 18세 파리로 이주 대학의 인문학과에서 수학, 1243년 학위 수여 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가면서 보나벤투라(본명은 조반니 다 피단차)로 불림. 1248년 성서 강독을 진행, 1253년 교수 자격증 취득 파리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학교 학장으로 취임, 성서와 주석서 집필.

그의 저술은 크게 프란체스코 수도회 내부에서의 활동과 외부활동을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다. 대외적인 활동의 과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비난하는 파리대학의 비종교인 교수들과 수도회의 파문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고유의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수도회가 가진 경험으로 독창적인 철학과 신학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성 프란체스코 본래의 가르침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탐구에 주력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상은 철학과 신학 연구’, ‘명상적 관점’, ‘프란체스코 성인의 영향을 중심으로 구축된다고 볼 수 있다.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철학적 성찰을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유래하는 두 가지 개념, 탐구와 역동성과 비유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구축했다. 그는 두 개념을 기반으로 현실분석, 현실과 창조주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간이 자신의 인식능력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검토하였고, 세계는 창조주의 존재와 자취를 읽을 수 있는 한권의 책이라는 메타포였다. 이 메타포를 통해 제기되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 문제에 대해 부정했지만, 인간의 정신이 신에게 다가가는 여정의 첫 단계에서 변화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신의 자취였다.

사물들은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인식 여정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역동성에 좌우된다는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는 동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과 상반되는 의견을 제시, 질료와의 융합을 통해 존재를 완전한 형태로 실현하는 형상은 하나가 아니라고 보았다.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박하는 입장에 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통해 읽은 플라톤 철학 이데아 이론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이 모든 사물의 본보기가 되는 원인으로서의 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보았다.

 

9

로저 베이컨과 프란체스코회의 철학

9.1프란체스코회의 철학적 성찰이 지니는 복합성

다양한 철학적 입장을 수용했던 프란체스코회의 사상은 어떤 통일된 형태의 학파도 구축하지 않았다. 사실상 프란체스코회의 사상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으로 내세울 이론적 관점을 도출해 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13세기와 14세기 활동했던 사상가들의 감수성이 어떤 것이었는지 특징은 꼽아 볼 수 있다.

사상가들은 상이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모두 인간의 앎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사랑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에 대한 사랑이 모든 종류의 철학적 성찰에 언제나 우선한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9.2 프란체스코회의 특이한철학자 로저 베이컨

1240년경 인문학 교수로 활동, 1257년 프란체스코 일원이 되었다. 그는 교수들이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무능력하고 어리석다고 비판, 이러한 특징이 자기만족적 권위에 대한 숭배 현상으로 무미건조해진 자기 관조적이고 비생산적인 문화의 표현이라고 교황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는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추종하는 도미니크회의 선생과 제자들이 철학을 아무짝에도 쓸로없는 엘리트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신성한 진실에 대한 긍극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정통한 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설파했다.

베이컨은 문헌학이 아주 중요한 학문이라고 보았다. 문헌학 덕분에 성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리스와 유대와 아랍의 지식세계로부터 그리스도교적 앎의 유일한 진실과 양립할 수 있는 지식들을 추축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