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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웬디 브라운>
[1] 민주주의, 텅 빈 기표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브랜드’로, 제품의 실제 내용으로부터 제품의 판매 가능한 이미지를 완전히 잘라내는 상품물신성의 최신 변형으로 뒤바꿔놓았다. 민주주의는 새로운 세계종교로서 부상했다(85).
[2] 데모스의 통치
자유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권력의 배분방식 중 한 가지 변종에 불과하다. 대의, 입현, 심의, 참여, 자유시장, 권리, 보편성, 평등을 수반하지 않았다. 단순하고 순전히 정치적인 주장,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며, 전부가 정치적으로 주권자라는 주장만을 담고 있다. 민주주의는 끝이 없는 원리이다. (367).
[3] 탈-민주화
공통을 위한 공통의 지배를 이룰 수 없게 된 형태의 근대 민주주의가 된 이유
첫째, 기업 권력이 인민의 정치적 지배라는 약속과 실천을 침식시켰다. 기업과 국가의 권력이 융합되었다. 국가 권력은 자본의 전 부문에 걸쳐 직접 지원과 구제금융을 줄기차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금, 환경, 에너지, 노동, 사회, 재정, 통화정책을 통해 자본축적의 기획에 뻔뻔하게 연루되어 있다. 데모스(서민)는(88) 대항할 수 없다. ‘아니오’라고 말할 힘이 없기에 자기것들이 내던져지는 것을 대개 수동적으로 지켜본다.
둘째, ‘자유’ 선거는 마케팅과 경영의 서커스가 되고 있다.
셋째, 신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비용/수익 비율, 능률, 수익성, 효율성 같은 시장의 기준으로 대체하면서 근간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89). 각종 권리와 정보 접근뿐만 아니라 정부의 투명성, 책임성, 절차주의 같은 입헌적 보호장치마저 쉽게 회피되거나 무시된다. 국가는 인민의 지배가 아니라 경영관리 운용의 구현체로 탈바꿈한다. 국가 주권이 쇠퇴하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의 행정 권력이 확장되는 것을 허용한다.
넷째, 신자유주의는 국내‧국제 법원의 권력과 활동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90). 법원들은 무엇이 금지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제한을 부과하는 기능)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법적 기능)를 말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민주주의적 정치의 고전적 과제를 실질적으로 찬탈하고 있다. 인민주권의 토대인 입법에 대한 사법의 본질적 종속을 뒤집은 것이자, 비-대의적 제도에 권력을 주고 그것을 정치화한 것이다.
다섯째, 국민국가에서 주권 권력이 떨어져 나갔다. 20세기 중반 이래 자본, 인구, 관념 등의 초국적 흐름의 증가는 경계를 산산이 부수는 동시에 그 경계 내부에서는 권력으로 結晶화됐다.
인민이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동일화할 수 있는 집단적 실체(그 안에서 권력이 배분되길 그것에 대해 권력이 실행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92).
주권과 분리된 국가들은 대내외적으로 불량국가가 된다. 국가이성을 소심하게 따라 하는 국가들은 대내적으로는 회사처럼 기능하고, 대외적으로는 자본의 세계 질서의 약한 관리자처럼 기능하는 통치화된 국가 속에서 인민은 수동적인 소액주주로 변해버린다.
안보국가는 신자유주의자들 덕택에 일련의 탈-민주화 조치들(이동권, 정보 접근권의 제한, 인종 프로파일링(93))로써 국가 주권에 훨씬 더 쉽게 반응할 수 있게 됐다.
인민이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으려면 우선 인민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해야만 하며, 자신들이 민주화하려고 하는 권력에 접근해야만 한다. 세계화로 전자의 기반은 약화됐고 신자유주의가 후자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했다(94).
[4] 민주의의의 역설들
개념과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비민주적인 주변부에 의해, 민주주의를 물질적으로 떠받치는 동시에 민주주의에 맞서면서 자신을 정의하는 통합되지 않은 기층에 의해 그 형상이 그려졌다(94).
근대 이전의 민주주의는 공통의 지배하는 가치 위에 평등의 원리를 중심으로 삼았다면 근대 이후는 자유였다. 근대 민주주의가 평등을 내세운 적은 결코 없다(95).
근대 서구가 민주주의를 수립한 것은 근대성이 낳은 선험적으로 도덕적이고 자유로운 주체이다. 주체의 형상이 정당성을 만들어줬고 민주주의의 위계질서, 배제, 예속을 위한 폭력의 허용을 영속화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비-자유가 존재한다(96).
[5] 자유의 불가능성
우리를 주체로서 구축하고,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고 선을 수고할 수(97) 있게 해주는 규범을 생산하며, 투표나 입법과정에서 우리 앞에 놓이는 선택지를 제시하는 다양한 힘을 알고 통제해야만 한다. 우리를 구축하는 모든 권력을 민주주의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관념은 부조리하다. 민주주의가 유의미해지려면 더 권력을 제조하는 데 더 다가서야 하며, 자유를 내던져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 지속적인 정치적 기획이다. 민주화는 스스로를 만들고, 질서를 부여하고, 통치하는 권력을 공유하게끔 하지만, 그것은 언제고 끝나지 않는 과정이다(98).
[6]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가? 우리는 인간이 자유롭길 원하는가?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 인민의 문제에, 또 우리가 원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문제에 직면(101)해 있다. 오늘날의 ‘자유로운’ 인민은 신정, 제국, 인종청소 같은 테러, 계층화된 시민, 신자유주의의 탈국가적 배치, 민주주의적 과정과 제도를 회피하면서 사회적 질병을 치유하겠노라고 약속하는 기술관료 체제 따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102).
[7] 가능성들
가장 어려운 질문, 민주주의가 자신의 뒤집어진 꼴을 정당화하는 겉치레 이상의 것이 된다면, 데모스는 어떻게 권력들을 식별하고 그 권력들을 공통으로 잘 다룰 수 있게 될까?(104)
5. 유한하고 무한한 민주주의 <장-뤽 낭시>
[1]
‘민주주의’는 정치, 윤리, 법/권리, 문명 모든 것을 뜻하지만, 또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107)
민주주의는 만인의 평등 속에서 만인의 자유를 촉진하고 약속한다. 이런 뜻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시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인간에 관련된다. 혹은 근대 민주주의는 시민과 인간을 경향적으로 혼동한다. 근대 민주주의는 정치 변동 그 이상(인간학적 가치를 가질 정도로 깊숙한 문화‧문명의 변동, 또 민주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기술적‧경제적 변동)에 해당한다(109).
[2]
‘민주주의’의 양가성은 ‘정치’를 구성하는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공통의 실존에 관한 유일한 규칙이며 이 실존의 의미 또는 진리의 전제가 그것이다. 정치는 어떤 때는 행위와 주장의 영역을 부각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실존 전체를 떠맡으며 영역을 넓히기도 한다. 공통 존재는 관계나 힘을 관리하는 자기 지양이나 자기 승화로서 도래한다. 지양이나 승화는 스스로를 ‘인민’,‘공동체’,‘공화국’으로도 부를 수 있었다.(109), ‘민주주의’의 양가성과 무의미는 바로 자기 지양 또는 자기승화에서 비롯된다(110).
[3]
모든 것은 정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작됐던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신정의 타자이다. ‘주어진 권리’의 타자라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발명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모든 문제는 민주주의의 무능력에 종지부를 찍을 로고스의 지배에 대한 탐구로서 생겨난 것이다. 국가와 주권을 통해 공법의 확실하고도 자율적인 기반을 세우려는 시도였다(110).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는 토대가 없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회이자 약점이다(111)
[4]
민주주의는 ‘시민종교’를 수반하지 않고는 시작되지 않았다. 신정과 등가적일 수 있는 것을 발명해내야 했다. 권리를 정초하지 않되, 권리의 정치적 창조를 축성해줄 수 있는 종교가 그것이다(111). 시민종교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시민적인 채 머물 운명이었고, 영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채 머물렀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난한 비유는 민주주의가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근본적인 정당성의 자격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112).
[5]
정치는 토대 없이 가거나, 스스로 토대를 놓아야 한다. 전자의 경우 정치는 근거 없는 동기에 그친다(112). 후자의 경우 이성(신권, 국가이성, 신화)은 스스로가 지배와 억압 속에서 공표했던 공통의 전제를 뒤집는다.
‘혁명’은 이 두 측면의 접합 속에 전개되었다. 민주주의는 혁명을 요청한다. 정치가 그 토대를 읽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의 토대까지 뒤집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혁명은 중단된다(113).
토대도 없고 영구혁명 상태에 있는 정치가 진리나 의미의 영역을 어떻게 자신의 과제로 삼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고유하게 정치적인 영역에 대해 ‘예술’,‘사유’,‘사랑’,‘욕망’ 또는 무한이라는 이질성을 사유하는 것은 정치적 필연이다. ‘민주주의’는 습관적으로 이 영역이나 질서의 동질성을 묘사하곤 한다. 이렇게 추측된 동질성은 우리를 호도한다(114).
[6]
‘인민정치/통치’[민주주의]는 힘, 강제를 가리키는 접미사로 이뤄졌다. 정초 원리의 가능성과 거리를 둔다. 민주주의는 본질상 근원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무정부적인 뭔가를 내포한다. 민주주의 제도가 참조하는 권리는 언제나 정초의 결핍이 있고 결핍을 갱신할 때만 사실상 유지될 수 있다(115).
‘인간’에게는 ‘본성’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온갖 ‘자연적인’ 것은 지나치게 갖고 있는 주체의 특성 말고는 다른 특성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탈본성화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초험적 원리에 토대를 둘 수 없으며, 인간 본성의 부재에 토대를 두거나 토대 자체를 갖지 않아야 한다(116).
[7]
정치의 차원은 첫째, 권력과 상관있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권력의 특정하고 분리된 심급의 경향적인 소멸을, 권리상 함축하는 듯이 보이나 실제로 권력 심급의 분리를 제거하면 문제가 생긴다(116).
사회 자체는 관계들의 외부성 속에서 존재한다. ‘사회’는 단지 어느 집단의 내부성으로 통합되기를 멈추는 곳에서 시작된다. ‘사회’와 ‘공동체’의 대립이 민주주의와 동시대적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대 사회는 사회 구성원과 이들이 맺는 관계의 외부성에 따라 표상된다. 우리가 사회, 사회성, 사교성, 연합을 말하면 어떤 전체적인 인간학이 암묵적으로 전제된다. 외부성에서 출발해 서로 연합하며, 연합하면 언제든 해체가 따라올 수 있다(117).
사회 속에서 권력은 ‘정당한 폭력’의 특질을 붙잡을 뿐, 집단의 ‘내적’ 진리와 연결될 수 있는 상징적 기능을 더 이상 붙잡지 않는다(118).
민주주의가 욕망하는 진짜 이름은 코뮤니즘이다. 코뮤니즘적 이념은 유토피아적이건 합리적이건 어떤 이상이 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회적 외부성과 코뮌이나 공동체의 내부성의 변증법적 교대를 작동시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의 이념은 사회 자체가 미결로 미뤄둔 상징적인 것, 존재론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개시할 책임을 맡았다(118).
코뮤니즘은 정치적이지 않았으며 그럴 이유도 없었다. 코뮤니즘이 정치의 분리와 관련된다는 비난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지 않았다. 코뮤니즘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119).
야만과 문명은 위험하게 나란히 간다. 하지만 이 위험은 제어하고 소유하도록 추동하는 운동의 비결정성과 개방성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 운동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존재가 자라는 만큼 만족과 충족에서 그 존재가 무너진다(120).
권력의 추동은 권력을 넘어서며, 이와 동시에 권력 자체를 추구한다. 민주주의는 원리상 권력의 지양을 제거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권력의 진리와 그것의 위대함으로써 그리하는 것이지 권력 자체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니다(121).
[8]
우리는 언제나 선을 위해 통치하고 권력은 인민에 맞춰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의 힘을 한정한다고 해도 선의 본성, 형식과 내용은 결정되지 않는다. 선은 발명하거나 창조하는 운동 속에서만 결정될 수 있다(121).
선은 감각이 생길 수 있는 형식을 항상 다시 취하는 발명 속에 있다. 감각이란 무한을 향해 열릴 수 있는 가능성과 맺는 관계를 뜻한다. 공통적인 것이 문제의 전부이다. 서로가 서로를 느끼기, 그럼으로써 내부성으로 전환되거나 채워지지 않고, 서로 팽팽히 긴장을 유지하는 외부성, 이것은 공통적으로만 주어진다(122).
민주주의는 감각과 의미의 쟁점이 자신의 통치 영역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민주주의 정치로 하여금 명확히 폭넓게 끌어내도록 강요한다. 공통적인 것의 문제다. 이것의 모든 일관성은 한쪽이 다른 한쪽과 거리를 유지하는 데 있다(122).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는 모든 다양을 하나의 ‘공동체’에 흡수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양은 무한의 셀 수 없고 완수될 수 없는 형태들을 구성한다(123).
[9]
정치는 사회의 안정성에 대한 제어와 공통-되게-존재함의 모든 표현 형태를 아우르는 형식에 대한 관념을 혼동하는 덫이다. 모든 형태를 포괄하고 휩쓸고자 하는 동경이 자신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것은 그 동경이 형태를 여러 방식으로 발전하게끔 만들어주고 소진불가능한 다양이 증식하도록 만들어줄 때뿐이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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