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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발제문/철학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바다사자. 2020. 4. 12. 10:13

6.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는 전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 담론의 상당수가 공히 민주주의에 맞서고 있다(129). 민주주의란 틀이 미리 정해진 소비자 개인의 군림, 보통 사람에 의한 지배라고 여겨지고 있다(130).

 

그래도 모두 자신은 민주주의자라고 하는데..... 민주주의라는 단어 개념에 합의된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립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관념이다(130).

 

이런 다의적이고 서로 다른 것을 포괄하는 단어를 유지할 필요가 있나? 한국의 촛불(131) 등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그 단어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는 불평등 속에 이미 들어 있는 평등이다. 오염되지 않은 단어가 있나?

 

민주주의는 이상인가? 비판적 도구인가? 이상이 아니다. 조제프 자코토의 원리에 따라 작업한다. 평등이란 하나의 전제이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이다(132). 민주주의엔 비판적 기능이 있다. 그것은 지배체에 이중으로(객관적이자 주관적으로) 박아 넣은 평등의 쐐기이다.

 

해방운동에 대한 비관적 시각이 아닌가? 평등이란 그것의 영역을 그리는 실천의 집합으로 존재한다. 평등의 현실로서의 평등의 현실만이 있는 것이다(133). 나는 해방의 사상가다. 해방에는 전통이나 역사가 있는데 번쩍이는 위대한 행위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형태를 창조해내기 위한 탐구로 이뤄진다(134).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아 보이는데... 해방의 전통이 있다(134). 나는 역사적 필연이라는 관념과 맞서 싸웠다. 역사란 삶밖에 갖지 않은 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역사란 자기 자신의 삶,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어떤 시간성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짜는 것이다. 이들의 전승은 단절되기도 하고 재구성되기도 하면서 어떤 단어들, 그 단어들과 이어진 희망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쓸 것이다(135).

 

 

7. 민주주의를 팝니다. 크리스틴 로스

 

1) 쿠훌린, 쿠시네에 맞서다

침묵하는 다수는 그 수가 가장 많은 집단이 스스로 말하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대변될 때, 소수의 목소리가 갈수로 권위를 읽어가고 정당성을 빼앗길 때 등장한다(146).

 

1960년대에 정부(프랑스) 관료들은 최대 다수의 침묵을 무질서나 독단에 대항하는 양식의 보루하고 자신 있게 해석하거나 복화했다. 다수의 침묵은 합법적인 방식으로 제 목소리를 내라고 요청받기 전까지 억눌려 있던 어마어마한 예비군 역할을 했다. , 투표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소리 없는 동의로서의 민주주의로, 자신들의 정치적 발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협치가 모든 이를 이롭게 해주리라 믿으며 별 불편 없이 행동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협치라는 것이 실제로는 가장 막강하고 부유한 계급이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이뤄져 있는(147)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협치란 부유한 사회 혹은 저개발된 사회의 급진적인 소수가 어떤 식으로라도 기존 체제를 뒤엎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148).

 

우리 시대와 1960년대 사이의 격차는 보통선거권이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대의민주주의의 유효성까지 박탈해버리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148).

 

민주주의는 일체의 정치형태 중 가장 복잡한 것을 통해서 다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투표라는 것은 탈주적 민주주의가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적 잠재성이 될 수 있게 한다. 투표는 인민주권을 향해 가하는 반민주주의적 공격에 사용되는 무기로 여겨질 수 있다(149).

 

2) 민주주의를 팝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이다.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의 일종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 권력을 지칭하는 군주제, 과두제, 민주주의 중 오직 민주주의만이 숫자에 무관심하다. 데모스의 권력은 주민 전체의 권력도, 다수의 권력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나의 권력이다. 아무나는 지배받는 자의 명칭이자 지배하는 자의 명칭이다(150).

 

프랑스 제2제정 시대의 민주주의는 너무 고무 같았다. 전혀 제 기능을 못했고, 분할보다는 합의를 만들어냈다. 1871년 파리코뮌의 전사들은 견고한 위계적관료적 구조 대신에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적 형태와 절차를 도입했으며 스스로를 묘사하는 데 민주주의자보다 공화주의자, 인민 등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완전히 민주주의자라는 단어를 내던지지 않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여전히 1789년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153).

 

파리코뮌이 몰락한 시기는 온 세계가 식민주의에 의해 한데 묶이기 시작했던 시기이자 진정한 부르주아 정체가 결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이다. 부르주아-공화주의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피의 일주일은 민주주의의 패배였던 대학살이 제3공화국을 낳았기 때문이다(157).

 

랭보의 민주주의는 일국적 차원의 계급투쟁에서 인민의 요구를 표현하는 데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바로 그 시기, 오히려 서구와 너머지 세계가 벌이는 국제적 차원의 투쟁에서 문명화된 나라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그 시기를 표시한다(158).

 

19세기가 시작될 때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던 그 집단이 그 세기가 끝나갈 때쯤 그 용어를 포용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서구에 필수적인 정신의 보충물이자 문명화됐음을 알리는 깃발, 구호,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계급 살육의 역사가 개시되었음을 선언했다. (159)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에 서구는 이 세계의 도덕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런 헤게모니는 전 세계에 걸쳐 진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민주주의에 시장 관계가 침투되었다(160). 소비주의를 민주주의와 견고하게 동일시했고 구매할 권리로서의 민주주의가 되었다. 오늘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는 번영 속에서 보다 더 완벽하게 탈정치화되고, 거짓된 영원의 분위기나 환경 혹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중이다. “거주권, 이민, 운동, 요정의 나라, 완벽한 안락, 이들이 만들어낸 소음과 움직임과 미래를 판매합니다!”

 

냉전의 종말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평행추로서의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다져놓았고 실제 서구의 정부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완전히 통제하게 됐다. 예전에 간직했던 해방의 울림을 완전히 제거한 채(161). 민주주의는 극소수 사람들만의 통치, 인민 없는 통치만을 허용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시장을 민주주의의 명백한 조건으로 간주하게 만들고 민주주의를 시장에 대한 불변의 요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은 갈등의 시대와 끝장을 본듯했다. 그때부터 사회는 끊임없는 민주주의적숙고, 대화, 논쟁의 장소이자 사회적 관계를 꾸준히 규제하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162). 민주주의를 선거나 다수의 의지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최근에야 역사 속에 등장했다. ‘대의민주주의는 실제로는 과두제의 형태이다. ‘산업선진국형 민주주의는 모두 과두제적 민주주의이다. 이들은 역동적인 과두제, 막대한 부와 부의 숭배 한가운데 자리한 세계정부의 승리를 대표한다.

 

과두제 정부는 선택범위를 제한하는 식으로 중간계급과 상층계급(163)이 효율적으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보호해주는 선거를 통해서 합의와 정당성을 창출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민주주의란 통치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공통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아무나의 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 자체의 특별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왔다. 민주주의는 공적 삶의 끊임없는 사유화에 맞서는 투쟁의 이름으로서 재창조되어야만 한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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