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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2020.4.19.(일) 바다사자
8.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슬라보예 지젝>
[1]
오늘날의 시대는 탈이데올로기적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167).
민주주의는 날로 확산되는 비상사태의 논리에 따라 증대되는 행정부 수장의 특권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거대 다수의 수동화를 수반하는 의회주의적 형태에 의해 그 기초를 위협받는다(168).
라캉은 지식과 권력의 괴리를 주장한다. 우리 시대에 지식은 권력의 효과에 비해 상당히 불균형하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알게 되지만, 그것들에 대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 너무 많이 알지만 일관성 없는 대량의 지식을 갖고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 지식을 하(169)나의 주인-기표에 종속시킬 방법을 몰라 생동할 수 없는 상태이다(170).
[2]
근대 초기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민주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유주의 엘리트에게 민주적이었지 노동자에게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조건은 잔인한 국가 독재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됐다(171).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나 자유를 동일시할 수 있는 모든 특징(노동조합, 보통선거, 무상의무교육, 언론의 자유 등)은 19세기 내내 하층계급의 길고도 힘든 투쟁을 해 쟁취한 것이지 자본주의적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다(172).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저 우리가 망각한 과거가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경제적] 발전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결합됐다면 더 빨라졌을까? 랄프 다렌도르프는 ‘모든 혁명적 변동 뒤에는 새로운 번영으로의 길이 ‘눈물의 계곡’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주의가 붕괴됐다고 해서 곧장 성공적인 시장경제의 윤택함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눈물의 계곡‘을 통과하는 고통스러운 이행과정은 통상의 선거 주기보다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다 근본적이어서 힘든 변화를 뒤로 미룬 채 선거를 통해 단기적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진다. 탈공산주(173)의 국가들에서 대부분의 계층이 새로운 민주적 질서가 가져온 경제적 결과에 실망하곤 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중국은 칠레와 한국의 경로를 따라서 견제받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을 활용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174)을 통제했고 그에 따라 혼돈을 피했다. 자본주의와 공산당의 지배라는 결합은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었다.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발전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지배 때문에 빨리 발전했다.
사람들이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중국이 서구의 우위를 위협할만한 차기 강대국이 되게 해줄 중국의 빠른 성장이다.
마오쩌둥주의의 영속적인 자기-혁명화, 즉 국가구조의 경직화에 맞선 영구적인 투쟁과 자본주의의 내적 동학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조적 상동성이 존재한다(175).
자본주의란 노예제적인 지배관계로부터 공산주의적인 평등주의적 정의로 직접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우회로일 수 있다. 중국은 민주주의가 더 이상 경제발전의 조건이자 동력이 아니라 그 장애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176).
[3]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던,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식량이 되어 팔려나가는 진흙 쿠키)(179).
[4]
아이티의 사례는 혁명 주체의 부재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어떻게 노동계급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완전히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혁명 주체로 구축할 수 있는가? 서구 맑스주의가 정신분석학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노동계급의 존재 자체에 각인된 계급의식이 발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의식적인 리비도적 기체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180).
혼란스러운 세계가 제자리로 돌아올 최후의 심판의 주체는 민중이다. 좌파의 정치운동은 ’분노의 은행‘이다. 이 운동은 대규모의 복수와 전지구적 정의의 재확립을 약속하며 사람들로부터 분노를 투자받는다(181).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분노 자본‘을 흡수했고 극도의 임계상황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혁명은 각각의 적대가 서로의 힘을 결합해 상승(182)작용을 일으킬 때에만 발생한다. 혁명가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체계가 붕괴하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열린 기회를 포착하고 그 순간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혼란의 순간이 끝나면 다수가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정권에 실망한다. 그러나 정권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늦게 된다(183).
공산주의 정권은 대중의 지지 아래 진정으로 장기적인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애초부터 고려하고 있었다(184).
[5]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발터 벤야민).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187)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188).
(헤겔)주관적 자유가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의 합리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인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봉기할 권리 역시 갖는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체계적으로 권리, 인격적 존엄성을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사회질서에 대한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그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189).
신의 폭력은 무엇인가? 신의 폭력이 발생하는 장소는 극히 정밀한 형식적 방식으로 확정될 수 있다. 국가 권력은 단지 주체들의 이해관계 등을 대표할 뿐이다. 국가권력은 그들에게 봉사하며 책임을 지고 그들의 통제에 종속된다. 그러나 그 아래 초자아의 수준에서 책임에 대한 공적 메시지 등은 권력의 저속하고 무조건적인 메시지에 의해 보충된다. 법률은 진정 나[국가권력]를 구속하지는 못한다. 저속한 과잉은 주권 개념의 필연적인 구성요소이다. 여기서의 비대칭성은 구조적이다. ’신의 폭력‘은 이런 권력 과잉의 상관항이자 동전의 다른 면이다. 신의 폭력은 이 과잉을 겨냥하고 그 기초를 위협한다(190).
[6]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지 않고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191).
민중의 새로운 참여 형태에 근거해 국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에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제로 갖게 된다. 민주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피대표자에 대한 대표의 구성적 과잉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는 소외를 최소화할 것을 전제로 한다.
’전체주의‘에서는 지도자가 민중의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민중이 더 소외되는 결과가 빚어진다. 지도자는(192) 민중의 진정한 희망과 이해관계의 화신이 된다. 여기서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민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즉자적으로‘만 안다. 그들을 위해 그들의 이해관계와 목표를 ’대자적으로‘ 공식화해주는 것은 바로 그들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전체주의‘의 논리로 대표된 ’인민‘ 내부에 언제나-이미 존재하는 분열을 분명히 하고 ’그 자체로‘ 제시한다. 지도자는 대의를 위한 열정을 촉발시킴으로써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주관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추종자들의 정체성에서 ’실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193).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결국 ’몫 없는 자들‘이다. ’몫 없는 자들‘의 대표자들이 텅 빈 권력의 장소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고 더 근본적으로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194).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재란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썼을 때 이 텅 빈 (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195).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그에 따라야 한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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