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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푸코세미나. 성의 역사 4. 육체의 고백 제1, 3-4절 발제. 풍경

성의역사4, 육체의 고백1장 3. 4절 발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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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두 번째 속죄]

p129, 3세기부터 만들어진 교회법에 의거한속죄, 세계 후에 다시 죄를 지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을 허락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속죄뿐이다.

p133, 교회법에 의한 속죄는 점차적으로 두 번째 수련 기간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 절차는 사제들의 권한으로 속죄가 필요한 시기와 속죄의 기간을 결정할 수 있는 실무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서의 속죄는 속죄자의 요청에 의해서허용되고 받아들여진다. 속죄는 죄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만들어진 절차에 따르고, 이러한 수행이 끝나면 사면을 받는다. 사제가 다시 인수하면 속죄자는 하느님과의 소통이 허용되는 것이다. 세밀한 규정에 따른 두 번째속죄와 고행의 실천은 하느님에게 바친 오랜 노고의 결실인 것처럼 그를 용서해 준다. 3-5세기 저자들은 고행을 통해 은총을 받은 죄인은 자신의 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p136, 3세기부터 세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회개와 교회에서 주관하는 속죄의 고행에 필수적인 회개를 기술하는 방식 사이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영혼의 더러운 죄를 씻어 내는 회개라는 방법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만, 세례에서는 해방을 강조했다면 사면에 필요한 회개에서는 죄에 대한 영혼의 고행 활동이 강조된다.

 

p136, 교회법에 의거한 속죄의 고행 과정에서 속죄하는 영혼이 진실을 표명하는 절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A

성 키프리아누스의 서건들에 의하면, 엄격성과 관용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문제, 교회에서 평화를 다시 찾으려는 죄인들의 요청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성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중요한 임무는 진실성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축출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치유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속죄 요청자의 동기와 서정을 철저히 조사할 것, 속죄 요청의 의도와 상황을 고려하여 구별하고, 또 죄를 범한 상황에 관해서가 아니라 죄를 범한 이후에 그가 보여준 품행에 관해서 조사하였다. 이러한 진실 확인절차에서 죄인은 자기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B

이처럼 숙고된 절차는 2-4세기까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고백고해라는 용어와 연관되어 있다.

1.주교가 죄를 고백한 죄인의 사면을 책임지도록 하면서, 속죄의 요청은 신중한 것이 되었는데, 실행방법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사제들에게 고통스럽지만 솔직하게 죄를 고백해야 했다.” 이러한 구두의 절차는 재판상의 자백과 같은 성격을 갖았고, 이 시기의 구두고백은 속죄의 간단한 전제조건일 뿐이었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에 속죄의식에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구두의 고백형식이된 고해와 다른 점이다.

2.사면의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수행하는 속죄, 고해, 안수의 절차 가짐.

3.이때의 고해나 고백이란 용어가 속죄의 최종 단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속죄의 절차가 진행되는 전체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드러나는 고해의 실천이 속죄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4세기 말에는 이러한 체험과 진실 증명의 행위가 속죄자의 고행의 실천방식을 특징 지었다.

#초기 교회에서 주관하는 속죄의 고행에서 진실에 관한 절차들은 두 개의 극점을 중심으로 재편성된다. 하나는 구두에 의해 비공개적 표명으로, 이것의 역할은 죄를 평가하고 어떤 방법으로 죄를 용서할지를 결정할 수 있게끔 죄를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포괄적이고 공개적인 표현으로서, 이것은 가능한 한 강렬하게 연극성을 살려서 속죄자의 죄의식 상태와 동시에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변화의 의지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P135“잘못을 말하기와 죄인 스스로 죄의 고백과 자기성찰, “죄의 진실을 말하기등의 일은 오직 속죄의 절차가 시작되기 전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속죄의 절차 밖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와 반대로, 과장, 몸짓, 손짓, 표현력 등 죄인의 죄에 대한 모든 표현방식은 속죄의 본질적 요소다. 이것은 속죄의 기본적이고 지속적인 차원을 만들어낸다. 속죄자가 진실을 말하기보다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서 진실인 것처럼 표현하기에 더 애써야 한다.(이것은 기독교가 강력한 공동체 구조와 서열화 된 조직을 갖춘 교회체계로 편성될 때부터, 검증절차와 보증 없이는 용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죄지은 자의 자기 고백은 자기의 진실 된 모습을 드러내는 의무를 성찰하고 정당화하는 방법이며, 고해를 통한 죄의 인정이 없으면 용서는 없었다. “나는 모른다.”고 한 진실의 부정은 가장 무거운 죄이다. 죄지은 자의 진실에 대한 의무는 속죄의 조건과 같은 것으로 제시, 고대 기독교는 몇 가지 모델을 고안해 냈다.

의학적 모델. 죄는 상처나 외상으로, 속죄는 치유로 표현. 이것은 영혼의 질명에 관한 그리스적 발상에 근거를 둔 것이면서, -상처라는 히브리 문화의 전통에 근거를 둔 것이다. *속죄의 고행제도가 성사의 형태를 갖춘 12세기가 되면 사면권을 갖는 사제가 의사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에서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의사는 그리스도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속죄하는 일은 치유의 역설로, 절대 감출 수 없기에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치료해주려는 입장에서는 진실은 의무와 같고, 죄인의 입장에서는 진실이란 대가를 치러야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법적인 모델. 속죄가 법정의 재판처럼 규정되면서 사제가 재판관 역할(하느님의 대리자)을 할 때, 죄의 고백은 속죄절차의 구성요소가 된다. 즉 죄의 고백은 하느님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인간의 잘못에 하느님의 분노가 정당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때 인간의 죄의 부정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거짓을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하느님에 대한 부정?)

죄인의 진실한 모습과 속죄의 진실성을 밝혀야 하는 속죄자의 의무는 순교자와의 관계에 더 깊은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 이후에 나타나는 이 주제는, 자기 신앙을 증명할 기회를 갖지 못한 세대에게 순교를 대신할 수 있는 기회로 나타난다.

P162, 순교행위에서~고해는 진실을 정당하게 세우는 본보기이며 회개의 증거가 된다. 훗날 중세의 속죄에서 고백은 저지른 죄를 모두 열거하는 진실 말하기-진실처럼 보이게 하기가 된다. 이것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절의 표명이다. 즉 속죄자는 집 을 떠났다가 돌아온 젊은이가 돌아와 나 여기 있어요.”, “그러나 그때의 나는 없고 지금 의 내가 있지요.”

#속죄의 역사에서는 죄인이 사제 앞에 나타나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죄 를 구두로 상세히 밝히는 날이 올 것이다.

P164 <원시적 형태의 속죄는...... 고해의 의식은~ > ?

 

 

 

4[최고의 기술]

영성지도,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등은 오래된 전통으로 기독교에서도 연속적으로 드러나는 공통점이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서 생활지도의 실천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간헐적, 상황적 관계 속에서 실행되거나, 훨씬 지속적이고 제도화된 형태의 지도방식으로도 있었다. 후자는 철학 학원에서 통용되는 방법으로,(P168) 지도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총괄적인 실행방안을 마련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성찰이었다. 양심의 지도 방식이 크게 발전하면서 영혼의 성찰이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제자나 상담자가 지도자에게 적절한 치유방안을 결정할 수 있도록 영혼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

#양심성찰의 목표는 자기통제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독립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이다. 성찰의 대상은 영혼이 하는 일이나 보는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영혼을 불안하게 만드는 움직임들-이며- 영혼이 자신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작업을 통해- 하루에 일어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며 평가한다. 이러한 성찰은 자신의 특정한 행동을 향해 있고, 그것의 목적은 행동을 적절하게 평가해서나쁜 행동과 좋은 행동을 구별하는 일이다.

#성찰의 역할은 지금까지의 몰랐던 행동규범을 드러나게 만들어 미래에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지 않고, 미래 상황에 대비해, 보편적 이성의 원리를 작동시키면서 세상의 질서와 일치하는 자신의 독립성을 구축하는 데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평정심을 유지하게 하는 규범을 아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성찰의 관습이 기독교에 양심성찰의 의무와 규칙이 규정되고, 영혼의 지도방법이 발전한 것은 4세기 들어서면서이다. 그것은 수도원 제도가 만들어진 다음부터 내부적 필요성에서 수용되었고, 형식과 효과의 면에서 새롭게 발전했다.

 

1.지도의 원칙

수도사의 생활이 지도없이 수행될 수 없다는 원칙. 어떤 경우라도 제자와 스승을 연결하는 관계가 있어야 하고, 제자에게는 스승의 지속적인 감독을 받게 하고 스승의 사고한 명령이라도 따르면서 그에게 속내를 숨김없이 털어놓는 개별적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완전한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지도는 필수적이다.

P185. 카시아누스는 이러한 지도와 지도가 실행되는 방식에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지도는 복종을 가르치는 엄격한 훈련이며, 이것은 타인의 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완전하고 철저한 복종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포기-대체의 상호작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끊임없는 고백의 훈련이 필수적이다.

 

2.복종의 규칙

고대 철학적 생활에서 스승에 대한 복종은 정념에서 자유로워지게 하고, 애도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지도를 통해 목적이 달성되면 곧 중단되어야 할 일시적인 도구였다. 그러나 수도사의 복종은 완전히 다른 유형이었다.

-총체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그를 지도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순종이 수도사가 지도를 받으려면 취해야 할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복종의 가치는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 자신을 굽히고, 타인에게 복종한다는 데 복종의 가치가 있었다.

-부조리한 명령의 수행, 즉각실행의 시험, 반항하지 않기 시험.

-수도사의 복종은 복종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절대적으로 복종의 존재가 되게끔 인도하는 것, 실존의 구조이다. 겸손함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복종하면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타인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바로 순종이다.

 

3.하느님에 대한 의존

수도생활의 두 극단 태만과 자기만족에서 적절한 길 찾기 능력-분별력은, 수도사에게 일탈하지 않게 한다. 고대적 발상으로는 과대와 과소를 구별하는 역량과 처신하는 방법에서 절도를 지키는 능력은 사람마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과 관련됐다면, 수도사가 끊임없이 자기를 관찰하고 자기에 대한 주의 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내면의 올바른 균형원칙을 찾으려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 밖에서 의지할 대상을 찾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수도사는 자신이 척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별력은 인간이 우연히 도달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다. 하느님의 관대함에 의해 붙잡을 수 있다.

 

4.성찰 - 고백 (p205)

복종과 자신의 의지 포기라는 일반적 형식에서, 지도는 중동지역 교회에서 고해라고 불리는 성찰-고백의 영구적 실천을 중요한 도구로 삼는다.

 

*고해의 가장 명백한 특징은 그것이 과거의 행동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변화하는 생각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성찰의 목표는 성찰 그 자체다.

고해는 어떤 의미에서 수도 생활의 엄격한 복종체제를 의미한다. 즉 수도생활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묵상, 명상, 기도 등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주요 문제이며, 수도사가 수행할 원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생각은 단순히 생각하는 영혼의 행위라기보다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영혼이 겪는 위기이자, 내면의 위험이다.

 

1)내면의 투쟁

잡념(사고의 혼란스러움을 초래할 위험이 따르는 생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사고의 혼란이 유일한 존재에 대하여 유일한 명상을 지향한다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즉 정신은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에 고정된다는 것은 정신적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카이시아누스가 성찰의 훈련에 부여한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p209 *성찰의 역할은 영혼 앞에 억제할 수 없이 계속 밀려오는 생각의 물결을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일과 버릴 것과 받아들일 것을 구분하는 선별의 메커니즘(구조) 속에 있다. ‘생각을 구분하는 것’-좋은, 나쁜 등-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성찰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진실의 문제가 된다. ‘숙고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p211 *그러므로 성찰은 분별의 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생각의 질을 테스트하는 일이다. 잘못 생각하게 만드는 환영의 대상은 생각과 사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본성, 실체, 존재도 포함된 생각일 수 있기에 생각하는 사람에게 떠오르는 생각의 변화도 검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양심의 비결이라 불리는 성찰이다.

->정념의 변화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확실히 하고자 하여 나의 견해가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검증했던 스토아주의적 성찰과는 차이가 있다.

 

2)고백의 필요성

자기의 성찰이 잘못 생각할 위험, 잘못 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위험, 또한 성찰된 생각보다 확실한 것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이러한 지점은 고백의 필요성을 부른다. 그렇기에 고백은 가능한 성찰에 가까워야 하고, 타인을 향한 말이 되어야 한다(성찰의 결과인 결산의 제공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p214 카시아누스는 오직 언어의 표출이라는 사실에만 선별의 성과와 정화의 미덕을 부여한다. 말을 만들고, 말로 표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일은 환상을 제거하는 힘, 내면에 있는 유혹자의 속임수를 쫓아 버리는 힘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p216*고백의 목적은 비밀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것을 백일하에 드러나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고 빛이 작용함으로써, 권력의 전환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즉 고백을 통해 그는 자신이 점령하고 있던 자리(수치심)에서 추방된다. #고백이라는 형식 자체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p217 고백은 고백에 적합한 특유의 조작적 힘을 갖는다. 말하고, 보여주고, 추방하고, 해방시킨다. “주 예수는 ... 네가 유익한 고백을 함으로써 너의 마음에서 추방된 그러한 정념의 선동자를 네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기를 원했고, 또한 적이 패배의 도주를 함으로써 일단 정체가 드러난 이상 너의 몸 안에 적이 머물 자리가 없다는 것을 네가 깨달을 수 있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력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성찰만으로 실행될 수 없고, 그것과 동시에 끊임없는 고백이 필요하다. 분별력은 오직 성찰-고백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자기에 대한 자기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말하기와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잡념의 기원, 특성, 원인에 대한 지속적인 분별행위가 있은 다음에 비로소 영혼은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있는 순결한 생각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수도사의 생활에서 타인에게 해야 하는 계속적인 고백과 연결되어 끊임없이 자기성찰의 실천으로 개발된 고해는 타인에게 완전히 복종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상담방식과 다르고, 철학자의 제자와 지혜의 스승에 대해서 갖는 신뢰의 관계와도 아주 다르다.

자기 자신의 복원이나 주체의 해방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의지에 대한 완전한 포기이자, 그 어떤 끈으로도 자기 자신에 매여 있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영성을 실천하는 일의 기본적인 역설은 자기 자신의 진실 말하기가 근본적으로 자신의 포기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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