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성의 역사4 < 육체의 고백 > 미셀 푸코 2020.3.4.() 바다사자

 

2장 동정에 대하여

 

[1] 동정과 금욕(pp225-264)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의 <향연>4세기 제도화된 금욕주의 형태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동정의 현실적인 실천방식의 몇 가지 기본 문제들을 공식화한다. 첫 번째 연설은 독특한 상승의 모형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과 닮은 모습의 상태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완성의 정점에 동정을 배치하여 3개의 변화 흐름(구원의 은총, 율법의 점진적 변화, 상승에 대한 개인의 노력)과 절제와는 현격하게 다른 기독교인의 동정을 엮어 놓았다(244).

 

향연은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동정의 시기에 근거를 제공하나 인간의 행동 중에서 금지해야 할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과 피조물 사시의 관계에서 기본적 형상과 같은 동정은 행동과 생식과 인척관계와 영적 관계의 질서 속으로 전환되어 있다. 그러한 동정은 하느님과의 근본적 관계를 구원의 차원에서 복원한 것이다(249).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자유가 없을 경우 정절의 모든 가치가 박탈당할 만큼 중요한 그 자유에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욕망의 움직임, 즉 육체의 생리적 욕망과 정신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한쪽은 미덕이고, 다른 쪽은 타락이다. 영적 친자관계와 내면(260)의 투쟁은 <성서>에서 예고되고, 천년 주기에 이어서 나타난 동정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동정의 시대는 인간의 자유와 차별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공덕에 따라 하느님의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과 파멸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한다(261).

 

동정의 목적은 모든 욕망과 탐욕까지 뿌리째 뽑는 데 있다. 모든 미덕 중에서 최고의 미덕이자 시간의 완성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동정은 육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영혼의, 영혼에 대한 작업이 되어야 한다(262).

 

오직 동정만은 사탄이 절대로 모방할 수 없다. 동정은 율법이 아니다. 율법에 맞서는 것이다. 그런데 동정이 율법을 계승(262)해서 나온다. 동정은 규정의 대상이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방식이며, 세상의 역사와 구원의 전개 국면에서 중요한 순간을 표시한다. 이러한 구원의 단계에서는 하느님과 피조물이 더 이상 율법과 율법에의 복종이란 관계로 소통하지 않는 것이다. 동정은 단순한 명령 복종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의 영혼에 대한 훈련이며, 육체의 불멸화에 이르기까지 영혼을 이끌어 간다. 육체의 종말이 없는 삶이 실현되는 영혼과 자기와의 관계인 것이다(263).

 

[2] 동정의 기술(pp265-305)

이교인의 순결이 기독교인들의 동정과 다른 것은 순결을 임무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들에게 순결은 외적인 규범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정숙함을 약속하는 것은 늙어서 추잡해지는 것을 상쇄시키려는 시간 끌기 일 뿐이다. 처녀는 자신의 순결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파는 것이다. 이것은 매춘보다는 나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문제일까?(269).

 

이교인의 금욕과 기독교인의 동정을 구별하려는 예는 결혼생활에 대한 비판과 자립 생활에 대한 예찬이다(270).

 

평정심의 상태로 동정을 묘사하고 평온한 삶을 철학적 어휘에 의존해서 표현하는 것은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묘사와 표현은 처음부터 동일한 저자들이 동정의 끊임없는 투쟁과 순교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한 것과는 모순되게 보인다. 다른 한편 결혼한 사람들의 생활에 보다 많은 위험과 시련이 있고 그것을 겪음으로써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말한다(275).

 

진정한 인식과 참된 행복의 필요조건에 대한 전통적 생각과 현세에 대한 기독교인의 근본적인 초연함이 만나는 지점이다. 또한 수도원에 은거한 생활의 지위와 그러한 생활에 이르는 방법, 그것의 고유한 공덕사항 등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성을 갖는다. 일상적인 걱정 없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 벗어난 동정의 생활이 바로 평온한 삶이라는 원칙을 갖게 된다(276).

 

수도사 생활을 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된 성서 다니엘의 평온한 상태는 철학적 삶의 평정심과는 다르다. 평온함은 불안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속세의 모든 것에 대한 초연함과 신의 은총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전투에서의 자신감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평온함transquillitas’침착함otium’의 주제가 계속되어, 사실상 자제력과 금욕이라는 부정적 관리술이 복합적이고, 긍정적이고, 불가지론적인 경험, 즉 동정의 개념으로 변화했음을 보여 준다(277).

 

수도원 제도의 발전이 동정의 주제들을 강화시켰다. 수도원 교육은 동정의 다음과 같은 세 측면 - 첫째, 결혼의 상태와는 아주 다른 것이면서 현세에서의 생활과 동화되고 나중에 긍정적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어떤 실천과 기술, 특별한 테크닉이 요구되는 신분이라는 것, 둘째, 어떠한 규범으로도 강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의 형태도 아니며,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계율의 형태도 아닌,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라는 것, 셋째, 개인의 구원을 위한 기획이 인류의 대속이라는 문제와 깊이 관련된 생활 형태라는 것-을 성찰할 수 있는 장소, 혹은 기회가 되었다(280).

 

동정에 대한 모든 신비주의 신학의 주장은, 동정이 실제로 하느님을 닮으려는 상승의 의지임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다른 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은 이러한 성의 차이를 초월하고, 그러한 차이를 만든 창조행위까지도 초월하여 신성한 합일을 지향하는 재상승이다(282).

 

낙원에서의 인간은 무한히 번식(낙원에서의 성관계)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양성의 결합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하느님이 성의 차이를 결정하지는 않았다 해도, 인간의 특징적인 성의 차이에 의해 앞으로 인간이 타락할 것이며 생식기능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동정의 실천은 인간이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져 아직도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있었을 때로, 타락을 넘어서서 낙원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된다(285). 동정을 실천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내면에 최초의 완전한 상태를 회복시킨다고 할 수 있다. 타락한 행동의 대가인 죽음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최초의 완전한 상태를 회복한다(286).

 

동정은 실존방식의 현실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존재를 기원의 상태 속에 복원시키면서 세속적 한계와 죽음과 시간의 법칙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고, 개인의 육체와 영혼을 변화시키면서 동정의 첫날부터 당장 종말이 없는 삶에 이르게 하는 혁명적 행위이다. 동정은 천국의 생활원칙을 지상에 옮겨 놓는 일이다(287).

 

사람들이 동정의 순결주의를 간청하는 것은 본질적이며, 물질세계를 꿰뚫고 나아가고, 세상이 그 힘을 작용하여 상황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이다(288).

 

천지창조 이후의 세계는 비어 있었고, 이 세계를 채우고 완성의 지점에 이르도록 한 것은 동물의 성적 번식이었지, 인간의 성적 번식은 아니었다. 타락은 두 가지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는데, 하나는 인간을 천사처럼 번식할 수 없게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적 생식은 죽음과 양면성의 관계를 갖는다. 성적 생식은 타락의 결과이지만, 죽음이라는 재앙을 끊임없이 보정한다(289).

 

죽음의 법칙 아래에서 결혼은 하나의 계율이었다. 동정의 실천이 끝나는 세계와 결합하게 되는 시대, 완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태중에 있으면서 완전한 순결 생활을 실천하고 세례의 영적 생성으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육체의 반항을 제압하는 힘을 갖게 하고, 육체가 영광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토의 강생 이후에, 또한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동정은 이 세상의 현실과 육체적 굴레 속에서도 천사의 생활로 복귀하는 형태로 가능하게 되었다(290).

 

동정은 죽음이 없는 세계의 기본 요소이자 동시에 이 세계의 씨앗이다. 이 세계 속에 한 조각으로 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에서 형성된 천국의 현실에 접근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정은 이러한 현실과의 관계에서 영적 관계 들을 연결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결합의 형식이고, 동족관계의 방식이며, 풍요와 창조의 원리이다. 이것이 바로 동정의 기독교적 신비주의 신학의 가장 독특한 점이고, 또한 오래된 금욕의 개념에서 동정을 멀리 진전시킨 특징적인 면모이다(292).

 

기독교인의 동정은 고대의 철학적 윤리에서 잘 알려진, 또 그 고대철학의 윤리를 계승한 기독교 초창기의 근본적이고 과격한 형태의 금욕규범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298). 금욕의 원칙은 일반적인 규범이나 교훈의 소극적 형태로 표현된 반면, 동정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택의 형식으로 마련된 적극적이고 복합적인 경험을 나타낸다. 선택은 삶 전체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이다. 동정의 신비주의 신학은 세계의 역사와 구원의 초역사적 개념과 관련된다. 고대의 관점은 성관계, 욕망, 생식을 자연 세계의 한 구성 요소로 보았고, 그것들을 자연 세계와 연결시켰다. 세상이 완성되는 시대이기도 한 동정의 시대는 율법과 죽음과 성의 결합이 상호적으로 연결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다. 동정의 실천은 개인의 금욕과 자연의 메커니즘 사이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동정은 성적 욕망과 성행위, 성관계가 각각 분리되면서 증가한 온갖(299) 변화와 결합, 관계와 생식의 모든 것을 교회의 영적 형상 속에 투사하는 일과의 단절을 초래한다.

 

그레고리우스는 동정을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이고 열성적인 실천의 기술, 형식으로 이해한다(300). 또한 일종의 기술로 비유한다(303). 동정의 신분을 신성한 철학적 삶의 방식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기술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동정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행동의 지도가 필요하며 지도자의 역할과 교본의 가르침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304). 교본은 동정의 모델로서 우리의 삶에 모범이 되고 전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표나 목표로서의 의미를 말한다.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초월하고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며, 그들의 삶의 광채는 찬란한 신호등 같은 형태가 된다. 그러나 훈련과정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으며 지도자가 사용하는 기술과 규범과 충고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305).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