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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1. 성의 역사 4/ 2장 동정에 대하여/ [3] 동정과 자기인식 발제. 풍경
[3] 동정과 자기인식
동정의 생활에 대한 지도에서, 안키라의 바실리우스의 <<완전한 동정에 관하여>>와 카시아누스의 <<수도원 교육>>과 <<강연집>> 이 두 책은 문맥도 다르고 시사하는 내용도 다르지만, 4세기에 이루어진 ‘자기 테크닉’의 발전과, 동정의 실천에서 ‘자기 테크닉’이 갖는 자리의 의미를 증언하고 있다.
Ⅰ
안키라 바실리우스 책은 4세기 중엽, 358년 이전, 고행의 실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하는 실용서이다. 그리스도-배우자의 형상에서, 그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욕구 등을 기술하면서, 동정의 생활로 영혼은 염결한 상태가 될 수 있고, 현세에서 천사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두 시대 즉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결혼한 시대와 그리스도에 의해 동정의 순수한 생활 형태로 씨가 뿌려진 미래의 시대를 근거로 기술된 것이다.
이 책에서 그의 논의 목표는 선행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경지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여성들의 생활규범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책이 당시의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의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쓰였다는 것이다. 의학적 지식에 의거해서 육체와 영혼의 상관관계와 관련된 테크닉, 실행방식, 행동방식, 존재방식 등을 심사숙고해서 고안해 냈으며, 감각, 욕망, 심상, 추억의 문제 등이 타인에 대해 취해야 할 행동보다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즉 모든 몸치장은 보는 사람뿐 아니라 몸치장을 하는 여자의 영혼속에 감각, 심상, 욕망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바실리우스에 의하면, 동정의 기술은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고 한다. 첫째로 우리가 분리나 단절의 테크놀로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우선 자연적 욕망을 중단시키는 일이다. 여성과 남성은 존재론적으로 한 사람을 둘로 나눈 것이기에 상호적 이끌림이 존재하고, 또한 ‘생리적’ 비대칭으로 여자에 대한 남자의 성적 충동이다. 여기에서 여자는 수동적이지만 남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에 욕망의 단절은 여자가 이 힘을 중단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동정녀의 역할이다. 이러한 끌림의 감정을 단절시켜야만 형체가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인간에서 단절은 종의 번식과 관련된 성적 결합 욕구를 자극하는 쾌락을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그렇기에 다른 쾌락도 억제해야 한다. 쾌락은 불안을 초래하기에, 육체와 외부세계의 경계에서 모든 관리를 기울여 안전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시각, 청각의 관리술이 필요하다. 외부세계에 대한 육체의 문을 선별해서 열어주거나 닫고 있어야 하고, 촉각을 통한 접족을 차단, 원기 왕성한 육체의 움직임이 영혼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자기의 자리, 자기의 서열,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정해진 위치에 있어야 평화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방식들은 동정의 한 기술적 측면일 뿐이다.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 영혼 자체의 문제와 영혼이 자기에 대해 실행해야 할 작업에 관한 것이 있다. “영혼의 순결 없이 육체의 순결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설명은 매우 전통적인 주제이다. 이것이 논의 하는 바는 영혼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은 ‘대상이 사라져도 영상은 잔상으로 영혼에 남아 있다는 문제와 영혼 속에서도 행위가 저질러질 수 있고, 환상을 갖게 하여 영혼을 속일 수 있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다. 이러한 3가지 문제들은 양심지도에서 중요하며, 영혼속의 움직임이 흔적으로 남아 구체화되어 나타나거나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시선, 자기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들이 자기의 비밀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려고 애썼는지와 영혼 속에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얼마나 잘 지켜보았는지에 따라 영혼의 동정은 보장될 것이다.
그의 세밀하게 서술된 영적인 지도와 자기성찰과 같은 주제들은 이후의 저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푸코가 이책을 주목한 까닭은,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금욕의 원칙에서 나온, 영적 경험으로 정의된 동정의 실천이 육체뿐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관계, 감각의 열림, 육체를 매개로 한 쾌락의 움직임, 불안한 사유의 흔들림 등과 관련된 자기와의 한 관계유형으로 체계화되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동정의 실천이 감각, 영상과 잔상의 효과, 사유의 활동, 영혼 속에서 착각이나 일천한 수행과정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나 타인이 지각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문제가 되는 내적 인식의 영역과 통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동정의 실천은 타인의 권력과의 관계 속에, 그리고 개인의 예속화와 동시에 개인의 내면성의 객관화를 표시하는 시선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4세기 중엽, 사목활동이 정의되지 않던 시대에, 자기테크닉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동정의 원칙에서 금지된 성관계를 중심으로 거대한 영역(육체와 영혼, 감각, 심상, 생각들로 이루어진)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정의 원칙이 감각에 의한 대상의 포착으로부터 가장 비밀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육체와 영혼을 모두 관통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Ⅱ
카시아누스의 분석은 대체로 수도사의 실천과 관련된 내용들로 한정된다. 그가 제시한 규범들과 규칙들은 모든 형태의 성관계의 포기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에서의 생활형태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결혼의 신분보다 동정의 신분이 더 특권을 갖는다. 다만 동정의 신분을 미리 선택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논의를 전개한다.
카시아누스는 금욕과 정절을 구별, 두 용어에 담겨 있는 가치의 서열-금욕생활과 정절을 지키는 것은 다른 문제-을 강조하였다. 정절은 육체와 정신에서 순결하게 지내는 사람들만이 인정받았던 미덕의 상태로, 육체적 성욕의 모든 움직임과 굳이 맞서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 최후의 상태인 반면,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있는 한, 금욕적인 사람일 뿐이다. 이러한 쾌락, 육체적 공격은 영혼의 평화 속에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뜻의 결과로, 금욕과 달리 정절은 영적 의미를 갖는, 완전히 도달 할 수 없는 어떤 이상적 단계를 설정, 단순한 욕망의 절제를 하느님을 향한 상승의 움직임으로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힘으로 묘사한다.
카시아누스가 금욕과 정절 사이를 구별하는 방식에서, 실제로 현저히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이제 풍경을 지배하는 개념들은 ‘마음의 순결’과 ‘영적인 투쟁’같은 것들이다.
1. 마음의 순결.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하느님과 결합한 영혼은 더 이상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 상태로 고정된다. 영적인 결합에 마음을 빼앗긴 배우자는 명상의 대상과 일체가 되는 묵상의 행위이다. 수도생활의 목적은 묵상이자, 묵상 속에서(이론 속에서) 확립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려 노력하는 것이기에, 앎의 관계(하느님과 영혼사이의 관계를 맺게 하는 기초)를 숙고한다. 그때부터 정절은 동정과 같은 역할(순결성을 간직)을 하지 않는다. 앎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순결’이나 ‘정신의 순결’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즉 “동정-완전한 순결성-영적인 혼례의 관계”를 “정절-마음의 순결-묵상”의 관계로 대체한다.
정절과 앎의 관계는 그러므로 두 개의 축에 따라 발전한다. 한쪽에서 정절은 영적인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나타난다. 순수한 마음을 갖게 하는 정절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영적인 지혜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의 순결은 완전히 다른 방향의 지식-성찰 속에서 영혼 자체와 영혼의 심연과 감춰진 것을 향해 가는 지식-과 연결된다. 이러한 앎의 관계에서 순결은 조건이며 결과이기도 하다. 즉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자신을 집중적으로 경계하지 않는 다면 마음의 순결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시선이 내밀한 마음속까지 뚫고 들어와 빛을 전달하고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오직 순결 덕분이다. 즉 내면의 주의 깊은 성찰, 절대로 늦춰서는 안 될 경계, 지속적인 후회와 고백, 이 모든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자기 인식에 대한 이러한 고백의 중심에 있는 순환논리의 특성으로,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더욱 더 자기를 잘 알 수 있는 빛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한 앎의 조건이자 동시에 결과이기도 한 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과정과 하느님에 대한 인식으로 가능하게 된 자기 인식 없이는 영적 지혜를 향해서 가는 길을 이를 수 없다.
2.영적인 투쟁.
영적 투쟁의 본질적 요소의 은유적 표현인, 운동경기로서의 투쟁은 연습, 훈련, 자기극복의 의지, 자기 자신에 대한 극기 훈련, 자신 자신의 체력에 대한 통제와 절도를 전제로 한 고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과 싸우는 전쟁으로서의 투쟁은 타자와의 싸움으로 전개된다. 스포츠로서의 전투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면, 호전적인 전투는 환원 불가능한 이타성의 한 요소와의 관계인 것이다.
전투를 해야 할 적으로서 타자는 식탐, 성욕, 탐욕, 분노, 슬픔, 권태, 헛된 영광, 교만으로, 8가지 대상이다. 이것을 하지 말아야 할 규칙이나 위반하면 처벌받는 법률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생각의 유형론이다. 그 생각들이 계속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영혼의 평화를 방해하고, 영혼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한, 그것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악마의 소행이다. 그러한 생각들이 공격을 늦추거나 늦추지 않을 수 있는 문제, 또는 정념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니거나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로 결정된다.
카시아누스는 맞서 싸워야 할 8개의 적들을 지칭하며 귀신esprit이라 명명한다. 귀신은 육체안에서 자기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육체의 약한 부분에 자리 잡아, 생각, 심상, 기억 등을 유발하는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이 생각들은 영혼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이해될 수 있다. 악마는 이 귀신의 작용-즉 그의 유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거부하는지 –을 관찰할 수 있기에 유혹을 계속하고, 강화하고, 수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영적 투쟁에서 영혼은 이러한 신호들을 식별하는 것 즉 해석 작업이다. 카시아누스의 정절의 주제는 이러한 두 가지 원칙에 의해 지탱된다.
카시아누스는 정절을 위한 투쟁은 나중에 중세 교회가 재판권을 모델로 삼아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죄의 항목으로 포함시킨 간음의 문제를 특별히 정의, 정절의 문제는 사법적인 것이 아닌 다른 의미로 정의 하려 했다.
1. 간음을 식탐과 한 쌍으로 본성적 악덕이며, 육체의 관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서로는 인과관계에 있다. 이러한 연쇄적 현상은 하나의 악덕과 의존관계에 있는 다른 악덕을 이겨 내지 못할 경우, 어떤 악덕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탐을 무찌르고, 간음을 종결 짓는 방법으로 단식의 고행은 중요하다. 단식의 고행이 고행 훈련의 기본인 까닭은 그것이 인과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음은 육체와의 승리에서 갖는 교만과도 연관성을 갖는다. 그래서 간음을 제거하는 일이 우리를 육체 안에 머물면서 육체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이것은 성직자들이 육체적인 타락에서 자유로워진 다음에 가질 수 있는 구원의 약속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2. 간음은 육체적 결합에서뿐 아니라, 접촉하지 않고도 비롯되며, 영혼의 깊은 곳에서 육체적 정념이 없이도 자라는 리비도이다. 그렇기에 정절을 위한 투쟁의 핵심은 행위나 관계의 차원에 있지 않은 어떤 목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절의 전진은 의지를 빼앗기는 움직임에서도 그것의 영혼에 침입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는 것이고, 관능적인 생각을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며, 욕망을 유발하지 않는 상태, 즉 욕망이 생기지 않는 순수한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전혀 영향을 받지 말아서 유혹의 환영도 떠오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영적 투쟁에 관한 작업과 카시아누스의 정절의 진전 상태는 ‘의지의 관여를 분리하는 일’로 이해된다. 이것은 쾌락의 절제와도 다르고, 엄격히 제한하는 일도 아니다. 또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자는 생각도 아니다. 즉 생각의 움직임을 축발하는 요소들에 대해서 “어떻게 주체가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무의지적인 의지의 형태로, 끊임없이 생각의 움직임에 관여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가?” 의지의 관여를 육욕이라 이름 부여, 영적인 투쟁이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러한 육욕이고, 이러한 투쟁에서 계속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분리의 일이자. 관여의 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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