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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결혼과 동정은 선과 악처럼 구별되는 것도 아니고, 두 개의 등가적 재화처럼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들은 보다 큰 좋은 일과 보다 작은 좋은 일로 비교하고 측정하고 분류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p. 416)

 

아우구스티누스의 결론: 결혼이 악이 아닌 한, 그것은 금지시킬 수 없다. 또한 동정이 아무리 우월하다 해도, 그것은 강요될 수 없다.

 

만일 동정이 만인을 위해 제정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일 뿐이라면, 그리고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동정을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동정이 어떤 평안을 가져다준다면, 결혼은 필연적으로 현재의 시간을 위해서 존재한다.(p. 417)

 

결혼생활의 규범을 작성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올바른 결혼생활의 품행을 정의하면서, 이것을 욕망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감행할 힘도 없고 용기도 없는 기혼자들이 욕망을 관리할 수 있는 특별히 나쁘지 않은 행동으로 정의한다.(p. 420)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텍스들이 정확하게 이와 같은 방향을 따른 것은 아니다.

 

결혼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지만, 동정과 같은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결혼은 가치가 높지는 않더라도 자기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결혼과 결혼에서 지켜야 할 규범, 올바른 품행의 기술적 문제에 대한 성찰의 요점을 작성한다.(p. 421)

 

아우구스티누스의 최종 목표는 동정의 수련과 결혼의 실행, 그것들의 긍정적 측면과 가치의 차이를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전체의 틀을 정의하는 것이었다.(p. 422)

 

아우구스티누스의 강조점이 결혼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결혼을 동정보다 우월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의 가치를 통해 결혼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결혼의 긍정적인 좋은 점을 정의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결혼이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 해도, 또는 동정이 아무리 신성한 가치를 갖는다 해도, 결혼과 동정보다 더 우월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의 공통성으로 결합되고, 또한 교회의 일체성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p. 423)

 

전제로 해야 할 것은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단순 비교하는 일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가 있는 상호 관계를 고찰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생활방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교회가 구성하는 공동체 안에서 결혼과 동정의 필연적인 관계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p. 424)

 

오리게네스, 메토디우스, 크리소스토무스,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동정(모든 결혼을 거부)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상호관련성 결과이자 동시에 조건이고, 보상이자 동시에 보증이다 의 관계로 갖고 있었다.

동정, 결혼, 영적인 수태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함. 그 이유는 이러한 관계들이 그리스도와 동정-약혼이라는 상호관계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하느님과 교회, 교회와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신자들, 신자와 모든 공동체 생활자들, 이들의 모든 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동정에 관하여

결혼과 동정, 동정과 모성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상호관련성은 동정의 혼례로 영성결합을 이룬다.”(p. 426)

 

결혼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영적인 결실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태어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오직 인류일 뿐이다. 인류가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사의 영적 작용에 의해서일 뿐이다. “부부생활에서 육체에 의해 자녀를 낳게 되는 여자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담의 어머니가 된다.”(p. 430)

 

대부분의 기독교인 해석학자들은 천국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했고, 타락 이전에 최초의 부부가 육체관계를 갖게 됨에 따라 물질적으로 생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부정했다.

 

그렇다면 왜 천지창조부터 성의 차이가 표시된 것이며, 하느님은 왜 남자와 여자에게 번식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인가? 그레고리우스는 예지력이 있는 하느님이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한다.(p. 432)

 

인간으로 하여금 생식을 부추긴 것은 종의 영속에 대한 욕망이다. 성행위는 그러므로 결과로서건 수단으로서건, 성행위를 부추기거나 초래하는 일련의 4가지 요소들 욕망, 타락, 죽음, 생식 의 일부를 이룬다.(p. 433)

 

이러한 해석의 틀 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변화와 분리의 작업을 실행한다. 그는 타락한 세계로부터 창조주의 손에서 만들어져 나온 그대로의 천국 생활까지, 성적 결합이 아닌 결합의 합법적 가능성을 찾아서 거슬러 올라간다.(p. 433-434)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적인 것이 아닌 생식의 3가지 모델을 설정한다. 3가지 모두 육체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첫 번째는 하느님이 최초의 남자와 최초의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서 그리스도의 신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무신론자들에게 당연한 논리로 말하는 꿀벌의 번식 같은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다 보면 하느님은 최초의 부부가 성관계를 맺지 않고서도 육체적으로 생식능력을 갖게끔 만들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p. 437-438)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손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계율을 단순히 천국에서의 생식이란 의미에서 적용하기 위해서 이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타락 이전에, 죽음의 문제를 떠나서, 죽는 사람들의 자리를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는 상관없이, 인류의 번성은 반드시 추구해야 할 과제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p. 442)

 

한 사람의 몸으로부터 출발해서 번성이 이루어짐으로써, 인류는 하느님이 원하는 대로 땅의 표면을 덮을 수 있게 되어, 태초에 창조주가 인류의 특징을 나타내고 싶었던 그대로의 일체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이 문제에 관한 성서의 기본적인 3가지 소재를 양성의 창조, 증가와 번성에 관한 명령, 남자를 위한 협력자 역할로서의 여자의 배속으로 나눈다면, 이전의 해석학자들은 앞의 두 가지 소재를 해석하는 일에만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 같다.(p. 443-444)

 

그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가 분석자료로 삼은 것은 바로 이 3번째 요소이다. 그는 가능한 한, 이러한 협력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천착하고, 죄의 여부를 떠나서 타락 이전에 남자-여자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정의하는 문제에 노력을 기울이고 그들의 결합 형태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려 했다.(p. 444)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초의 부부 사이에서 이루어진 결혼이 영적 관계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했다.(p. 445)

 

올바른 결혼생활의 권위를 근거 삼아 우리는 결혼의 이점과 목적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관련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혼으로 보장되는 이점들은 생식과 출산, 그리고 배우자들을 결합시키는 믿음, 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성사 등이다. 이것들은 결혼의 목적으로서 결혼의 사용법을 체계화할 수 있고, 성관계의 금지와 허용, 즉 육욕에 대한 대책과 생식을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p. 447)

 

나중에 쓴 다른 텍스트의 어떤 구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김없이 결혼의 두 가지 목적을 말한다. 하나는 자녀를 낳기 위하여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이다.(p. 447-448)

 

우정은 그것의 특성 때문에 인간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목적이라는 것, 개인은 사실상 인류의 한 요소이고, 부분이라는 것, 개인은 그 자체로 인간이면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한 요소나 부분으로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전체와 우정으로 연결될 수 있고, 개인이 이러한 우정의 관계들을 형성하고 증가시키고 또한 튼튼하게 확립할 수 있는 한, 결혼은 바람직한 것이다.(p. 449)

 

아우구스티누스가 결혼과 부부관계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내고, 여기에 상당수의 결정적인 요소들을 도입한 근거는 이러한 공동체와 우정에 대한 견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본질적으로 3가지이다. 구원의 일반논리에서 결혼의 역할, 부부관계의 본질, 부부의 성관계에 대한 조정 원칙이 그것이다.(p. 449-450)

 

동정과 부부생활이 모두 자기 자리와 자기 역할을 갖고 전체를 구성할 수 있을 때, 이것은 개별적으로 좋은 것보다 전체가 훨씬 더 좋다는 원칙에 의해서 결합된다.(p. 452)

 

결혼이 언제나 같은 형태, 같은 역할, 같은 의무를 갖지 않고, 또한 늘 같은 방식으로 동정과 대립해 있지 않은 까닭은 타락 이전과 이후에, 그리스도가 강림하기 이전과 이후에, 인류가 미래의 천국을 지향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p. 453)

 

2. ‘공동체에 부여된 특성은 관계의 개념에 중심을 맞춘 결혼의 특징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계의 가치가 결혼이란 합법적 형식으로 허용되는 1) 자연적 생식행위 때문인가, 아니면 부부를 동등한 입장의 관계로 만드는 2) 법적인 구조 때문인가? 부부관계는 친척관계를 갖는 조건인가, 아니면 계약의 결과인가?

 

1) 인류의 전체와 인류의 목적지를 고려하면, 결혼의 필요성은 자손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부부관계를 그 자체로 한정해서 두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으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자손이나 출산에 종속되는 관계일 수 없다.(p. 454)

 

2) 올바른 결혼생활은 이러한 부부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법적 의미가 내포된 계약이나 합의라는 이름을 합법적으로 부여한다.(p. 455)

 

(법적인 혹은 계율적인) 이치는 물론 정의와 다르지 않고, 종종 정의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신의의 실례가 보여 주듯이, 정의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의는 개인 간의 계약을 떠받치는 근거로서, 우리가 얼마나 엄격히 지키는가에 따라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신의가 언제나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p. 457)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한 사례들(p. 458-459)은 순전히 법적 관계라는 것과 신의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의에는 단순히 합법적 의무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p. 459)

 

믿음이 기독교인들의 결혼에만 해당되는 것은 그 자체로 성사이기 때문이다.(p. 460)

 

결혼과 사제서품은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성사에 의한 표시의 흔적은 영원하다. 이러한 표시는 하느님이 보증한 증거와 표시의 흔적으로서, 하느님 자신이 배우자를 자기 앞으로 소환할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개인을 결혼 상태에 묶어 두는 것에 가깝다.(p. 461)

 

올바른 결혼생활에서 기술된 것과 같은 결혼관계가 법적 관계와 다른 것은 충실한 사랑성사라는 두 가지 방식에서이다. ‘충실한 사랑성사는 부부 중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을 보장하는 데 한정되지 않고, 어느 한 사람을 공동체 안에 들어가게 만드는 일을 하는 한, 결혼의 이점들이 될 수 있다.(p. 461-462)

 

 

3. 올바른 결혼생활은 결혼의 세 번째 좋은 일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다.(p. 462)

 

성사나 신의는 결혼관계의 본래적 특징이고, 본질적으로 결혼관계의 일부를 이룬다. 생식은 결혼의 한 결과이거나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p. 464)

 

자손이 없다면 부부관계는 그것만으로 인류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사회를 발전시킬 수 없다. 자손은 그것이 개인들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결혼의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손은, 성사와 사랑의 충실성과는 달리, 인류의 범위 안에서 개인들의 일체성을 이루게 하는 필수적 성격에 따라, ‘유일한목적이 된다.(p. 464)

 

아우구스티누스가 결혼을 통한 두 개인의 결합에서 남녀 간의 행위의 의미를 배가한 원인에 자손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우그스티누스의 분석을 무조건 자녀출산에 대한 가능성과 당위성의 논리에 성관계를 예속시킨다고 보는 것은 잘못일지 모른다. 그에게는 결혼과 성관계와 자녀출산이 하나의 집합체로 연결되어 있기는커녕, 상호 간의 분리와 차이도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p. 464-465)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행위의 관습을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성행위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성행위의 유용성이 갖는 본래의 자연스런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한다.

 

성행위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모든 형태와 모든 경우의 성행위가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허용을 제한하는 첫 번째 형태는 일반적으로 절제와 모든 무절제의 거부를 규정하는 것들이다. 절제는 자연적 관습에 따른 몸가짐에 의해 정의된다. 이러한 자연적 관습과 관련하여 인간은 두 가지 유형의 죄를 범할 수 있다.(p. 466)

 

첫 번째 유형의 죄는 단순히 양적인 무절제로서 번식의 필요성을 넘어서”, 오직 자연적성행위에 필요한 일이 아니라, 그 행위에 곁들여서 또는 행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몸짓과 쾌락에 관련된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은 종의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여자의 몸의 한 부분을 사용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는 반 자연적 행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성행위에 관한 다른 조절 원칙을 적용한다. 부부 사이의 이 조절 원칙은 생식의 목적이 아닌 성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 이것은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혼외정사에서건 자연의 법칙을 위반해서건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p. 467)

 

아우구스티누스가 성행위를 소유권의 직접적 결과라는 표현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부부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을 요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절대적 지배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입장에서 죄를 지을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어떤 일반적 결론, 즉 그 누구도 상대편의 동의 없이 금욕을 계속 고집할 수 없다는 논리를 이끌어 낸다.(p. 468)

 

부부간의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배우자가 적어도 무거운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동의하는 범위에서 기혼자의 신분으로 지켜야 할 규범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이상, 그의 행위는 어떤 가벼운 죄도 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부부간의 성적 의무를 요구하는 사람은 어떤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집요하게 그러한 성적 의무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욕망의 표현에 대해 성 바오로가 관용을 보여야 했다는 것을 말한다.(p. 469)

 

부부관계가 양쪽 모두 서로 간의 육욕 때문에 실행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격한 결혼 규범과 어긋나는 일이고, 따라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용서받을 만한 죄의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가능하다. 부부가 정숙한 행동을 유지하고, 자손의 출산과 의무의 이행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p. 470)

 

올바른 결혼생활에서 제시된 어떤 제안들은 수정하거나 완전히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안들은 결혼생활에서 성관계가 질적으로 변화되는 방식과 성관계로 인한 쾌락과 관련된다.

 

첫 번째 구절은 리비도의 절제에 관한 것이다.

부부관계는 육욕의 악을 선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성적 쾌하감이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도 생식의 의지가 내면적 절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된다. “부부관계는 흥분이 고양된 상태에서도 쾌감을 억제하고, 격정 속에서도 일종의 조심성을 유지하고, 부자관계라는 생각으로 흥분을 진정시킬 수 있다. 부부관계는 실제로 남자와 여자가 합치되는 순간, 그들이 앞으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고 생각하면 쾌감의 절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엄숙한 기운이 뒤섞이게 되는 법이다.”(p. 471)

 

우리는 예언자들의 결혼에서 성사가 모든 육욕의 흔적을 지워 버린 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결혼에서 육욕은 약화되고, 감소되고, 변화되었다고 도식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형태와 가능성은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아 있는 까닭에,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부부의 성관계를 규범화하려고 했던 몇 가지 요소들은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또한 결혼생활에서 육욕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도 여전히 문제이다.(p. 473)

 

생활과 부부관계의 테크닉을 원리에 이르기까지 정의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은 육욕의 이론과 욕망의 관리술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테크닉을 확립하기 위해 타락으로 인한 성관계의 차이를 정의하려 한다. 또한 타락한 인간의 내면에서 성욕의 고유한 형태를 규명하려고 했으며, 리비도와 리비도의 사용법을 엄격히 구별하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서양의 기독교 모럴을 심층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욕망의 인간에 대한 일반적 개념과 동시에 성행위에 대한 섬세한 결정권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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