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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의 권력 옮긴이 해제 뒷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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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신병원의 공간=규율권력의 공간
셋째, 욕구의 창출, 유지, 갱신이라는 절차가 사용된다. 뢰레는 뒤프레씨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그 보수를 강제로 받게 한다. 뒤프레씨가 거부하면 그 벌로 음식물을 받지 못한다. 간호사가 음식물을 몰래 가져다 주는 대가로 보수를 지급하고, 설사약이 들은 음식을 먹고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또 보수를 지불한다. 이렇게 해서 의학적 권력을 통해 요구-노동-금전이라는 회로가 형성된다. 당시 정신병원에서는 식사의 양도 평균 이하였고, 벌칙으로 식사를 박탈하는 수단이 사용되고 있었다. 노동의 대가로 평균을 밑도는 보수가 지급되었고, 이 보수는 욕구를 채우기에는 충분한 금전이었다. 뒤프레씨에게 무리하게 적용한 전술은 몇 가지 효과가 있었다. 1) 욕구가 생기면 욕구되고 있는 것의 현실이 지각되는 효과이다. 2) 욕구하는 것, 즉 결여를 자각함으로써 광기의 지상권이 부정하려 했던 바깥 세상의 현실이 지각되는 효과가 있다. 이 바깥세상은 치유하면 들어갈 수 있는 세계로 지각된다 3) 이런 정신병원이 만들어낸 결여상태가 자신이 광인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광기의 현실이 지각되는 효과이다. 4) 욕구-결여의 존재로 인해 광기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권력, 규칙, 명령에 순종하면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넷째, 환자에게 진실을 말하게 하는 절차가 사용된다. 뒤프레씨는 병원에서 보이는 파리의 거리를 보며 파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냉수를 뒤집어쓰게 되면 무엇이든 인정하는 상태가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냉수를 뒤집어쓰는 요법을 반복해서 당하고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쓰도록 강요당하면 과거의 내용에 대한 자서전을 쓰게 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진실은 무엇일까? 1) 지각적 수준의 진실이 아니다. 뒤프레씨가 파리를 파리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2) 뢰레가 ‘진실’이라 간주하고 뒤프레씨에게 1인칭으로 이야기하게 하는 것은 어떤 자기동일성(정체성)이다. 3) ‘진실’로서의 자기동일성은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이다. 환자가 이걸 자기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진실’로서 고백하며 이 전기에 자신을 동일화시킬 때 치유는 시작된다.
이 ‘진실’을 획득한 후 뢰레는 뒤프레씨를 퇴원시키는데, 현실세계에 그를 위치시킴으로써 외부현실이 환자를 더 확고하게 지배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또한 뒤프레씨로부터 ‘광기’의 쾌락을 박탈하는 데 있었다.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은 아무리 가혹한 치료를 받더라도 마음껏 망상 할 수 있다. 뢰레는 퇴원시킴으로써 광기의 쾌락을 빼앗았다. 이런 치료는 어떤 메커니즘에 따르고 있을까?
1)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으로 지탱되는 규율화의 메커니즘이다. 환자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언어는 의사가 사전에 소유하고 있고, 일방적으로 환자에게 부과하고 있는 언어이다.
2) 정신병원=현실의 동어반복적 관계의 메커니즘이다. 치유가 의미하는 것은 현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승인하는 것이다. 정신병원은 치유를 행할 때 현실 속에서 더 강화된 현실로서 현실이 ‘광기’에 뻗치는 촉수로서 작용한다.
3) 정신의학의 지식과 실천은 단절되어 있다. 정신병원은 관찰에 기초해서 객관적인 정신의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장이었다. 그러나 치유에서는 치유의 이론도, 치유를 설명하려는 시도도 없고 전술적 조작의 일람표만 있다.
두 가지 질문
A. 현실의 꼭두각시이면서 강화된 현실이기도 한 정신병원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메커니즘은 어떤 것일까?
B. 정신병원에서 이 권력이 발생시키는 ‘의학적 지식’이 치료의 실천과 관계가 없는데도 정신병원이 행사하는 권력과 연결되어 있는가? 정신병원은 왜 의학적 공간이어야 하는가?
ð 정신병원을 지배하는 권력은 규율권력이다.
규율권력의 특성
1) 규율권력은 “개인의 신체, 몸짓, 시간, 품행을 총체적으로 포획”한다.
2) 규율장치 내에서 각 개인의 위치는 고립되어 고정되어 있다. 그 후 지속적으로 통제를 받게 된다.
3) 규율 권력의 원활한 행사를 위해서는 문서기록의 활용이 중요하다. 문서기록은 아래로부터 위로 정보를 전달하고 이 정보에 항시 접근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편재적인 가시성의 원리’를 확보한다. 이런 가시성으로 인해 규율권력은 매우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다.
4) 규율권력은 동위체적이다. 여러 규율적 장치들은 서로 연동될 수 있다.
5) 규율권력은 필연적으로 잔재와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 인해 보충적 규율체계가 나타나고 거기서 생기는 잔재를 회수하기 위해 또 보충체계가 탄생한다. Ex) 학교.
6) 규율체계는 스스로 작동하는데, 그 책임자는 더 큰 체계의 내부에 포획되며, 이 체계 안에서는 그는 규율화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규율권력은 얼굴 없는 익명의 권력이다.
(민주적으로 작동한다는 조직들의 운영원리도 그러한 것 같다)
이런 규율장치가 19세기에 일반화된 이유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축적과 노동력의 합리적 배분이 가능해지기 때문에다. 이는 세 가지 형태로 획득된다. 1) 규율화를 통해 개인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실업자를 남겨놓을 필요가 있다. 2) 다수 개인들의 노동력을 적절히 배분하면 여러 단일한 노동력의 총합과 적어도 같거나 가능한 한 상회하게 만드는 성과가 획득된다. 3) 노동시간, 습득을 위한 시간, 향상을 위한 시간, 지식과 적성의 획득을 위한 시간의 누적을 가능케 한다.
정신병원의 치료장치는 이 규율체계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1) 환자를 시간의 분할에 따르게 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법에 따르면서 무질서로 향하는 자신의 경향에 저항하도록 강요”하는 치료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2) 광인은 항상 감시되어야 하는 자이지만 또 자신이 “언제나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이 치료의 가치를 갖는 자이다. 3) 고립의 원칙이 치료의 가치를 가진다. 환자에게 주변 사람들이 실제 광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환자는 ‘광기’를 이해하게 된다. 환자를 집단적 효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고립을 달성할 수 있다. 4) 처벌도 치료의 가치를 지닌다. 처벌은 직원에 의해서도, 기구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처벌기구의 성격은 ‘호메오스타시스적’인데, 저항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고, 도망치려고 할수록 괴로워진다.
정신병원은 병영, 학교, 작업장, 대농장 등의 다른 규율체계와 동형적이다. 정신병원의 치료는 환자의 신체에 규율의 습관화를 부과하는 점증적인 훈련, 훈육이다. 치유된 환자는 병영, 학교, 공장 등의 다른 규율체계이다. 즉, 정신병원은 동시대의 거대한 규율장치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잔재’를 다시 규율화하는 장치이며 사회 전체를 포위하고 잇는 규율장치의 한 부분이다.
10. 정신의학의 ‘지식’과 정신병원의 치료적 ‘실천’
정신병원이 다른 규율체계와 다른 점은, 정신병원이 의학적 공간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정신병원은 왜 의학적 공간이 되어야 했을까?
정신병원은 ‘광기’에 관한 의학적 지식과 담론이 생산되는 공간이었다. 광기를 정의하고 임상적 다양성을 구분했다. 조광증과 만성우울증을 구별하고, 조광증과 편집증을 구분하며, 조광증과 치매를 구별한다. 그래서 정신병원은 ‘광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치료에서는 전혀 활용되지 않았음에도 왜 의학적 지식이 필요했을까? 푸코에 따르면, 지식의 표식이 합법적으로 부여하는 보충적 권력효과 때문이다. 의사가 몸에 두른 ‘지식의 표식’은 정신병원 내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었을까?
1) 심문기술 내에서 의사의 지식이 사용된다. 심문은 환자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행해지지만, 그것을 매우 의미 있어 보이는 질문을 통해 은폐하고, 의사가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의사-환자 사이의 비대칭적 힘의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2) 항상적 감시에 기초해 환자에 관한 항상적 기록의 작성이라는 형태로 기능한다. 입원환자에 관한 정보를 기재하고, 의사가 항상 이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듦으로써 환자에 대한 의사의 ‘지식의 표식’의 구성에 도움을 주고, 질병분류학적 지식의 생산에도 도움을 주며 다시 ‘지식의 표식’을 구성하는 데 가세한다.
3) 처벌과 치료의 이중적 작용에 지식이 활용된다. ‘광기’의 쾌락을 탈취하기 위해 치료를 처벌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처벌을 치료라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알고 있다’고 간주되는 것이 처벌행위를 치료행위로 만들고, 치료행위를 처벌로서 사용하는 것을 의학적으로 합법화하는 것이다.
4) 정신병원에서 최대의 ‘지식의 표식’은 의사가 학생 앞에서 환자를 전시하며 행하는 임상강의이다. 임상강의는 의사가 의사임과 동시에 의학적 진실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제시하는 장이었다. 그 장점은 다음과 같다.
A. 환자가 의사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의사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있지만, 많은 학생들이 의사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다수의 청중의 존재로부터 의사의 말은 더 권위를 갖게 된다.
B. 임상강의에서 의사는 환자에게 심문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 앞에서 환자의 대답에 주석을 달아보이며, “자신이 환자의 병에 대해 여러가지로 알고 있다는 것, 학생들 앞에서 그것에 대해서 말하거나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환자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게”된다. 이를 통해 의사의 권력을 다른 방식으로 강화한다.
C. 의사는 학생들 앞에서 증례를 전반적으로 상기시킨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인생이 ‘병으로서’ 제시되는 것을 본다.
D. 자신의 삶이 병으로서 제시된 환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놀라움과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에 때로 의사에게 협력적이 되고, 의사의 이야기를 보완한다. 즉, 그 병을 통해 의사에게 협조하게 된다.
임상강의에는 정신병원의 치료장치가 현실을 보충하는 요소들이 모두 발견된다. 환자를 타자의 권력에 복속시키고, 강요된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하며, ‘광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백하게 만들며, 보수와 교환의 회로로 환자를 투입한다.
‘지식의 표식’이 갖는 기능은 의사를 ‘알고 있는’ 자로서 환자, 학생, 정신병원을 둘러싼 법적, 행정적 권력 앞에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사는 규율권력을 의학적 권력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의학의 ‘지식’은 정신의학의 규율권력을 보강하기 위해 채용되고 있다. 또한 ‘지식’은 정신의학 또한 의학이라고 인정받기 위해 사용되었다. 병리해부학이 발달하면서 신체질환에 대해서는 질환의 감별진단이 확립되었지만 정신의학에서는 달랐다.
1) 정신의학에서는 ‘광기인가 아닌가’가 중요했고, 정신의학이 행해야 하는 진단은 절대진단뿐이다.
2) 정신의학에는 신체가 부재했다. 광기인가 아닌가의 진단만 있을 뿐이다. 의학적 지식이 광기가 현실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지점에서 필요했다. 이는 광기의 존재를 어떤 개인에게 인정케 하기에 충분한 ‘증상’을 필요로 한다. 이런 ‘현실성의 시련’은 두 가지 작용을 한다.
A. 가정이 있는 사람의 수감을 원할 때, 수감의 동기가 되고 있는 것(언행 등)을 광기의 ‘증상’으로 치환하고, 이 증상을 보이는 광기를 ‘정신질환’으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가 시험된다.
B. 이렇게 수감을 결정하는 진단행위가 의학적 행위인지 아닌지, 이 행위의 주체가 의사인지 아닌지도 시험된다. 환자로부터 ‘증상’을 추출해내야 병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런 현실성의 시련은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싸움으로 나타나고, 정신의학이 의학이 되기 위해서는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19세기 중반까지 정신의학에는 ‘광기’를 현실화하기 위한 세 가지 기술이 있었다. 심문, 마약, 최면술이다. 이 세가지가 정신병원 내부에서 규율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심문의 절차
1) 심문은 전력(과거력)의 탐구를 포함한다. 이는 정신의학에 부재하는 병리적 신체를 유전적 신체로 대체하기 위한 절차이다.
2) 심문은 전구증상이나 체질적 징후, 개인적 전력의 탐구라는 절차를 포함한다. 이는 ‘광기’가 광기로서 발현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절차이다.
3) 심문 내에는 의사와 환자 간의 암묵적 거래가 존재한다. 환자가 수감의 동기가 되는 것을 증상으로 제시해준다면 이를 통해 의사는 의사가 될 수 있고 그 대가로 환자는 법적이거나 도덕적 탄핵을 면할 수 있다.
심문의 규율과는 다른 기능
1) 심문은 병리적 신체와 징후의 집합을 구성하고, 수감의 동기에 입각해 증상을 만들어내며 최종적으로 이 증상을 현실화한다.
2) 심문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래, 증여와 반대-증여를 통해 삼중의 현실화를 획득하는 역할을 한다. 즉, 어떤 행동을 광기로서 현실화하고, 이 광기를 질환으로서 현실화하며, 최종적으로 의사를 의사로서 현실화하는 삼중의 역할을 담당한다.
심문의 결함
1) 심문은 언어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밖에 없다. 즉, 환자가 저항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11. 마약, 최면술, 그리고 감별진단의 꿈
심문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의학이 마약을 사용했다. 모로 드 투르는 하시시의 단계적 중독 증상이 정신질환의 증상과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광기’의 여러 증상들은 동일한 계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여러 단계를 거치며 진전하는 하나의 ‘광기’만 있게 된다. 광기의 모든 발현형태를 포괄하고 있는 하시시 중독 증상을 검토함으로써 ‘광기’의 시작지점을 발견할 수 있고 현동화할 수 있게 된다. 모르 드 투르는 그것을 “최초의 지적 변형”, “본원적 변형”이라고 불렀다. 이 말을 통해 모르 드 투르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명명되는 지적 합성물의 붕괴이며, 그것의 명백한 해체”이다. 하시시를 이용함으로써 의사는 광기를 이해하고 복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광기는 내면으로부터 공략당한다. 모르 드 투르는 조광증 환자에게 하시시를 투여하며 흥분을 고조시키면서 광기를 더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며 환자가 치유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요법은 심문의 자동화라고 할 수 있다. 환자는 광기를 몸으로 재현동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시시의 결함은 의사가 아직 환자의 신체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동물자기와 최면술.
동물자기는 환자를 온순하게 만들고, 직관력이나 통찰력을 발휘하게 한다고 인식되고 있어서 사용되었지만, 동시에 그런 능력이 의학에 위협적이어서 퇴출되었다. 제임스 브레이드는 자기요법을 최면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시켰다.
1) 그 모든 효과를 의사의 의지에 복속시킨다.
2) 최면술은 환자의 의지를 전면적으로 무력화시켜 정신의학의 권력과 지식이 ‘광기’에 침투하는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었다.
3) 의사는 최면술을 통해 환자의 신체를 직접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의학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환자의 신체에 개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신의학의 ‘지식’은 환자의 신체에 행사되는 권력을 통해서만 생산된다.
12. 장-마르탱 사르코와 히스테리
히스테리는 정신의학을 곤경에 빠뜨린다. 히스테리는 명확히 기질적인 손상에서 기인한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는 증상의 명시를 통해 질환의 현실화의 요청에 부응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강하게 “발작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명령에 저항하고 있다. 히스테리 환자는 가장 명시적이고 가장 잘 한정된 징후를 격화시킴으로써 그 병을 현실로서 지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병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실제로 현실화될 수 없다. 즉, 발작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광기와 같은 것이 나타난다. 광기가 광기를 위장하는 방식이 된다.
신경학은 임상의학이나 정신의학과는 다른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성립시킨다. 환자의 신체를 자극-반응에 기초해 분석함으로써 행동을 계층화시킬 수 있고, 신경학의 임상은 환자를 그 의지의 수준 그 자체에서 포획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경학에서는 임상의학과 비교해서 더 많은 명령이 환자에게 내려지지만, 의사의 권력은 환자의 신체적 반응의 해독을 통해 회복된다. 환자의 행동에 대한 임상적 소견에서 환자의 의지를 포착할 수 있다. 신경학이 발달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던 신경증의 ‘병리학적 구별’이 가능해지고, 히스테리 환자는 신경증의 치료장치에 편입된다. 이는 의학적 권력과 히스테리의 권력 사이에 새로운 전투가 개시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전투는 어떤 절차를 거쳐 수행되고 어떤 귀결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1) 징후학적 시나리오의 조직화를 거친다. 히스테리가 병이기 위해서는 히스테리 환자가 안정된 징후의 총체를 제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의사는 의사로서 존재할 수 있고 환자는 병자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2) ‘기능적 마리오네트’의 술책을 거친다. 의사에게 있어서 과잉적인 회답-반응은 통제의 틀을 넘어서므로 과잉을 피하기 위해, 최면상태에 있는 환자가 암시에 따라 의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반응을 보이도록 조작했다. 그러나 이것을 병이라고 할 수 있냐는 문제가 생겼다. 의사는 이런 최면상태에서 발생되는 증세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3) 외상을 중심으로 한 증상의 재배치 절차를 거치게 된다. 히스테리 환자가 의사가 명령하는 대로 증상을 재현한다면, 히스테리가 의사에 의해 만들어진 병이라는 증거이다. 따라서 히스테리의 현상과 외상성 기능장애의 현상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병인론이 필요하게 된다. ‘외상성 장애’는 일종의 장기적인 최면상태이고, 그 사건으로 인해 환자는 항상적인 암시로서 기능하는 게 생긴다. 환자가 진정 히스테리 환자라면 ‘외상성 사건’이 반드시 있고, 그로부터 의사는 ‘외상’을 찾게 된다. 환자는 자기의 삶 전체, 자신의 성현상 전체, 자신의 추억 전체를 마구 끌어내고 있었고, 자신의 성현상을 병원 내부에서 재현동화하고 있었다.
히스테리 환자가 신경학적 신체로 대치한 이 성적 신체는 히스테리를 병리학화하려는 의학적 조작에 환자가 보내는 ‘대항적 술책’이다. 그러나 이 성적 신체는 다시금 정신분석에 의해, 의학이나 정신의학에 의해 새로운 공략의 대상이 된다.
13. ‘탈정신의학’ 운동과 ‘반정신의학’ 운동
푸코와 카스텔은 정신의학이 의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점유하는 권력의 장치라는 사실에 서로 동의하고, 또 정신의학이 숨기고 있는 사회적 통제와 조작의 위험성을 일제히 고발한다. 카스텔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강력하게 정신의학화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확증에 입각해 탈정신의학화의 문제가 제기된다.
<광기의 역사>는 반정신의학 운동의 핵심적인 텍스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반정신의학 운동은 1960~70년대에 정신의학과 그것이 수반하는 제도적 폭력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반정신의학
1) 반정신의학은 광기를 오직 정신과 의사만이 그 과학적 진실을 보유하고 있는 병리현상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2) 반정신의학은 향정신성 의약품에 의한 치료나 억압적 성격의 치료를 거부한다. 따라서 반정신의학은 광기를 실존의 위기, 불안으로 간주하고 그 원인을 환자의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병원 제도를 파괴하려는 것이 반정신의학의 핵심 과제였다.
<정신의학의 권력>에서 푸코는 반정신의학을 “제도에 의한, 제도 내에서의, 제도에 반하는 투쟁”이라 정의한다. 반정신의학의 공로는 1) 의료제도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 2) 광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끝까지 표현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 3) 광인을 의학적 위상으로부터 분리시켜 그를 감금하는 제도적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광기’란 무엇인가. 토머스 사스에게 광기란 “생활에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강요된 의학적 오해”이다. 바잘리아에게 ‘광기’는 ‘소외’와 ‘억압’의 용어로 논의된다.
푸코가 반정신의학을 높게 평가한 이유는 “광기는 정신질환이 아니다”라는 관점이 이미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가 한 주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광기를 병리학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관점이 정신의학 권력의 비판에 열어준 완전히 새롭고 광대한 전망 아래서, 반정신의학의 문제의식은 <정신의학의 권력>에서 푸코가 보여주는 문제의식과 확실하게 겹친다.
1) 정신의학 권력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비판이 가능해진다. “광기는 정신질환이 아니다”라는 관점은 정신의학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기능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2) 실천적 비판이 가능해진다. 반정신의학 운동을 통한 광기의 탈-의료대상화의 실천은 ‘광기’와 정신의학적이지 않은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곤란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불리고 있어요. 그들이 작은 공동체를 형성해 ‘조정자’라는 외부인의 도움을 받아 서로 의지하며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의 자기관리자들입니다.”
3) 권력이라는 것을 고찰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 도입된다. “광기는 정신질환이 아니다”라는 사고방식의 가장 큰 중요성은 권력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비판적 분석을 가능케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의사가 소유하는 어떤 권력을 조명한다. 에스키롤은 광인의 수감, 격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들은 광인의 권력을 제압하고 광인에게 행사될 수도 있는 외적 권력을 중화시켜 광인에 대해 치료와 교정의 정형외과적인 권력을 확립하는 것이다. 또한 의사가 어떤 개인의 정신상태를 결정하는 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인식’이라는 지식의 형식이 본질적으로 권력행사의 형식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인식의 권력성은 고유한 두 속성에 의해 논증된다.
A. 지식의 형식은 주체-대상이라는 명확히 비대칭적인 관계에 따라 성립한다.
B. 이 인식의 주체는 권리상으로는 확실히 보편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주체는 ‘희소한 주체’이다. ‘교육과 선별’을 통해 ‘자격이 부여된 주체’만 인식의 특권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의사이다.
4) 정신의학의 의학적 기능에 은폐되어 있는 하나의 기능이 명확히 밝혀진다. 정신의학이 정신질환의 전문 의학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은 이유는 ‘공중위생과 사회 방어의 임무를 자발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5) “광기에 대한 비광기의 절대적 권리”가 고발된다. 이 권리는 “무지에 대해 행사되는 전문지식, 착오를 수정하는 양식, 무질서와 일탈에 대해 부과되는 정상성이라는 세 관점에 입각한 원리였다. 반정신의학은 ‘전문적 능력’ 자체가 정신의학의 권력을 합법화하고 있다고 고발하며, 환자가 갖고 있는 문제는 의학적 기술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결정권은 오직 환자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4. 정신분석학
정신분석학은 탈정신의학화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도 있다. 권력은 정신분석학자의 진료실로 이동한다. 새로운 치료적 관계가 구상되고, 환자는 역동적이고 풍부한 어떤 것이 된다. 정신분석학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언어의 경험이다. 광기와 언어를 연동시킴으로써 고전적인 광기와 언어의 유연관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신분석학적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정신분석학은 정신의학과의 총체적인 철저한 단절이 아니다. 권력관계가 전적으로 부재할 수는 없기 때문에 푸코는 정신분석학이 정신병의 본질을 실질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정신분석학과 정신의학은 공존하고 있으며 이 두 실천이 유일한 두 실천도 아니다. 한편으로 정신분석으로 인해 감금이 아닌 다른 형태의 치료를 제안하면서 정신의학의 실천을 비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신분석학은 탈정신의학의 한 형태이다.
15. 정신의학의 권력
<정신의학의 권력>이 제기하는 정신의학 비판
1) 개인의 정신상태를 질환의 현실로 결정하고 의료대상화하는 것에 존재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
2) 정신의학적 치료가 갖고 있는 규율적 기능에 대한 비판
3) 정신의학이라는 것에 존재하는 근대적 광기 의식에 대한 비판,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광기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제기
정신의학의 반론
<정신의학의 옹호와 설명: 정신질환의 실제>에서의 옹호: 심적 조직은 항시 병리의 가능성을 숨기고 있지만 정상적인 조직화가 행해진다면 그것을 억제하는 체계를 갖춘다. 치료는 규범화=정상화. 이것은 의사만 할 수 있다.
정신의학의 발달로 인해, 뇌에 손상을 입어서 정신질환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측면에서 정신질환은 의학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는 정당한 권력 행사의 한도 내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제기
1) 에는 정신질환의 치료를 규범화=정상화에서 찾지만 규범=정상 개념이 정신의학에서 보편적 진실은 아니다.
2) 정신병원에서 행사되는 ‘규범화=정상화’가 현실에서는 신체의 규율화를 통해 획득되고 있다는 사실도 보여줬다.
3) 현대사회에는 푸코가 비판했던 과잉적인 정신의료 대상화가 더 가속화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A. 정신질환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이는 반드시 의학적 관점에 기초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회운동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B. 질환의 수가 증대되면 그때까지 질환이 아니었던 행동이나 정신상태가 의료대상화되고 그 결과 장애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장애자가 된다. 그러나 이 정신상태들을 ‘장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과잉 의료대상화는 현실에서 두 차원을 갖는다. 한편으로 정신질환자, 정신장애자라고 가정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 고통, 욕망이 증상으로 규정당해 의사로부터 약물 과다투여를 당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의학의 의료 대상이 되고 있다.
1) 경제적 이해관계. 의사가 독점할 수 있는 영역을 확대하게 되는 유인. 제약회사의 이익.
2) 사회적 요인. 환자는 스트레스로부터 ‘장애’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장애’를 통해서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런 경향은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리카르도 페트레: 경제 세계화는 다섯가지 개념을 축으로 진행된다고 설명한다.
1) 개인의 우위성이 강조된다.
2) 시장의 자기조정 능력이 강조된다.
3) 시장의 본래적으로 공정한 성격이 강조된다.
4) 사기업이 우선시된다.
5)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이 가치의 원천이 되는 사회, 즉 쓰고 버리는 사회이다.
이런 개념들에 기초해 작동하는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혹한 스트레스를 주고, 한 번 적응한 사람에게도 계속해서 재적응하도록 항상 강한 스트레스를 주는 사회, 그러므로 부단히 부적응자를 생산해내고 폭력과 범죄와 더불어 정신장애를 수없이 계속 생산해내는 사회가 되어 있다. 정신의학의 규율적 기능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통해 신체 내부에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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