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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1. 새로운 정치철학을 위한 아감벤의 실험실 2020.8.16. 바다사자
여러 인문과학들이 이미 명확하게 규정했다고 믿고 자명한 것으로 전제해왔던 개념들 중 어느 것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런 개념들 중 상당수가 이런 파국의 위급함 속에서 지체 없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181).
1. 『목적 없는 수단』의 구조
첫 번째 주제: 정치철학적 실험
- 첫 번째 내용(제1부 2장∼4장, 제3부의 일부): 비오스, 조에, 예외상태, 강제수용소, 난민 등
- 두 번째 내용(제1부 1장): 삶-의-형태
두 번째 주제: 미학-정치적 실험
- 세 번째 내용(제2부 전체, 제3부 일부): 스펙터클, 언어활동, 몸짓, 얼굴 등
사유 실험의 전체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예언적·방향지시적 글인 동시에 1990년대 말 정치적 사건을 성찰하는 정세적인 글이다(183).
두 번째 주제는 미학 차원으로 보이나 지극히 정치적이다. 언어활동 분석은 민주주의-스펙터클 사회라는 동시대적 조건의 구조를 파헤치는 노력이고, 몸짓은 새로운 삶의 형식이나 행복한 삶의 필요성을 향한 순수 수단으로서 제시된다. 「삶-의-형태」도 제2부와 겹쳐 읽을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184).
2. 드보르와 아감벤: 사유의 유산과 해석
1) 스펙터클이란 무엇인가?
스펙터클이란 언어활동이자 의사소통의 권력, 인간의 언어적 본질인바, 자본주의가 생산적 활동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언어적·소통적 본성 자체까지(188) 전유할 만큼 확장됐다는 뜻이다.
스펙터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 축적된 자본에 더 가깝다. 맑스가 분석했고, 죄르지 루카치가 발전시킨 상품물신성의 ‘최종적인’ 형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189).
아감벤은 스펙터클을 언어 모델에 입각해 재해석한다(190).
언어는 인민과 국가, 인민과 세계를 임의로 연결하는 폭력적인 매개체인데, 맑스의 시대는 상품, 드보르 시대엔 스펙터클이며, 아감벤은 스펙터클이 ‘언어활동, 소통가능성 자체 그리고 인간의 언어적 존재’라고 보았다(191).
아감벤은 드보르의 논의에서 우리가 이미지에 무의식적으로 투입되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 전도된 논리가 거꾸로 유토피아를 출현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방식까지도 읽어낸(191)다. 드보르가 보기에 물신성은 18세기 ‘편견’인 독단적 경험론으로부터의 긍정적 변동으로 간주한다. 19세기 상품물신성과 이의 급속한 발달은 18세기 계몽 담론인 경험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 의문시되는 그 지점을 나타낸다(192).
2) 분리: 불가능한 소통, 혹은 극한의 문턱
분리는 스펙터클의 처음이자 끝이다. 스펙터클이 독립성을 획득하는 것은 이미지로 육화된 시각이라는 매개체가 인간의 지각을 분절할 때이다. 현실/삶의 다양한 면모가 시각에 의해 한 단면만 포착되고 고착화될 때 비로서 스펙터클이 움직인다. 이미지라는 격자 안에 포함되지 않는 현실/삶은 인간의 정신에 도달하지조차 못하고, 격자화된 이미지들만이 세상을 파악하는 특권적인 창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이렇게 스펙터클은 현실/삶을 시각적으로 부정한다(195).
스펙터클의 등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이자 기획일 뿐이다. 이미지가 생명을 부여받아 자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마법은 다른 생산양식으로 옮아가면 곧 사라져버린다. 스펙터클의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감각이 특권화됨으로써 인간의 지각능력 자체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위기에 처했다는 그 결과 자체이다.(196).
모든 분리는 이중의 과정을 거친다. 기원과의 분리에 이어 현실/삶과의 분리에 의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현실/삶의 소통은 불가능해질뿐더러 인간은 더 이상 세계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됐다. 아감벤은 이 사태를 ‘경험의 파괴’라고 한다(197).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다시 현실/삶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느냐이다(198).
3) 반복과 정지: 스펙터클에 맞서는 이미지
반복이란 항상 회귀의 문제이지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다. 반복은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던 예전 것의 잠재성이 새롭게 드러나는 조건이다. 실(200)제적인 것을 가능적인 것으로, 가능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것이 반복이다(201).
실재적 운동을 제시하는 동시에 상이한 기능의 가능성까지 알려주고, 신체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이게 만들기도 하는 반복은 우리에게 정지의 감각을 부여한다. 화면에서 보고 있는 것이 재현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점을, 역사의 연속체라는 것이 중단되어 있음을 비로소 발견한다. 이때에야 메시아가 진입해 들어올 문이 열리게 된다. 영화의 변증법적 잠재력을 바로 이런 문을 여는 역량이다(202).
정지는 이미지라는 매개체와 서사라는 형식 사이에 나 있는 균열을 관조하게 만든다(202).
반복과 정지의 영화 속에서 이미지는 다른 어떤 것의 재현이 아니라, 재현가능성 자체로 등장한다(203).
스스로 이미지임을 드러내는 이미지, 항상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암시하는 이미지. 이미지-없음을 드러내는 이 두 가지 방식의 사이 어딘가에 스펙터클과 단절할 수 있는 계기로서 ‘상황’(드보르)은 이미지가 오직 재현가능성 자체로 등장하는 순수 가능성의 지점에서 구축된다. 무엇인가가 반복되지만 오직 독특한 것으로서만 반복되는 지대로서의 ‘상황’이야말로 기존에 존재하던 것에서 벗어나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탈-창조의 계기일 것이라는 설명이다(205).
3. 몸짓에 관한 노트: 장치를 통한 신체의 생명정치화
1) 몸짓의 상실
몸짓의 상실은 신체를 이해/파악하는 수단이 변동됐음을 지칭한다(209).
부르주아지의 몸짓이 영화적 시선에 의해 노출되고 분석되어 몰락함과 동시에 표현과 의사소통의 동적 이미지 역시 노출되면서 분해되고 재수립된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소외된 인공물로서의 신체는 이제 ‘해독 가능한 것’이 되며, 결국 서구 세계는 몸짓의 위기,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의미와 해석의 위기에 사로잡히게 됐다. 몸짓의 상실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 이런 상실이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일종의 트라우마에 해당하는 것으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210).
아감벤은 어느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몸짓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 이제 몸짓의 파국은 규범이 됐다고 전율스런 결론을 이끌어낸다(211).
2) 몸짓의 회복
몸짓은 항상 그 단어의(211) 가장 적합한 의미에서 개그이다. 개그는 말을 막으려고 입을 틀어막는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을 향한 이 입 막음, 즉 침묵(무성성)의 역량을 되찾을 때 비로소 몸짓은 개그가 된다. .
몸짓을 통해 우리가 교환하는 것은 어떤 메시지가 아니라 소통가능성 자체다. 이런 몸짓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 나이, 성별, 국적, 피부색과 무관하게 순수 소통가능성에 기초해 도래할 공동체의 구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어떤 종류의 전제나 귀속조건에도 기초할 수 없다. 이것이 ‘도래하는 공동체’이다. 공통의 코드는 끝없이 계속되는 매개(215) 자체이며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활용할 뿐이다(216).
3) 무능력의 능력
어떤 특정한 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무언가 다른 것을 해낼 수 있다는 데 대한 선제조건이 된다(216).
무능력의 능력이란 ‘∼할 수 없음’의 능력이라기보다는 ‘∼하지 않음’의 능력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능력/무능력 또는 잠재성/비잠재성이 아니라 (무)능력 또는 (비)잠재성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218).
몸짓의 회복이란 순수 (비)잠재성으로서의 무능력의 능력을 회복해 스스로를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그래서 무엇이든 새로 쓸 수 있는 ‘텅 빈 서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로부터 자신의 사유와 몸짓을, 자신을 둘러싸고 있고 행위를 시작할 일체의 수단을 목적 없는 수단(스스로 매개체-임을 드러내는 매개체)으로 만들어야 한다(219).
4. 행복한 삶으로서의 삶-의-형태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은 난민들의 국제법적 지위, 자살 폭탄자, 브라질(220) HIV 반응자들의 사회적 지위 같은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다(221).
벌거벗은 생명이나 새로운 삶-의-형태나 모두 조에와 비오스의 분리가 불가능한 위상학적 미결정성의 지대에서 출현하지만, 후자의 경우 조에와 비오스는 존재의 고유한 역량의 완전함 속에서 통일된다. 그래서 분리불가능성은 자연적 생명과 정치적 삶의 피에 젖은 분리에 더 이상 근거하지 않는 삶, 오로지 자기 자신에만 근거해 순수한 내재성에서 살아가는 삶, 자신의 고유한 통일성에 대한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토대가 된다(223).
그런 삶이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목적 없는 삶, 역량을 지닌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순수 수단으로 삼아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삶이다.
새로운 삶-의-형태는 행복이 문제가 되는 삶이다. 충족한 삶, 절대적으로 세속적인 삶이며, 삶 자체의 고유한 역량을 완성함으로써 그것의 고유한 소통가능성을 완성하는 데 도달한 삶이다. 이 삶에는 주권도 법도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224).
폭력으로써 세계를 변경시키려고 하지 않고 다만 세계를 조금 바로잡게 될 그런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려고 하는 정치적 기획이다(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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