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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칸트 <화니짱 발제>

순수이성비판-칸트 머리말(20.09.0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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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목차

[A] 머리말

[B] 2판 머리말

 

[A] 머리말

p165 :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심각한 서문(진은영), 헤겔은 이 문장에서부터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를 왜 대답하려 하나? ("모르면 짜져있어라."라는 식으로 오용되는) 비트켄슈타인처럼 칸트는 '말할 수 없는 문제'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일까? 

p166 : 형이상학이 모든 학문들의 여왕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의지를 곧 행동으로 본다면, 형이상학은 그 대상이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중요성을 띠고 있으므로 물론 이런 영예로운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형이상학에서 온갖 멸시를 표시하는 것이 시대의 유행이 되어서, 내쫓기고 버림받은 형이상학이라는 老女 헤쿠바처럼 탄식하고 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물 중의 최고였고, 수많은 자식을 가진 권력자였건만, 이제 내몰리고 쫓기어, 의지할 곳조차 없구나.” - 오비디우스, 변신에서.

 

헤쿠바

처음에 형이상학의 지배는 교조주의자들의 주재 아래서 전제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법칙수립[입법]은 아직도 옜날 야만성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란으로 인해 점차로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퇴락했고, 회의주의자들은 정착해서 땅을 경작하는 것을 일절 싫어하는 유목민들과도 같아서 시시때때로 시민들의 통합을 분열시켰다. 그러나 다행히도 회의주의자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저 교조주의자들이 언제랄 것도 없이 새롭게, 비록 어떤 일치된 계획에 따라서는 아닐지라도, 다시금 형이상학을 일으켜 세우려 시도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토론] 칸트는 형이상학을 보호하고자 하는가, 회의주의자를 보호하고자 하는가? 칸트 이후 이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p168 : 이제는 더 이상 사이비 지식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려는 시대의 성숙한 판단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시대는 또한 이성에 대해, 이성이 하는 업무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인 자기 인식의 일에 새로이 착수하고, 하나의 법정을 설치하여,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반면에 근거 없는 모든 월권에 대해서는 강권적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적인 법칙에 의거해 거절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 법정이 다름아닌 순수이성비판 바로 그것이다.

사변이성을 비판하고 판정하는 재판관은 누구인가? 이성 외부에 있는 권위를 구부하고 이성 자신을 재판관으로 세우는 칸트. 자기 자신을 제대로 비판하고 판정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쓴 루소처럼 칸트의 이성은 여러 자아들로 분열되어 있는가?

p174 : 순전히 순수한 개념들에 의한, 그러니까 경험의 어떤 것도 또는 일정한 경험을 낳은 어떤 특수한 직관도 이것을 확장하고 증대시키는 데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이런 종류의 완전한 통일성은 이 같은 절대적인 완벽성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게 한다.

 

[B] 2판 머리말

p177 : 이성의 인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바, 그것은 대상과 그 개념을 한낱 규정한다거나, 아니면 그것을 현실화한다. 전자는 이성의 이론적 인식이고, 후자는 실천적 인식이다. (178)두 인식의 순수한 부분 곧 이성이 그 대상을 전적으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그 부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서술되고,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이 이것과 뒤섞여서는 안 된다.

p182 :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우리의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대상들에 관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이 전제 아래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형이상학의 과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겠는지를 시도해 봄직하다. 이런 일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확정해야 하는, 요구되는 바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183) 경험이란 그 자체가 일종의 인식방법으로서 내가 그것의 규칙을 대상들이 나에게 주어지기 전에 내 안에서,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는 지성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규칙은 경험의 모든 대상들이 반드시 그것들에 따라야 하고 그것들과 합치해야만 하는 선험적 개념들을 표출되는 것(...)이다.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와 연결해서 이야기해 볼 부분이 있을까요? 물 자체를 알 수 없기에, 선험적 인식이 먼저 존재한다는 생각에 다른 철학자들도 동의하나요? 이를테면 니체나 라이프니츠

p184 : 우리를 필연적으로 경험과 모든 현상의 한계를 넘어가도록 몰고 가는 것 무조건적인 것[무조건자]인데, 이성은 이 무조건적인 것을 모든 조건적인 것을 위해서 사물들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요구하며, 그로써 조건들의 계열이 완성될 것을 요구하니 말이다. 우리 경험인식이 사물들 자체로서의 대상들에 따른다고 가정해서 무조건적인 것이 결코 모순없이는 생각될 수 없음이 드러나고, 반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로의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이 사물들 자체로서의 대상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들로서의 이 대상들이 우리의 표상방식에 따른다고 가정해서 모순이 제거됨이 드러나고, 따라서 무조건적인 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아는 한에서의 사물들에서가 아니라, 아마도 우리가 그것들을 모르는 한에서의 사상(事象)들 자체로서의 사물들에서 마주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구체적 사물이 아니라 물 자체는 경험(현상)으로 알 수 없고, 그것은 무조건자로서 선험적인 것이다. 

p187 : 자기 자신과의 모순에 빠지 않기 위해서는, 사변이성으로는 결코 경험의 한계를 감히 넘을 수 없다.(...) (188) 이성은 (...) 사변 이성의 반작용으로부터는 안전하게 있어야만 한다.[경찰 예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로서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이 감성적 직관의 객관인 한에서만, 다시 말하면 현상으로서의 대상에 대해서만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비판의 분석적 부분에서 증명된다. 이로부터 사실 오로지 가능한 이성의 사변인식을 순전히 경험의 대상에만 국한시키는 결과가 나온다. 그럼에도 충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바로 이 대상들을 사물들 자체로서 비록 인식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고할 수는 있어야 함이 여전히 유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자체를 아는 것처럼 말하면(사변이성) 안된다. 그러나 물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수는 있어야 한다.

p190 : 우리가 저 두 (감성적인 그리고 지성적인) 표상방식을 비판적으로 구별하고, 이런 구별로부터 생긴 순수한 지성개념들, 그러니까 또한 이것들로부터 유래하는 원칙들을 제한한다면, 나는 자유를 생각할 수 있다.

(...)자유 그리고 자유와 함께 도덕은 자연기계성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자유는 동일한 행위의 자연기계성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윤리 이론은 윤리 이론대로, 자연이론은 자연 이론대로 각기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비판이 미래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무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고, 우리가 이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순전히 현상들에 국한시키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순수 이성의 비판적 원칙들의 적극적 효용에 대한 이 해설은 이라는 개념과 우리 영혼의 단순한 본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도 그대로 타당함을 제시할 수 있지만, 간결을 위해서 생략한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사변이성으로부터 동시에 그것의 과도한 통찰들의 월권을 빼앗지 않는다면, 나의 이성에 필수적인 실천적 사용을 위해 , 자유, 그리고 영혼의 불사성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변 이성은 이런 통찰들에 이르기 위해서 원칙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원칙들은 순전히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에서만 충분한 것인데도 경험의 대상일 수 없는 것에도 적용되어, 실제로 이것을 언제고 현상으로 전환시키고, 그렇게 해서 순수한 이성의 모든 실천적 확장을 불가능한 것이라 천명하니 말이다.

칸트는 '자유'를 위해서 사변이성과 투쟁을 벌인다. 

p193 : 이제 이 이성 비판을 통해서만 전반적으로 유해할 수 있는 유물론 숙명론 무실론 자유사상적 무신앙 광신 및 미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파들에게는 위험하지만 대중들에게는 거의 전이되지는 않은 관념론과 회의론의 뿌리를 자를 수 있다.

뉴턴 등 고전물리학에 큰 영향을 받았고, 실증주의를 인정하는 칸트가 유물론을 관념론이나 회의론, 광신과 같은 범주에 두는 게 재미있다. 칸트가 나열한 여러 사상 중에서 칸트의 진짜 라이벌은 누구였는가?
[질문] p197 : “우리는 여기에다 현존 중의 고전불변적인 어떤 것에 대한 표상과 고정불변적인 표상은 한가지가 아니라고 주의를 덧붙일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어떤 예시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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