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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알랭 바디우 2020.9.6. 바다사자

 

3. 화해하지 못한 것 199916

세기의 최근 20년 또는 두 번째의 복고 시대는 수에 사로잡힌 시기, 수는 돈의 수, 달러 또는 유로의 수를 말함. 모든 복고는 사유를 두려워함. 지상명령에 잘 농축된 특별히 지배적인 견해만을 좋아함(57).

맹목적인 수(여론조사, 예산, 주식 등)가 자신을 지탱하는 곳은 실재가 쇠퇴하게 된 바로 그곳임. 나쁜 수를 가리키며 결국 개념의 숫자인 것(58)

오늘날의 수란 무한정으로 셀 수 있는 것의 수, 복고 시대의 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무차별적으로 다른 수가 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짐, 자의적인 가변성이 오늘날의 수가 지닌 본질인 것(59)

세기를 가르쳐 줄 나쁜 수 논제(60)

검게 얼룩진 아프리카가 백인을 위해 도덕적 분말 세제를 생산하는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연결

부르주아 독재가 최고조에 이른 듯한 순간에 생뚱맞게 평등 유토피아에 관한 물음

새로운 세계는 결백한 자의 죽음의 기호 아래 태어남(62).

20세기 초반의 문제는 어떻게 시작의 잔인한 행위를 새로운 인간의 약속과 조화시키는가의 물음.

사유의 두 방향(63)

첫 번째 방향

죽음의 시대 종말의 시대에 처해 있다는 것, 피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 이 피가 마지막 피라고 선언하는 것, 마지막에서도 마지막

두 번째 방향

세기가 폭력과 파괴 속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보다 우월한 파괴와 보다 본질적 폭력을 통해 완수해야 한다는 것

세기는 그 자체가 종말, 쇄진, 타락처럼 생각됨과 동시에 또한 절대적 시작처럼 생각됨, 세기의 문제는 두 확신을 결합시키는 일, 세기는 그 자체가 허무주의로서 인지되었지만, 또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으로서도 인지되었음(65).

세기는 두 준칙 가운데 하나 아래에서 작용한 것처럼 보임(6566)

포기, 체념, 최소악, 절제, 정신성으로서의 인류의 종말, “위대한 이야기들(65) 대한 비판의 준칙

니체로부터 세계의 역사를 둘로 쪼개고자하는 의지를 되찾고, 화해한 인류의 근원적 시작과 건설을 제안하는 준칙

- 두 준칙의 관계는 변증법적 상관관계가 아니라 뒤얽힘의 관계, 세기가 필연성과 의지 사이의 비변증법적 관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66).

- 두 준칙의 분리 때문에 세기는 객관적 폭력이며 경배의 대상이 되는 주체적 요구이기도 한 그 어떤 특이한 폭력에 의해 전적으로 표시되는 것임. 폭력은 두 준칙 분리의 지점에서 도래하여 결핍된 결합을 대체함

- 폭력은 새로운 인간의 창조로 정당화됨. 새로운 인간의 창조하는 동기는 신의 죽음이라는 지평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신에게 종속된 인간을 대체하기 위하여 신이 배제된 인간이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임(67)

20세기에 작용한 것은 새로운 인간의 역사성임. 시작이라고 하는 실재의 순간 속에 존재했기 때문, 19세기는 알렸고 꿈을 꾸었으며 약속했음. 20세기는 세기 그 자신이 하였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하고 있음을 선언했음(68)

이것이 실재에 대한 열정임. 실재에 대한 열정을 세기에 대한 모든 이해의 열쇠로 만들어야 함.

실재는 두려움을 주면서도 마음을 들뜨게 하고 치명적이면서도 창조적임, 실재는 선과 악을 넘어서있다는 점, 새로운 인간의 실재적 도래에 대한 모든 확신은 그것을 위해 지불한 대가에 대한 강한 무관심 속에, 가장 폭력적인 방식들에 대한 합법화 속에 자리 잡고 있음(68)

오늘날의 온건한 도덕주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라는 다의적인 이름 아래 모인 혁명적 정치의 세기였던 작은 세기는 야만적이었음. 작은 세기가 매달렸던 실재에 대한 열정이 작은 세기 자신을 선과 악을 넘어서 위치시켰기 때문(69)

세기는 전재의 세기가 될 것임, 전쟁의 패러다임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함. 20세기에 전쟁의 관념이 결정적인 전쟁, 즉 마지막 전쟁의 관념이기 때문. 19141918년의 마지막 고약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고 그것이 다름 아닌 전쟁, 다른 유형의 전쟁(71)인 것.

마오쩌둥은 이에 확신을 가진 대표적 인물이었음(72). 마오의 논제는 전쟁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일로 귀착되는 것임(73).

궁극적인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파괴 너머에서 획득됨. 파괴와 궁극적인 것의 근본적 쌍이 존재하고 이 쌍은 비변증법적 쌍, 분리적인 종합임. 실제로 궁극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며, 매우 다른 두 과업, 즉 옛것을 파괴하는 일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존재함. 전쟁 자체는 잔인한 파괴와 승리의 아름다운 영웅주의를 비변증법적 방식을 병렬시키는 것(75).

세기의 문제는 끝의 동기와 시작의 동기의 비변증법적 결합 속에 존재하는 것, 끝내기와 시작하기는 세기 속에서 화해하지 못한 채 머무는 두 항인 것.

화해하지 못함의 모델, 그것은 전쟁, 즉 궁극적이고 전면적인 전쟁으로 세 가지 특징을 드러냄(75

76)

a

나쁜 전쟁, 보수적인 전쟁의 가능성에 종지부

b

허무주의를 뿌리 뽑아야 함. 근원적 참여를, 원인을, 역사와의 진정한 대면을 제안하기 때문

c

역사적이고 전 지구적인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임.

20세기에 세계가 공유하는 법칙은 둘임. 둘의 양상 속에서 재현된 세계는 조합에 기초한 균형의 가능성만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만장일치에 기초한 종속의 가능성까지도 추방해버림. 즉 둘로 잘라야 하는 것, 세기가 지닌 주체적 열쇠란 바로 이것(76).

세기의 열정, 그것은 실재, 하지만 그것은 적대임. 세기의 열정은 전쟁과 다름이 없음. “세기란 무엇인가?”는 세기를 요구하며 세기는 세기는 궁극적인 투쟁이라고 답함(77).

세기 3장(20.9.13 바다사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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