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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칸트 / 순수지성개념들의 연역(B) / 20.09.28 / <화니짱 발제>

순수지성개념들의 연역(B판) 20.09.28 수정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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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목차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B)

2

§15 결합 일반의 가능성에 대하여

§16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에 대하여

§17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칙은 모든 지성사용의 최상원리이다

§18 자기의식의 객관적 통일은 무엇인가?

§19 모든 판단들의 논리적 형식은 그 안에 함유되어 있는 개념들의 통각의 객관적 통일에 있다.

§20 모든 감성적 직관들은 직관의 잡다가 한 의식 안에 모일 수 있는 조건인 범주들에 종속한다.

§21 주석

§22 범주들은 경험 대상들에 대한 적용 이외에는 사물 인식을 위한 어떠한 다른 용도를 가지지 않는다.

§23

§24 감관의 대상 일반에 대한 범주들의 적용에 대하여

§25

§26 순수 지성개념들의 보편적으로 가능한 경험적 사용에 대한 초월적 연역

§27 순수 지성개념들의 이 연역의 성과

이 연역의 요점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B)

2

§15 결합 일반의 가능성에 대하여

 

p306 : 모든 결합은 지성 작용이고, 이것에 우리는 종합이라는 일반적 명칭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16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에 대하여(On the original-synthetic unity of apperception)

p346 : 모든 사고에 앞서 주어질 수 있는 표상은 직관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잡다는 이 잡다가 마주치는 그 주관 안에서 나는 사고한다는 것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표상은 자발성의 작용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감성에 소속되는 것으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이 표상을 순수 통각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그것을 경험적 통각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또한 나는 그것을 근원적 통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여타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사고한다는 표상을 낳으면서, 모든 의식에서 동일자로 있는, 다른 어떤 표상으로부터도 이끌어낼 수 없는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

 

p347 : 내가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한 의식에서 결합할 수 있음으로써만, 내가 이 표상들에서 의식의 동일성을 스스로 표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어떤 종합적 통일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17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칙은 모든 지성사용의 최상원리이다

p351 : ‘나는 생각한다는 이 원칙은 아직 모든 가능한 지성 일반을 위한 원리가 아니라, 단지 그것의 순수한 통각에 의해서는 나는 있다는 표상에 여전히 전혀 아무런 잡다(다양체)도 주어지지 않는 그런 지성만을 위한 원리이다.

->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내용인가요? ‘나는 생각한다나는 있다를 보장할 수 없다는? : 라깡을 뒤집어놓은 이야기. ‘나는 있다라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 생각-> . 내감되기 전에 두 개가 분리되어 있다고 보고, 지성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게 칸트의 생각. 발화행위 주체(무의식-발화주체를 바라보고 있는 나/원래 이상적 자아가 있던 자리/이드의 자리)발화주체(자아이상)의 차이(라깡). 이상적 자아는 어린이의 무엇이 되려하는 꿈, 말을 획득하기 전의 어떤 상태. 이상 ideal=manifold. 선택 가능한 수많은 잠재성(Virtual). 수많은 나=이상적 자아(장자의 나비의 꿈) / 지성은 분류하는 능력. 상상력이든 통각이든 다 집어넣어 버림. / 통각은 지성과 결합되어 있는 통일하는 능력. 통합적 능력.

 

§18 자기의식의 객관적 통일은 무엇인가?

p352 : 통각의 초월적 통일은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를 객관이라는 개념에서 합일되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통일은 객관적 통일이라 일컬어져, 의식의 주관적 통일과 구별되어야 한다. 의식의 주관적 통일은 내감의 규정으로, 이 내감을 통해 직관의 저 잡다는 그러한 결합을 위해 경험적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표상들의 연합에 의한 의식의 경험적 통일은 그 자신 현상에 관계하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반면에 시간에서 직관의 순수 형식은 주어지는 잡다를 함유하는 직관 일반으로서의 의식의 근원적 통일에 종속하는데, 그것은 오로지 직관의 잡다가 나는 생각한다는 일자와 필연적으로 관계맺음으로써,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경험적인 종합의 기초에 놓여 있는 지성의 순수 종합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

-> 의식의 주관적 통일과 객관적 통일은 어떻게 다른가요? 객관적 통일은 선험적 형식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요? : 직관은 감성을 들어온다(다양체가 분류되지 않고 들어올때는 정리안되고 들어온다.) 그 수준에 머무는 것(주관적 통일)을 넘어서서, 통각의 초월적 통각의 통일의 능력을 통해 개념(지성에 의해 주어진)과 합일 되어야 한다. 뭔가 느낀 것을 이론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객관적 통일을 해야 함. 범주화를 하면 객관적 통일. 경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주관적 통일(하나). 그것을 긍정(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 최향존중은 경험주의자인가요? -> 판단력! 모든 아름다운 것은 즐거움을 준다.(취미판단)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경험주의로 전락한 상황.

 

§19 모든 판단들의 논리적 형식은 그 안에 함유되어 있는 개념들의 통각의 객관적 통일에 있다.

p354 : 연합의 법칙에 따라서는 나는 단지 내가 한 물체를 들고 있을 때, 나는 무게의 압박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뿐, 그 물체는 무겁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다시 말해, 이 두표상들(물체, 무겁다)객관에서 주관의 상태와 상관없이 결합되어 있고, 한낱 지각 안에 (제 아무리 빈번하게 지각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함께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20 모든 감성적 직관들은 직관의 잡다가 한 의식 안에 모일 수 있는 조건인 범주들에 종속한다.

p354 : 하나의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한에서, 모든 잡다는 판단하는 논리적 기능 가운데 하나와 관련하여 규정된다. 그런데 범주들은 이 판단하는 기능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주어진 직관에서의 잡다는 반드시 범주들에 종속한다.

 

§21 주석

p355 : 직관을 위한 잡다가 지성의 종합작용(356)에 이미 앞서, 그러니까 그 종합작용에 독립해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오직 범주들을 매개로 해서, 그리고 이런 종류의 범주들과 이런 수효의 범주들을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선험적으로 수행하는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는 그것이 왜 그러한가의 연유를 더 이상 댈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왜 하필 다른 게 아니고 꼭 이와 같은 판단기능을 가졌는지, 또 왜 시간,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인지 그 연유를 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칸트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경험과 선험을 연결하는 매개로서 연결지점, 접착제로서의 근거, 연유를 댈 수 없다는 이 지점이 말이지요. : 칸트는 스스로 모른다고 고백. 그래서 칸트를 불가지론자로 함. 하지만 지성의 능력이 신장되면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고 함. 심리철학(의식철학/물리주의 physicalism)에 의하면 의식이 뭔지 알수 없음. 뇌를 스캔했지만, 의식이 있는 장소는 발견되지 않았다.(데카르트의 송과체라는 의식의 장소를 가정함)

 

§22 범주들은 경험 대상들에 대한 적용 이외에는 사물 인식을 위한 어떠한 다른 용도를 가지지 않는다.

p357 : 범주들은 단지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위해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만 쓰인다. 그런데 이 경험적 인식을 경험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범주들은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사물들을 인식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용도도 갖지 않는다.

 

§23

위의 명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월적 감성학이 우리의(358)감성적 직관의 순수 형식의 사용 한계를 규정했듯이, 대상들과 관련해 순수 지성개념의 사용한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비판이란 것은 능력의 한계를 알기 위한 작업.

 

p358 : 개념들의 이런, 우리의 감성적 직관 너머까지의 확장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것이 가능한가를 우리가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그런 객관에 대한 공허한 개념들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저 사고 형식들이 한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터인 그런 직관을 전혀 손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성적인 경험적 직관만이 사고 형식들에게 의의와 의미를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의 비감성적 직관의 객관이 주어진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 객관은 감성적 직관에 속하는 성질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24 감관의 대상 일반에 대한 범주들의 적용에 대하여

p360 :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감성적 직관의 잡다의 종합은 형상적이라 부를 수 있고, 그것은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한 순전한 범주에서 생각되는 종합, 즉 지성결합이라 일컬어지는 종합과 구별된다. 이 두 종합은 초월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자신 선험적으로 선행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인식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정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형상적 종합은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즉 범주들에서 생각되는 이 초월적 통일과 관련돼 있는 한에서, 순전한 지성적 결합과 구별해서,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라 일컬어야 한다. 상상력이란 대상의 현전 없이도 그것을 직관에서 표상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므로 상상력은, 그 아래에서만 지성개념들에 상응하는 직관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감성에 속한다. : 감성은 항상 오브젝트를 향해 열려있다. 지성은 판단하는 것. 칸트에게 능력은 판단능력. 감성에 관련있다는 의미. 감성의 하위능력의 의미가 아님.

 

p351 : 상상력이 자발성인 한에서, 나는 그것을 또한 때때로 생산적 상상력이라 부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재생적 상상력과 구별한다. 이 재생적 상상력의 종합은 단적으로 경험적 법칙들, 곧 연합의 법칙들에 종속하는 것으로, 따라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 때문에 그것은 초월철학이 아니라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다.

§25

p365 : 지적존재자로서 나는 저 결합을 오직 완전히 본래의 지성개념들 밖에 있는 시간관계들에 따라서 직관화하는 조건에 종속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지성적이 아닌, 그러므로 지성 자신에 의해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직관에서 그 자신에게 한낱 현상하는 대로 인식할 수 있을 따름이며, 그의 직관이 지성적이었더라면 자신을 인식했을 터인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는 없다.

 

§26 순수 지성개념들의 보편적으로 가능한 경험적 사용에 대한 초월적 연역

p367 : 지각조차도 그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모든 종합은 범주들 아래에 종속한다. 그리고 경험이란 연결된 지각들에 의한 인식이므로, 범주들은 바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고, 그러므로 또한 경험의 모든 대상에 선험적으로 타당하다.

 

p369 : 현상들은 연결하는 자가 지정해 준 법칙인 그 연결의 법칙 아래에 종속한다. 그런데 감성적 직관의 잡다를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이고, 이 상상력은 지성적 종합의 통일 작용에서는 지성에 의존하며, 포착의 잡다의 면에서는 감성에 의존한다. 그런데 모든 가능한 지각은 포착의 종합에 의존하지만, 이 포착의 종합 자신, 곧 이 경험적 종합은 선험적인 종합에 그러니까 범주들에 의존하므로, 모든 가능한 지각들은, 그러니까 또한 언제나 경험적 의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것은, 곧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면에서 범주들에 종속할 수밖에 없고, 자연은 그것의 필연적인 법칙성의 근원적 근거인 범주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순전히 범주들로써 현상들의 법칙성인 자연 일반이 의존하고 있는 법칙들 너머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특수 법칙들은 경험적으로 규정되는 현상들에 관한 것이므로, 선험적 법칙들에서 완벽하게 도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들이 모두 선험적 법칙들 아래에 종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도대체가 특수 법칙들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이 덧붙여져야만 한다. 그러나 경험 일반과 경험의 대상으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오로지 선험적 법칙들만이 가르침을 준다.

 

§27 순수 지성개념들의 이 연역의 성과

p370 : 우리는 범주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대상도 사고할 수가 없고, 저 개념들에 대응하는 직관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고된 대상도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일체의 직관은 감성적이고, 인식의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 이 인식은 경험적이다. 그러나 경험적 인식은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오직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선험적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

-> 대상 자체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이 구절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 물자체가 있다. <시령자의 꿈>에서 귀신을 보는자의 예지력(상상력)을 인정한다. 현대철학에서 칸트를 복원하는 맥락은 상상력.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 경험한 것만 알 수 있다. 인식의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 경험되지 않은 것을 다스 딩(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둠.

 

p373 : 나는 결과가 그 원인과 객관에 곧 필연적으로 결합해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단지 나는 이 표상을 다름아닌 바로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설정되어 있다고 말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회의론자가 가장 바라마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우리 판단들의 객관적 타당성이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얻은 우리의 모든 통찰이 순전한 가상에 지나지 않고, 느껴야만 하는 이런 주관적 필연성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터이며, 최소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그의 주관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의 방식에 순전히 의존되어 있는 문제에 관해서는 다툴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 칸트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한계를 인정하고, 다음 장에서 그 한계를 논파하는 건가요? : 칸트는 표상을 계속 교정해나가면서 객관에 가까이 가는 것이 지성의 능력. 우리가 물 자체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표상의 형식만을 문제 삼을 수 있다. 회의론자()이 사실 이것을 하려고 한 것. 이미지(형상)를 비판하면서, 사고의 습관일 뿐이라고 말함.

 

이 연역의 요점

이 연역은 순수한 지성개념들과 더불어 모든 선험적인 이론 인식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들임을 서술한 것이다. 이 경험이란 공간, 시간상의 현상들의 규정 일반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규정은 감성의 근원적 형식들인 공간, 시간과 관계 맺은 지성의 형식인,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의 원리로부터 유래하는 것임을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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