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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칸트 / 순수지성개념들의 연역에 대하여 / 20.09.24 / <화니짱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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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목차

1부 초월적 분석학

1권 개념의 분석학

2장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에 대하여

1

§13 초월적 연역 일반의 원리들에 대하여

§14 범주의 초월적 연역으로 이행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A]

2절 경험의 가능성을 위한 선험적 근거들에 대하여

예비적 주의

1. 직관에서 포착의 종합에 대하여

2. 상상에서 재생의 종합에 대하여

3. 개념에서 인지의 종합에 대하여

4. 선험적 인식으로서 범주들이 가능함에 대한 예비적 설명

3절 대상들 일반에 대한 지성의 관계와 이것들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에 대하여

요약정리- 순수 지성개념의 이 연역은 올바르고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다.

 

1부 초월적 분석학

1권 개념의 분석학

2장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에 대하여

1

§13 초월적 연역 일반의 원리들에 대하여

 

p306 : 권한과 월권을 논할 때에 법이론가들은 소송에서 무엇이 법적인가/권리 있는가 하는 물음과 사실에 관한 물음을 구별하고, 이 양자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면서, 권한 내지는 정당한 권리를 밝혀내야 하는 전자의 증명을 연역이라 일컫는다.

 

p307 : 나는 어떻게 선험적 개념이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그 개념의 초월적 연역이라 부르고, 그에 의해 그 소유가 생겨난 사실과 관련하여 경험적 연역과 구별한다.

 

p308 : 경험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요소, 곧 감각으로부터 유래하는 인식을 위한 질료, 이 질료를 정리하는 순수한 직관과 사고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유래하는 일정한 형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직관과 사고의 형식은 질료를 기연으로 해서(사용함으로 인해) 작동하게 되고, 개념을 산출한다.

 

§14 범주의 초월적 연역으로 이행

p314 : 모든 경험들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가 주어지는 감관의 직관 외에 또한 직관에 주어지는, 다시 말해 현상하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함유한다. 그러므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선험적인 조건으로서 모든 경험인식의 기초에 놓여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 개념인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그것에 의해서만 경험이 사고의 형식 면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그러니까 이 때 범주들은 반드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과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것들을 매개로 해서만 도대체가 경험의 대상이라는 것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p315 : 로크는 이 점의 간과해서 지성의 순수 개념들을 경험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경험에서 이끌어냈고, 그럼에도 모든 경험 한계를 훨씬 벗어나는 인식들을 얻으려고 모험할 만큼 일관성 없는 태도를 취했다. 데이비드 은 이런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개념들이 선험적인 근원을 가져야 함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흄은 지성이 그 자신 지성 안에 결합해 있지 않은 개념들을 대상 안에 필연적으로 결합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전혀 설명할 수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이 개념들을 경험에서 도출하였다.

(316) 저 유명한 두 사람 중 전자(로크)몽상(광신)으로의 문을 열었다. 이성은 일단 자기 편에 권한을 갖게 되면, 절제라는 불명확한 칭송 때문에 자신을 억제하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로크 : 경험=이성, 인간의 이성은 빈 서판이다. 이성에 경험이 기입되는 것. “굴뚝에서 연기가 날 때, 불을 때니 연기가 날 것이라고 인과관계를 추측!) 반면에 후자()는 자신을 전적으로 회의론에 맡겨 버렸다. (최초의 회의주의 : 디오게네스 냉소주의 / 진리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 / 경험조차도 하나의 습관 / 회의주의를 극복하려 했으나 실패했음.)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A]

2절 경험의 가능성을 위한 선험적 근거들에 대하여

p319 : 경험마다에서 순수 사고를 선험적으로 함유하는 이 개념들을 우리는 범주들에서 발견한다. 이제 이 범주들에 의해서만 하나의 대상이 사고될 수 있음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범주들의 충분한 연역이고, 범주들의 객관적 타당성의 정당화이다.

(320) 만약 내가, 감각기능은 직관에서 잡다를 함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기능에 일람작용(synopsis: 함께+보기, 개요)을 부여하면, 이것에는 항상 종합작용이 대응하고, 수용성은 오로지 자발성과 결합해서만 인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모든 인식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세 겹의 종합의 근거이다. , 직관에서 마음의 변양(modification, 양태변화)인 표상들을 포착하는 종합, 그것들을 상상에서 재생하는 종합, 그리고 그것들을 개념에서 인지하는 종합의 근거이다. 이것들이 이제 주관의 세 인식 원천을 이끌고, 이 인식원천 자신이 지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에 의해 지성의 경험적 산물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직관에서 포착의 종합에 대하여(On the Synthesis of Apprehension in the Intuition)

우리의 표상들은 모두 마음의 변양으로서 내감에 속하는 것이며, 그런 것인 한에서 우리의 모든 인식들은, 결국 그 안에서 정리되고 연결되고 서로 관계를 맺게 되어 있는 내감의 형식적 조건, 시간에 종속한다.

모든 직관은, 만약 마음이 인상들의 잇따름에서 시간을 서로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것으로 표상되지 못했을 잡다를 자기 안에 함유한다. 왜냐하면, 한 순간에 함유된 것으로서 각 표상은 다름아닌 절대적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잡다에서 직관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그 잡다를 일별하고(run through, 빠르게 보다), 다음에 그것을 통괄함이 필요하다. 이 작용을 나는 포착의 종합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바로 직관을 지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직관이란 잡다를 내놓는 것이긴 하지만, 이 잡다는 잡다(다양체, manifold)로서 한 표상 안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직관은 그 한 표상에서 나타나는 종합이 없이는 결코 어떤 잡다도 생기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착의 종합은 또한 선험적으로도, 다시 말해 경험적이 아닌 표상들에 관해서도 시행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종합이 없다면, 우리는 선험적인 공간 표상도 시간 표상도 가질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이 표상들은 오(322)로지 감성이 근원적인 수용성에서 내놓는 잡다의 종합을 통해서만 산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의 순수한 포착의 종합을 갖는다. (헤겔은, 범주를 경험적으로만 끄집어낸 부분을 비판함. 경험적인 범주가 어떻게 자기 의식과의 통일-매개-를 잘 설명하지 못했다. 통각이 있으나, 필연적으로 도출하지 않고, 임의성만 있음. 매개의 필연성을 설명해야 한다. 맑스의 계급투쟁을 통한 혁명. 헤겔의 매개는 역사적 변증법. 헤겔에게 역사의 주인은 칸트적 주체가 아니다. 개인은 역사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 그러나 칸트의 비판결과보다 비판의 과정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푸코 / 칸트가 신을 앞문으로 내쫓고 뒷문으로 몰래 들여보냈다 -헤겔)

 

2. 상상에서 재생의 종합에 대하여

p322 : 자주 잇따르고 수반하는 표상들을 마침내 함께 연합하고 그렇게 해서 연결시키는 단적인 경험 법칙이 있으며, 이 연결에 따라서 대상의 현전 없이도 이 표상들 가운데 하나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마음을 다른 하나로 이행시킨다. 그러나 이 재생의 법칙은 현상들 자체가 실제로 그러한 규칙에 종속해 있다는 것과 표상들의 잡다 안에서 일정한 규칙들에 따르는 수반 내지 잇따름이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험적 상상력은 결코 자기 능력에 맞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어서, 그것은 하나의 죽은, 우리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능력으로서 마음의 내부에 숨겨져 있을 터이니 말이다.

-> 현상들 그 자체가 현상들끼리의 연결고리를 존재론적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어서 보는 것이다.

 

3. 개념에서 인지(재인)의 종합에 대하여(On the Synthesis of Recognition in the Concept)

p323 :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한순간 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바로 그것과 동일하다는 의식이 없다면 일련의 표상들에서 재생은 허사일 것이다. (324)냐하면 이럴 경우 현재의 상태에 그것에 의해 표상들이 순차적으로 산출된다고 할 그 작용에 전혀 속하지 않는 새로운 표상이 있겠기에 말이다. 이렇게 되면 표상들의 잡다는 어느 때거나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지는 못할 터이다.(-> 재인의 의미)

왜냐하면 잡다는 오로지 의식이 그것에게 부여할 수 있는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수를 셀 때에 현재 내 머리에 떠오르는 단위들을 순차로 더해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하나에다 하나를 이렇게 순차적으로 덧붙임에 의한 분량의 산출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또한 수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수의 개념은 오직 이 종합의 통일 의식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 재인의 위치 : 잡다한 표상에는 통일성이 없다. 통일성은 오직 우리의 의식에서만 있다.

 

개념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우리를 이 주의점으로 이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 의식(one consciousness)이야말로 잡다를, 곧 잇따라 직관되어 순차로 재생된 것을 하나의 표상으로 통일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흔히 아주 희미한 것(->무의식, 전의식?)일 수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작용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 결과에서만, 그러니까 직접적으로는 표상(representation)의 산출과만 연결시킨다.

-> 개념과 표상의 관계 : 종합하는 의식이 경험에 직접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에 있어서만 표상의 산출과 결합하여 표상의 산출과 결합하지 직접적으로 결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의식은, 비록 두드러진 명료성은 결여돼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있어야만 한다. 하나의 의식없이는 개념들도 그리고 그와 함께 대상들에 대한 인식도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 자기의식(cogito)=통각이 있어야 한다!

 

p325 : 우리는 오로지 우리 표상들이 잡다만을 다룰 수밖에 없고, 이 표상들에 대응하는 저 X(대상)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표상들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일 터여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므로, 저 대상이 필연적으로 이루는 통일성은 다름아니라 표상들의 잡다의 종합에서의 의식의 형식적 통일성일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 표상실재 : 표상이 아니라 표상을 종합하는 형식만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만약 직관이 잡다의 재생을 선험적으로 필연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이 잡다를 통일시키는 하나의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저 종합의 기능에 의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산출될 수 없다면, 이 종합적 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개의 직선이 규칙에 따라 결합함을 의식함으로써 하나의 삼각형을 대상으로 생각한다. 이때 규칙이란 그에 따라 그러한 직관이 항상 정시(exhibit, 드러내다, 보이다.)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규칙의 통일이 바로 모든 잡다를 규정하며, 잡다를 통각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제한시킨다. 이 통일의 개념이, 내가 삼각형이라는 개념에서 생각되는 술어들을 통해 생각하는 대상=X의 표상이다.

-> 규칙성 : 규칙에 따른 종합의 기능은 우리 지성(통각)의 구성작용(규칙성)이다.

 

p326 : 모든 필연성에는 항상 초월적인 조건이 기초에 놓여 있다.

이 근원적인 초월적 조건이 바로 다름아닌 초월적 통각(transcendental apperception)이다. 내적지각에서 우리의 상태의 규정들에 따른 자기에 대한 의식은 한낱 경험적이고, 항상 전변적(forever variable)이다. 내적 현상들의 이 흐름 속에서는 지속적이고 항존적인 자기는 있을 수 없고, 그것은 보통 내감(inner sense), 또는 경험적 통각(empirical apperception)이라 불린다. 반드시 수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표상되어야 할 것은 경험적인 자료에 의해서는 그러한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327)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전변 없는 의식을 나는 이제 초월적 통각이라 부르려 한다.

현상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대상들이고, (328)기에서 직접적으로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은 직관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이제 이 현상들은 사물들 그 자체가 아니고, 그 자신 한낱 표상들, 그러므로 다시금 대상을 갖는다. 그리고 이 대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직관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비경험적인, 그러니까 초월적인 대상=X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다.

경험적 인식의 초월적 대상과의 관계(329)맺음은 현상들이 순전한 직관에서 공간, 시간이라는 형식적 조건에뿐만 아니라, 경험에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의 조건들에 종속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어떤 인식이라도 통각의 이 필연적 통일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초월적 법칙에 의거할 것이다.

 

4. 선험적 인식으로서 범주들이 가능함에 대한 예비적 설명

p331 : 현상들은 포착의 종합이 일관되게 따라야만 하는 바로 그 선험적 조건들에 종속되어 있다. 그런데 그에 따라 일정한 잡다가(a certain manifold, 어떤 다양체가) 그러니까 한가지로 정립될 수 있는 그런 보편적 조건 표상을 규칙(a rule)이라 하고, 것이 그에 따라 그렇게 정립되어야만 하는 그런 보편적 조건 표상일 때는 법칙(a law)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르는 일관된 연결 안에 있고, 그러니까 초월적 근친성(transcendental affinity, 초월적 관련성) 안에 있으며, 경험적 근친성은 순전히 이 초월적 근친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3절 대상들 일반에 대한 지성의 관계와 이것들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에 대하여

p332 : 주관적인 세 인식 원천이 있는데, 그것은 감각기능,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는 또한 이 경험적 사용까지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요소 내지는 토대이다. 감각기능(감관)은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지각에서 표상하며, 상상력연합과 재생에서, 통각은 이 재생된 표상들과 그로부터 이 표상들이 주어진 그 현상들과의 동일성에 대한 경험적 의식, 그러니까 인지에서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표상한다.

그런데 모든 지각의 기초에는 순수 직관(표상들로서 지각과 관련해서는 내적 직관의 형식인 시간)이 선험적으로 놓여 있으며, 연합의 기초에는 상상력의 순수 종합, 그리고 경험적 의식의 기초에는 순수 통각, 곧 모든 가능한 표상들에서 자기 자신의 일관된 동일성이 선험적으로 놓여 있다.

 

p334 : 통각의 초월적 통일은 한 인식에서 잡다의 모든 합성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조건인 상상력의 순수 종합과 관계 맺고 있다. 그런데 상상력의 생산적 종합만이 선험적으로 생긴다. 왜냐하면 재생적 종합 경험의 조건들에 의존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순수한 생산적 종합의 필연적 통일의 원리는 통각에 앞서 모든 인식, 특히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이다.

 

p335 : 상상력의 종합과 관계 맺고 있는 통각의 통일기능지성이고, 그러니까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과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기능은 순수지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능한 현상들과 관련해서 상상력의 순수 종합의 필연적 통일을 함유하는 선험적 순수 인식들은 지성 중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범주들, 곧 순수 지성개념들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순수지성은 범주들을 매개로 하는 모든 경험들의 형식적 종합적 원리이고, 그래서 현상들은 지성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 통각의 통일기능은 왜 지성에 속하나요? : 칸트에게 상상력은 지성의 원천. 지성이나 이성, 통각을 발휘하게 하는 원천적인 능력이 상상력. 라깡의 상상계와 비슷. 예지계. 자기 의식이 가지고 있는 능력. 선험성이 라깡과 연결시킬 수 있는 지점. . 칸트는 상상력을 지성을 통한 앎으로 연결시킴. 라깡은 진리로 연결시킴. 통각(라이프니츠)에는 경험적 통각(외부에서 온 여러 가지 느낌의 통일성, 의식에 의해서 재인되는 것), 선험적 통각(칸트에게는 생각이 먼저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라이르니치에겐 없음)가 있어야만 통각이 가능하다. 통각의 통일기능(지성). 지각을 통일시키는 능력이 지성. 라깡은 의식(칸트의 지성)을 반대하는 것. 지성의 자리에 무의식을 놓는 작업. 칸트가 지워버렸던(비도덕적인 병든 욕망) 자리에 놓는 것. 칸트 with 싸드.(사드의 자리가 상상력의 자리 : “즐겨라라는 무의식의 명령)

 

p336 : 상상력은 말하자면 직관의 잡다(다양체)를 하나의 상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상상력은 그 전에 인상들을 자기활동 안으로 받아들여야, 다시 말해 포착해야 한다.

표상들의 재생은 하나의 규칙을 가져야 하며, 이 규칙에 따라서 한 표상은 상상력 안에서 다른 어떤 표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 표상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규칙들에 따르는 이 재생의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근거를 사람들은 표상들의 연합이라고 부른다.

 

p338 : 상상력을 매개로 해서 우리는 한 쪽(339)직관과 그리고 다른 쪽의 순수 통각의 필연적 통일의 조건을 결합한다. 두 끝인 감성과 지성상상력의 이 초월적 기능을 매개로 해서 필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개념들이 경험의 형식적 통일을 가능하게 하고, 이로써 경험적 인식의 모든 객관적 타당성(즉 진리)을 가능하게 한다. 잡다를 인지하는 이 근거들이, 순전히 경험 일반의 형식이 되는 한에서, 바로 저 범주들이다. 그러니까 상상력의 종합에서의 모든 형식적 통일과, 이를 매개로 한 현상들에게까지 내려가는 인지, 재생, 연합, 포착에서의 상상력의 모든 경험적 사용도 저 범주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저 요소들에게 의거해서만 인식에 그리고 도대체가 우리 의식에,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 소속될 수 있으니 말이다.

-> 범주에 대한 인식은, 교육을 통해서 가능한가요? 아니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습득하고 있나요? : 1판에서는 주어지는 것(소여)으로 봤으나, 2판에서는 지성의 능력으로서의 상상력,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라깡의 상상력의 개념은 1, 영혼의 신비, 무한성의 그늘. 헤겔도 역시 무한성의 그늘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봤을 것. 낭만주의자나 후기 칸트주의자는 후자를 중요하게 봤을 것.

 

p340 : 감성은 우리에게 직관의 형식들을 주지만, 지성은 규칙들을 준다. 지성은 항상 현상들에서 어떤 규칙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것들을 정사(poring through the appearances, 자세히 조사함)하는 일을 한다.

통각의 통일은 경험에서 모든 현상들의 필연적 합법칙성의 초월적 근거이다. 표상들의 잡다에 관한 바로 이 통각의 통일이 규칙이요, 이런 규칙들의 능력이 지성이다.

 

요약정리- 순수 지성개념의 이 연역은 올바르고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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