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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실재에 대한 열정과 가장의 몽타주 1999210

.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

소외 효과란 실재 상황에 대한 진짜 재현 원리를 가장이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연결, 즉 실재와 가장을 하나로 묶는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결을 풀어헤치는 기술임(95).

실재적 폭력과 가장 사이의, 얼굴과 가면 사이의, 벌거벗음과 변장 사이의, 종종 모호했던 이 관계를 사유하(95)는 일에 매달린 것, 이것이 세기의 위대함 가운데 하나였음(96).

. 맑스주의자들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실재에 대한 애매한 의식이 갖는 변장의 힘. 사회적 관계의 원초적 폭력(압제, 착취, 불평등한 파렴치)에 가면을 씌우는 재현의 형상. 실재를 표현하지만, 실재로부터 분리된 의식을 조직함. (95).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에는 일종의(96) 징후적 배치가 존재함. 어떤 실재의 징후로서 몰이해처럼 실재의 위치를 주관적으로 결정한 것. 이데올로기의 힘은 몰이해를 경유하는 한, 실재의 힘일 뿐.

라캉은 충동의 실재적 시스템이 자아라는 상상적 구성물 속에서 읽힐 수 있는 것은 모든 종류의 중심 일탈과 변형의 노정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라고 함. 주체의 실재가 내적이고 상상적인 자아의 구성 속에서만 의식적으로 접근이 가능해지는 것은 무의식적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가리키는 작용들의 모임을 거치기 때문. 이런 의미에서 의식에 대한 심리학은(95) 일종의 개별 이데올로기.

19세기의 실증주의가 이해의 힘을 긍정했다면, 세기는 몰이해의 효율성이라는 모티브를 펼침. 20세기는 라캉이 무지의 열정이라고 명명했던 것이 지니는 기막힌 힘을 발견한 것.

. 피란델로의 연극

20세기 예술이 자신의 과정을 보여주길 원하는 예술이면서 또한 예술 자신의 물질성을 관념화하기를 원하는 예술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 인위적인 것과 실재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일이 20세기 예술에서 인위성의 핵심적 쟁점이 됨(98).

피란델로는 위대한 발명자, 본질적 논제는 실재와 가장의 가역성이야말로 실재에 예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 자신의 연극 전체를 벗겨진 가면이라는 특별히 암시적인 제목으로 제시함(99).

엔리코 4실재의 엔리코 4세에게서 추정할 수 있는 성격상의 특징과 실존적 환경으로부터 살인을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엔리코 4세의 역사적 가면을 사용하고 있을 연극 주인공의 삶과 열정으로부터도 살인을 이해할 수 있음. 주인공이 자신을 실재적으로엔리코 4세로 아는지, 개인적 삶의 맥락에 기인한 복잡한 이유 때문에 자신을 엔리코 4세라고 생각하는 연기를 하는지, 주인공이 미친 것처럼 가장을 하는지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 위에 가역성의 논제가 성립하는 것(100).

힘은 허구만을 경유하나 허구는 형식, 모든 힘이 의미를 결정할 수 없는 어떤 형식만을 통해 위치가 지정되거나 실제적이 된다고 말하게 될 것, 가면으로서 제시되는 것, 그것은 바로 실재의 에너지라는 사실임(101).

. 모스크바 숙청 재판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일, 공산주의 체제 옹호자 가운데 중요한 일부를 청산하는 재판, 트로츠키의 상징인 구 볼세피키 경비대는 사라져야(101) 했던 것.

이 재판은 연극적인 순수 허구에 해당, 고문까지 포함하여 치밀하게 준비된 피고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의 역할에 순응해야만 했음(103).

실재에 대한 열정 속에서, 즉 정치를 선과 악 너머로 배치하는 바로 그 열정 속에서 가장이 하는 기능이란 무엇일까? 실재가 자신의 우연한 절대성 속에서 인식되는 한, 실재는 자신이 혹시 가장이 아닌지 의심받지 않을 만큼 충분히 실재적이지 않다는 것, 실재에 대한 열정,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의혹임(104). 어떤 것도 실재가 실재적임을 증명할 수 없음. 실재는 단지 가장이 실재의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들어갈 허구의 체계일 뿐임. 범주와 범주의 지시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공개적으로 정화해야 하는 일이 일어남. 이때 모든 이에게 실재의 불확실성이라는 가르침의 의식을 따라서 정화 작업을 단행하는 것이 중요. 정화는 세기의 중요한 슬로건(105).

정화는 예술 활동의 본질적 슬로건(105). 사람들은 가장의 기능이 단지 날것 그대로의 실재를 가리키는 일에 불과할 뿐인 순수예술을 욕구했음. 형식의 정화를 통해 힘이 획득된다는 관념은 실재에 대한 열정

가장으로부터 실재를 구분시켜주는 모든 형식적 규준이 부재할 때 사람들은 의심을 받게 됨. 주관적 확신이 실재적인 것으로 떠오를수록 주관적 확신을 그만큼 더 의심해야 한다는 것. 가장 많은 배신자가 있게 되는 곳은 자유에 대한 열정이 끊임없이 선언되는 혁명정부의 최상층부. 그 끝에까지 가면 배신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됨,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무(), 무는 그 어떤 실재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 정화의 필연적 귀결로서 무를 도래하게 함(헤겔)(107).

실재에 대한 열정에 의해 떠받쳐진 우리의 세기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정치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파괴의 세기였음.

파괴냐 아니면 벗어나기냐, 이것은 세기 속에서 중심이 되는 논쟁. 파괴/벗어나기라는 짝을 사유하기 위한 최초의 단서는 예술(109). 예술의 종말, 재현, 회화, 작품의 종말이라는 모티브의 배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재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 예술의 실재는 무엇인지 아는 것

. 말레비치의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

말레비치의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

회화의 질서 속에서 정화의 극치에 해당, 색이 제거되고, 형태가 제거되고, 단지 기하학(109)적 암시만 남음. 암시는 최소의 차이, 바탕과 형태의 추상적 차이, 특히 흰색으로부터 흰색으로의 실재하지 않는 차이, 동일자의 차이, 사라지는 차이를 지탱함. 파괴의 전범과 다른 벗어나는 사유의 전범이라는 기원을 발견할 수 있음.

이 그림에서는 실재를 동일성으로서 다루질 않고 단번에 간격으로서 다루기 때문에 파괴와는 다름. 실재를 고립시키게 될 정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간격은 그 자체가 실재적이라는 사실, 흰 정사각형은 최소의 간격을 허구화한 순간임(110). 최소의 차이를 최대의 파괴에 대립시키자는, 사유에서의 제안.

실재에 대한 열정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 새로운 것의 도래는(111) 사유의 반복을 멈출 때, ”새로운 탄생이 있어야만 하고 또 있게 될 것, 윤곽을 발견해야 함. 주의력은 윤곽의 발명으로 첫걸음의 각인으로 성취되는 것, 벗어나는 행위는 최소의 차이의 자리 그 자체에서(112), 거의 아무것도 없는 바로 그곳에서 내용을 발명하는 것(113).

 

세기 5장(20.10.18 바다사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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