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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 칸트 / 제2권 순수이성의 변증적 추리들에 대하여 / 20.10.08 / 화니짱
제1장 순수 이성의 오류추리에 대하여
p563 :
영혼(마음)은 실체이다.
그것은 질적으로 단순하다.
그것은, 그것이 현존하는 여러 시간상에서 수적으로 동일하다. 다시 말해, 다수가 아니라 하나이다.
그것은 공간상의 가능한 대상들과의 관계 중에 있다.
한낱 내감의 대상으로서 이 실체는 비물질성이라는 개념을 제공하고, 단순 실체로서 그것은 불후성이라는 개념을, 지성적 실체로서 그것의 동일성은 인격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세 요소가 함께 정신성을, 공간상의 대상들과의 관계가 물체들과의 교호성(상호작용)을 제공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고하는 실체를 물질 안에서의 생명의 원리로서, 다시 말해 영혼으로서 그리고 생명성의 근거로서 표상하며, 정신성에 의해 제한된 이 생명성은 불사성을 표상한다.
-> 칸트는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오는 영혼론의 중심명제들을 오류추리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류추리론은 결국 경험의 내용이 채워지지 않은 형식에 불과한 것을 실체화하는 것입니다.
[A판 오류추리론]
첫째, 실체성의 오류추리
순수 영혼의 첫째 오류추리에 대한 비판
둘째, 단순성의 오류추리
초월적 영혼론의 둘째 오류추리에 대한 비판
셋째, 인격성의 오류추리
초월적 영혼론의 셋째 오류추리에 대한 비판
넷째, (외적 관계의) 관념성의 오류추리
p580:
그것의 현존이 주어지는 지각들의 원인으로서만 추리될 수 있는 그런 것은 의심스런 실존만을 갖는다. (대전제)
그런데 모든 현상들은 그것들의 현존이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고, 주어진 지각들의 원인으로서만 추리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외감의 모든 대상들의 현존은 의심스럽다. 이 불확실성을 나는 외적 현상들의 관념성이라 부르고, 이 관념성의 이론을 관념론이라 일컫는다. 이에 비하여 외감의 대상들이 확실할 수 있음에 대한 주장은 이원론이라 일컬어진다.
-> (외감의 대상들의) 현존을 의심하는 이론이 데카르트의 관념론이라면, 칸트는 외감의 대상들이 확실할 수 있다고 믿는 이원론의 입장에 속한다.
초월적 영혼론의 넷째 오류추리에 대한 비판
p581 : 우리는 관념론자를 감관의 외적 대상들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오직, 외적 대상들의 현존이 직접적인 지각에 의해 인식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가 외적 대상들의 실재성을 일체의 가능한 경험에 의해서는 결코 완전히 확실하게 인지할 수는 없다고 추리하는 자이다.
그런데 나는 모든 현상들의 초월적 관념론을, 그것에 따르면 우리가 그 현상들을 모두 사물들 그 자체가 아니라 순전한 표상들로 보며,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단지 우리 직관의 감성적 형식일 따름이고, 사물 그 자체로서의 객관들의 그 자체로 주어진 규정들이거나 조건들이 아니라고 하는 이론으로 이해한다. 이 관념론에 반대되는 것이 초월적 실재론인데, 이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우리 감성에 독립적인 자체로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초월적 실재론자는 외적 현상들을 우리와 우리 감성에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따르더라도 우리 밖에 존재할 터인 사물들 자체라고 표상한다.
-> 칸트는 시공간과 사물이 우리의 인식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초월적 실재론자>가 아니고, 시공간을 단지 감성의 형식으로 생각하는 <초월적 관념론자>이다.
p581 : 이 초월적 실재론자는 본디 나중에는 경험적 관념론자 노릇을(582)하는 이로서, 감관의 대상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외적인 것이어야 한다면,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감관 없이는 실존해야만 하는 것이라 잘못 전제한 후에,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모든 감관의 표상들이 그것들의 현실성을 확신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라 보는 자이다.
-> <초월적 실재론, 초월적 관념론, 경험적 관념론, 초월적 관념론> 이라는 4가지 이론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월적) 실재론이 (경험적) 관념론으로 변화한다. 초월적 실재론은 사물이 우리의 감성과 상관없이 존재하므로, 감각을 통한 우리의 모든 경험은 환상일 뿐이다. 따라서 경험을 의심하고, 사유만을 믿는 (경험적) 관념론자가 된다.
p582 : 이에 반해 초월적 관념론자는 경험적 실재론자,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부릇듯이 이원론자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순전한 자기의식의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 그리고 내 안의 표상들의 확실성, 그러니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있다’는 것 이상을 상정하지 않고서도, 물질의 실존을 인정할 수 있다. 이원론자는 물질과 그것의 내적 가능성조차도 우리 감성을 떼어 놓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한낱 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게 물질은 일종의 표상들(직관)이니 말이다. 이 때 그 표상들은 외적인 것이라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그 자체로 외적인 대상들과 관계 맺는 것처럼이 아니라, 그것들은 지각들을 공간과 관계시키는데,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은 서로서로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 자신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 칸트는 초월적 관념론을 따르면서, 동시에 경험적 실재론을 믿는 이원론자이다. 초월적 실재론자에게 공간은 물리적 실체(뉴턴)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공간은 형식일 따름이다.
p582 : 우리의 이론에서는 생각하는 존재자로서의 나의 현존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현존을 우리의 순전한 자기의식의 증거에 근거해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증명된 것으로 선언하는 데 아무런 의구심이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실존하듯이, 똑같이 외적인 사물들도 실존한다. 이둘 모두 나의 자기의식의 직접적인 증거에 근거해서 실존하는 것이지만, 다만(583) 차이점은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나 자신의 표상은 순전히 내감인 반면에 연장적인 존재자라고 칭하는 표상들은 외감과도 관계 맺어져 있다는 점뿐이다. 나의 내감의 대상(곧 나의 사고내용)의 현실성에 관해서 추리를 할 필요가 없듯이, 나의 외적 대상들의 현실성과 관련해서도 추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 둘 모두 표상들일 따름이며, 표상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의식)은 동시에 그것들의 현실성에 대한 충분한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 사유와 현상 모두 표상일 따름이다. 표상이 실체로서 실재하는지 여부는 증명할 수가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표상들의 작동이 현실적인 작동(다른 사람과의 공통감각)을 이루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명해야 하는 것은 어떤 조건 하에서 표상들이 경험의 공통감각, 즉 외감과 내감이 연결되어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 (분석학)
p584 : 초월적 대상은, 내적 직관과 관련해서든 외적 직관과 관련해서든, 알려지지 않는다(->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초월적 대상이 아니라 경험적 대상으로, 그것이 공간상에서 표상되면 외적 대상이라 일컬어지고, 오로지 시간 관계에서만 표상되면 내적 대상이라 일컬어진다. 그런데 공간과 시간 이 둘은 오로지 우리 안에서만 마주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밖에’라는 표현은 피할 수 없는 애매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사물 그 자체로서 우리와 구별되어 실존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한갓 외적인 현상에 속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후자의 의미에서의 이 개념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경험적으로 외적인 대상들을 공간 안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물이라고 곧바로 이름붙임으로써 이것들을 초월적인 의미에서 대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과 구별하고자 한다.
-> 외감인 공간과 내감인 시간을 통해서, 외적 대상과 내적 대상을 일치시킬 수 있다.
p586 : 물론 대상들이 대응하지 않는 속임수의 표상들이 생길 수 있다. 여기서 그 속임은 때로는 꿈에서처럼 상상의 환상으로, 때로는 이른바 감관의 착각에서처럼 판단력의 과오로 돌려진다. 이제 이 때의 거짓 가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경험적 법칙에 따라 지각과 연관되는 것은 실제로 있다’는 규칙(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을 좇아 수행한다.
-> 판단력의 과오로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원칙의 분석학이 필요하다.
p587 : 교조적 관념론자(버클리)는 물질의 현존을 부인하는 자이겠고, 회의적 관념론자(데카르트)는 물질의 현존을 증명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의심하는 자이다.
순전히 우리 주장의 근거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가 직접적인 지각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 물질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설득을 불충분하다고 천명하는 회의적 관념론자는,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 경험의 아주 작은 발걸음에서도 두 눈을 크게 뜨게 만다는 인간 이성의 은인이다. (588) 회의적 관념론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유일한 탈출구, 즉 모든 현상들의 관념성으로의 탈출구를 붙잡도록 강요한다.
이제 사람들이 이에 따라서 영혼론에는 이원론만이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물론! 그러나 오로지 경험적 의미에서만 그렇다’이다. 다시 말해, 경험 연관에서만 물질은 현상에서, 실체로서 외감에 실제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범주를 지각들의 연관 속에 집어 넣어 경험이 되도록 하는 규칙들을 좇아 양쪽 모두에서 현상들은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원론이라는 개념을 확장하여 초월적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이 이원론이나 한편에서 이것에 반대되는 것들인 유심론과 유물론은 최소한의 근거도 갖지 못할 터이다.
-> 유심론과 유물론을 사이에서 이원론의 길을 주창하는 칸트.
p589 : 외적 현상들의 기초에 놓여 있는 초월적 객관은, 물질(라이프니츠, 유물론)도 아니고 생각하는 존재자(데카르트, 유심론) 자체도 아니다. 그것은 첫째 종류와 아울러 둘째 종류의 경험적 개념을 제공하는 현상들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근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감관의 대상들에 관해 그것들이 그 자체로 무언인가를 캐보려는 일을 착상조차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론자(심리학자)가 현상들을 사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유물론자로서는 유일하게 물질만을, 또는 유심론자로서는 (우리 내감의 형식에 따르는) 한낱 생각하는 존재자만을, 또는 이원론자로서는 양자 모두를 그 자체로 실존하는 사물이라고 그의 학설 안에 수용할 것이고, 그래서 그는 언제나 오해로 인해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 일반의 현상일 따름인 것을 그 자체로 실존하는 것으로 잘못 추리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유심론자나 유물론자 뿐만 아니라 이원론자도 물질이나 생각하는 존재자 자체가 실존하는 것이라고 잘못 추리하면 안된다! 현상을 실체화하면 안된다!
오류추리들에서 비롯한 순수 영혼론의 결산에 관한 고찰
p600 : 모든 가상은 사고의 주관적 조건을 객관의 인식으로 간주하는 데에 있을 수 있다.
순수이성은 순전히 이 종합의 절대적 전제에만, 다시 말해 그 자신은 무조건적인 그런 조건에만 관심이 있다.
사고내용(=사고질료) 일반의 조건들의 종합
경험적 사고의 조건들의 종합
순수 사고(인간의 주관을 거치지 않는 사고)의 조건들의 종합
변증학의 세 절에 동기를 부여한, 그리고 순수 이성에서 나오는 같은 수효의 가짜 학문들, 곧 초월적 영혼론, 우주론, 신학을 위해 이념들을 제공하는 세 겹의 초월적 가상이 근거한다.
-> 칸트에 의하면, 무조건자를 이야기하는 초월적 영혼론, 우주론, 신학은 가짜 학문이다. 헤겔로 가면 일원론(절대정신)으로 퉁쳐진다. 최초의 일원론자는 스피노자(스피노자의 문제점은 시간이 없어, 변화가 존재하지 않음. 필연성의 총체로서의 세계.) 헤겔은 주관의 외화로서의 운동을 집어넣는 것(이성, 목적성). 목적성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만 부여된다. 그게 칸트처럼 주관이 아니라 객관과의 관계에서 상호반성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생각을 통해 뭔가를 만들면, 만든것과 생각을 검토해서 수정하는 것을 통해서 서로를 인지할 수 있다. 헤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적 매개라 부르는 실천이다.
p602 : 나는 무릇 순전한 통각은 개념상 실체이고, 개념상 단순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할 뿐이다.
-> 칸트의 통각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존재의 조건)와 다른 지점.
p603 : 모든 현존의 상관자인 생각하는 나(즉 영혼)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범주들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들을 그리고 범주들에 의해 모든 대상들을 통각의 절대적 통일성에서,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가 객관을 인식하기 위해 내가 전제해야만 하는 것 자체를 내가 객관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식이 그 대상과 구별되듯, 규정하는 자기(사고작용)가 규정되는 자기(사고하는 주관)와는 구(604)별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사고내용에서의 종합을 이 사고내용의 주관에서의 지각된 통일로 여기는 가상보다 더 자연스럽고 유혹적인 것은 없다. 이 가상을 우리는 기체화된 의식의 절취(->실체화된 의식)
-> 데카르트의 착각과는 다르게, <언표된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는 다릅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통각)는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B판 오류추리론]
영혼의 고정불변성에 대한 멘델스존의 증명 논박
p611 : 멘델스존은 그의 저술 『파이돈』에서 단순한 존재자(단자/모나드/individual/개인)는 결코 존재하기를 그칠 수 없다는 것을 감히 증명함으로써 영혼의 무상함을 저지하려고 시도하였다. (612) 그러나 의식에는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무한히 많은 도(degree)가 있다. (613) 단순한 실체들은 밀도량인 부모영혼들의 역학적 분할에 의해 자식영혼을 산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 부모영혼은 자기의 감소를 다시금 같은 종류의 새로운 질료들과 연립함으로써 보출할 것이다. 나는 이 같은 공상들에 대해 최소한의 가치나 타당성도 인정하지 않으며, 범주들은 경험적 사용 외에는 달리 쓸 수 없음을 충분히 엄하게 규정했다.
-> 멘델스존은 ‘독일의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을 얻게 해준 『파이돈』에서 영혼은 더 이상 쪼개술 없는 최소단위이고, 따라서 나누어져 감소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칸트는 영혼은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흐릿한 의식과 삭제된 기억처럼 많은 정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영혼은 불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이 불멸로 존재한다는 믿음과 공존 불가능한 것이 생식 개념이다. 자식이 태어나면 부모의 영혼이 옮겨간다든지, 아니면 자식 안에는 그전까지 이어져온 조상의 영혼이 축적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도마뱀의 경우 꼬리를 자르면, 다시 생겨난 꼬리는 어떤 평행우주에서 끌어올 수 있는 것인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사후의 심판을 위해서 멘델스존은 영혼을 불멸의 존재, 개별인격성의 주체로 만들어야만 했다. 다중인격이 사탄의 상징(검은 사제 등 퇴마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영혼(엔트로피, 에네르기, 정신)
영혼론적 오류추리 해결의 결론
p621 : 이 과제가 야기했던 난점은 주지하듯이 내감의 대상(곧, 영혼)과 외감의 대상이 이종적이라고 전제한 데에 있다. 그것은 전자에는 시간만이, 후자에는 공간도 그것에 대한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 귀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이 두 종류의 대상들이 이 점에서 내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대상(외감의 대상)이 다른 대상(내감의 대상)에게 외적으로 현상하는 한에서만, 서로 구별된다고, 즉 물질의 현상의 기초에 사물 그 자체로서 놓여 있는 것은 어쩌면 마음의 현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과 그렇게 이종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이 난점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실체들의 상호작용이 가능한가 하는 난제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영혼의 영역 밖에 있고, 또한 독자들이 근본능력과 기능들의 분석학에서 얘기된 것에 의거해 쉽게 판단할 수 있듯이, 의심할 바 없이 모든 인간 인식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
이성의 영혼론에서 우주론으로의 이행과 관련한, 일반적 주석
p622 : 만약 내가 나를 인식하고자 한다면, 나는 당연히 저 감성적 직관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를 단지 사고하는 자로서만 의식하고자 하고, 나 자신의 자아가 직관에 어떻게 주어지는 가는 제쳐 놓는다. 그래서 ‘나는 사고한다’의 ‘나’는 ‘내가 사고하는’ 한이 아니라면, 순전히 현상일 수도 있겠다.
-> 데카르트에게 코기토는 존재의 근거이다. 사고를 멈추지 않는 한 나는 항시 존재한다. 이에 반해 칸트에게 자아는 의식의 순간에만 점멸하듯 존재한다.(사고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준이 낮게 존재한다. 분석판단의 수준에서 머문다.-> 엘리트주의적 인종주의, 무역 등 자본주의적 기반에 도움을 줌. vs 데카르트 : 모든 사람은 생각한다. 노예도 말을 배우면 생각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주인의 언어(유럽 중심주의)/랑시에르-감각) 라깡은 이 구도를 뒤집어 무의식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p622 : 그런데 이 경험적 직관에서 사고하는 자기는 자기를 단지 ‘나’에 의해 객관 그 자체로 표시하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현존 방식 또한 규정하기 위해서, 곧 자신을 예지체로(사유 대상체로) 인식하기 위해서, 실체, 원인 등의 범주를 위한 그의 논리적 기능들의 사용 조건들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내적 경험 직관은 감성적인 것이고, 현상의 자료 외에는 아무런 것도 제공하지 않는데, 현상이란 순수 의식의 객관에 그것의 분리된 실존에 대한 인지를 위해서는 아무런 것도 공급할 수 없고, 단지 경험에게만 유익할 수 있으니 말이다.
-> 예지체(가상체, 본체/ 헤겔: 전체) vs 현상체 : 경험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상상) -> 쉴러 : 상상력 교육(예술) / 씨앗과 나무 : 그 과정을 인지하는 게 이성(헤겔). 인간이 목적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메커니즘으로 가게 된다. / 대깨문(헤겔주의자) : 이성의 간지는 너의 주관과 상관없다. 진중권(칸트주의자)는 그것을 계속 교정하려고 함. 대깨문은 매개를 강조.(절대정신 운동의 구체화) “민주당 외는 대안이 없다” 좌파적 헤겔 : 주관들이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지양(혁명)된다. / 대깨문에게는 혁명이 없다. /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현자(지혜의 존재) / 물질운동으로서의 정신이 나오는 것.(일원론임을 주의할 것. 변증법적 유물론 / 법칙, 법 / 정신이 물질운동을 추동하는 것은 칸트적인 것.) 그게 절대정신의 실현으로서 통합되는 것. 그것이 공산주의라는 것이 맑스. 모순을 지양하면서 절대정신을 실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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