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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5. 서양철학사. 6천하의 철학과 강호의 철학 발제. 풍경

 

20201025.세계철학사 6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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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세계의 통일제국인 한 제국은 공간적으로 이질적인 여러 지역들이 중국이라는 공간으로 일원화되고, 시간적으로 파편적인 여러 사건들이 중국의 역사라는 거대한 밧줄로 통일된다. 한 제국 이래 중원을 통일한 여러 국가들은 동북아 전체에서 중국(中國)’ 또는 대국(大國)’으로 인식, 동북아 천하를 중국/대국과 그것에 대해 동. . . 북을 이루는 국가들로 구조화했다.

p415 화이(華夷)의 구조-정치적 관계 설정인 책봉과 경제적. 문화적 교류였던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주나라의 봉건제(종법제), 진의 군현제, 한의 군국제.

 

통일제국 전체에 대한 통치체제를 진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질서 체제였다면, 한의 유방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질서 체제를 건설하였다.

p416 천하 일가(一家)- 황제는 백성의 아버지이고 백성들은 황제의 자식이다. 천하는 단일한 가족인 것이다.

 

 

1. 유교사회의 도래

관치의 시작, 형태의 구현을 위한 사상적 밑받침으로인 유교사회

 

유교의 국교화

한나라 초기는 황로지학의 시대.

3대 문제(기원전 179~157) 시기-‘20()실시-공이 있거나.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작을 하사 국가를 직급 단계로 구조화하였다. 이는 당시 백성들의 상처를 씻어주는 관치이자 통치 장치로, 향리의 연령적 질서와 국가의 작제적 질서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4대 경제(기원전 157~141) 시기-모후인 두태후는 황로지학을 선호했고, 경제는 법가적 인물인 조조를 등용하여 군현제로 만들고 중앙집권화하려했다. 귀족들은 반발로 오초칠국의 난이 일으켰으나, 결국 진압되고 이후 한제국은 중앙집권의 길을 걷게 된다.

 

5대 무제(기원저 140~87) 시기-강력한 중앙집권. 주위 국가 무력으로 진압하고 동북아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대월지(쿠샨왕조), 안식(파르티아), 대진(로마), 누란(크로라이나), 대완(파르가나)를 비롯한 서역 국가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추구, 장건의 서역경영으로 유라시아를 잇는 비단길위업 만들어냈다. 이러한 무리한 대외적 정책은 제국 내부에 무리한 재정 정책들을 실행하게 했다. 소금과 철과 술의 국가 전매실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실시,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강압적 정치 등.

 

사실상 무제때는 법가의 시대였고, 무제를 이은 소제, 선제 시대는 유가와 법가를 병용했다. 원제에 이르러 유교의 시대라 할 수 있게 되었다.

p423 *유가 사상이 국교화되는 과정은 신비적 종교적 측면이 강조되고, 통치이데올로기가 되는 과정으로 사상적 변질을 가져왔다. 공자, 맹자, 순자에게서 발견되는 지적 엄밀함과 윤리적 순정함은 빛을 바랬고, 현실에 영합하고 권력에 빌붙는 습성에 젖어들게 되었다.

 

평제 시대 왕망 여러 예제를 정비하고, 학교를 설치해서 한 제국 전체를 유교가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고, 평제를 독살 황위를 찬탈했다. ()왕조(기원후9~23)를 세웠으나 적미의 난같은 농민반란이나 남양 유씨의 거병 같은 호족 반란이 일어나 처참하게 살해 당하고 신왕조는 멸망한다. 광무제(유수)가 이 난을 수습하게 후한을 건국(기원후 25) 나라를 안정, 명제(기원후 58~75), 장제(기원후 76~88), 화제(기원후 89~105) 시대 전성기를 맞는다.

 

p425. 이 시대 유가 지식인들은 조정의 중심을 차지, 태학을 설치하고, 전한부터 이어져온 오경박사(, , , 예기, 춘추)를 전문적으로 연구, 지방 사학이 크게 발달, 정현 같은 대유학자 아래 수천 명의 유생들이 유학에 정진했으며, 백호관 회의를 통해, 유교의 체계를 정비, 국교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유가가 국교의 위상을 차지한 후한은 예교사회로 화해갔다. 유교적 덕목에 입각해 효렴으로 관리를 등용하자, 위선(僞善-거짓으로 선을 행함)을 행하는 자들도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며 강호에서 일민으로 유유자적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다른 한편 경서를 읽어 유학을 연마하는 것이 벼슬길에 오르는 첩경이 되면서 이것을 업으로 하는 가문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대대로 자손에게 학문을 전수하고, 통혼을 통해 세력을 키워 후한 사회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계급을 형성했다. 이 계층을 사족이라 불렀다. 이들 중에는 본연의 유교적 가치를 지키면서 도덕적 삶을 추구한 인물들은 청류라 불렀다.

 

후한 시대는 유교적 지식인이라는 강력한 계층이 형성되어 외척. 환관과 대립하였다.

 

경전과 권력

유학파들 사이의 정통 경쟁은 종교 권력과 국가권력의 복잡한 역학이 착종되어 성립.

공양전

문제 등극 정당화/ 모이자귀(母以子貴)

무제의 흉노정벌 정당화/ 양이사상과 복수의 긍정

 

곡량전

선제 권력의 정당화/ 장자상속제

 

華夷混一, 稱臣不名/ 동북아 국제관계에

 

서 주변국을 거느리는데 도움

 

좌씨전

사사로운 성격이 강하다

 

성제(32~7)시대 이용.

천자 칠묘제, 교사제, 한 화덕설

춘추가 특히 그러했는데, 주석서인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이 시대의 권력 정당화에 부흥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었다.

 

서경을 둘러싼 고금 논쟁도 있었다.

사변철학과 비판철학

한대의 사변철학은 신비한/주술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포, 정치적 맥락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띤다. 이러한 분위기에 도참-부명과 유가사상의 유교화-과 위서-경전들을 보완한다는 명복-는 특히 큰 역할을 했다.

 

유교 지식인들은 이런 위서들을 유가사상에 끌어들임으로써 유가사상을 통치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이러한 위서들이 도참과 합해지면서 참위설이 형성, 공양학파에 의해 활용되었다.

 

명제, 장제, 화제시대 때의 왕충은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풍토에 계몽주의적 비판을 전개, 논형(論衡)을 지음. 하늘과 인간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며, 하늘이 사람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도 사람은 하늘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보았다. 한대 유교의 기초인 천인상감설을 비판한 것이다.

 

2. 다원화의 시대

후한은 예교사회 자체가 내포하는 문제점들로, 위선사회가 되어갔다.

유학 공부를 통해 사족, 사대부 계층이 형성, 점차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기에 이른다.

궁궐에는 외척과 환관의 득세.

군벌들과 명사라는 새로운 존재 등장.

황건이라는 농민혁명 세력.

 

군벌동탁의 전횡과 명사 채옹, 노식, 정현 각각의 유형/ 사족의 인물 원소와 외척 하진이 손잡고 환관세력 십상 주멸. / 조조와 순욱/ 유비와 제갈량/

 

3. 천하와 강호

. . 오 삼국의 정립.

조조가 세웠으나 실상은 사마씨를 비롯한 사족의 국가였다. 사마씨에게 권좌를 빼앗김.

다원화되었던 사상적 흐름 다시 유가 중심으로 재편. 사족층은 좋은 정치를 행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탐욕을 부렸다.

 

위진(魏晉)시대의 뛰어난 철학적 업적은 정시연간(AD240~249)’을 전후해서 나왔다. 후한에 도가사상의 한 갈래로서 도교가 전개되고, 다른 갈래로 도가사상의 사유수준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존재론과 정치철학인 현학으로 전개되었다.

 

현학은 노자, 장자, 주역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며, 도가의 존재론으로써 유교의 정치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했다.

 

왕필과 현학

위 소제(조방)8세에 즉위, 사마의 쿠데타에 성공(기원후 249) 조방을 보위한 조상과 왕필의 스승 하안을 주살, 왕필도 하안이 죽을 때 병사한다.

 

P464. 왕필이 고민했던 것은 유교적 정치철학을 새로운 존재론적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노자에 주를 달면 노자철학을 새롭게 창조해 냈다. ‘()’를 논의의 중심에 두는 존재론적인 노자이다. 즉 무형. 무명의 도는 무한한 잠재성으로 그것은 개별화되어 존재하는 사물들이 나오는 잠재성이다. 모든 개별성들이 섞인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것이다. 하늘과 성인은 이 도에 충실한 존재들이며 뛰어난 정치는 도에 충실함으로써 가능하다. 유가적 사유에서 그의 정치철학은 나온다.(P471.6~17)

 

왕필에게는 노자 사유를 다른 사유들의 기초로 놓는 면이 존재하며, 유교의 재-정초를 꿈꾸었다. 결국 왕필의 정치철학은 제왕학이며, 왕은 도에 따라야 하는 존재로서 파악한다. 그렇다면 왕필이 말하는 ()’ 섭리에 따른 정치란 현실로 들어와버린 무()이다. “덕으로써 통치하는 것은 북극성이 가만히 있어도 뭇별들이 그것을 에워싸는 것과도 같다로 한 공자의 사상과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저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라 한 노자의 사상을 존재론적으로 재정식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왕필의 무()는 장자의 무()와는 다르다. 장자의 무()는 무용(無用)의 용()을 통해 이해된다. 즉 용()의 바깥에서 기능하는 무()이다. 즉 왕필의 무는 이름-자리의 장 안에 위치하는 무()이지만, 장자의 무()는 이름-자리의 장 바깥에 위치하는 무()이다. 장자가 노자 사유를 강호의 철학으로 구체화해갔다면, 왕필은 노자 사유를 천하의 철학으로 구체화해갔다고 할 수 있다.

 

천하와 강호

사마씨는 정권을 잡은 후 다시금 의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가치들을 동원해 정치적 숙청을 자행했다. 이때의 유가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자체였다. 유가는 청담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그런 한편으로는 사마씨 정권과 유교적 가치에 반기를 들면서 반-예교적 행위를 통해 시대에 저항했던 인물들이 죽림칠현이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의 몸짓이 시대를 뚫을 힘은 없었다.

*죽림칠현: 완적, 혜강, 왕융, 완함, 유령, 산도, 상수

 

완적은 명문유교 지식인 집안으로 청류명사가 되기 적합한 배경을 가졌으나 정시연간의 벽소를 통해 출세를 거부하고 도회(韜晦)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무군론(無君論)을 주장 동북아 문명의 기본구조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혜강은 유교 자체가 아닌 사마씨 정권이 이용한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였고, 또한 도와 기의 시계를 예교에 종속시키려는 유교의 입장을 반대했다. 음악에 예술적 자율성을 부여했고, 위진남북조 시대 전반에 관류하는 자유롭고 초연한 낭만적 영혼을 창조, 유교적 군자상과는 다른 인간상을 동북아 역사에 새겼다.

 

###동북아 철학사에서 현학자들과 죽림칠현이 남긴 핵심적인 유산은 유가철학과 도가철학의 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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