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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 21.02.24 / 바다사자

 

본능의 욕구와 문명의 제약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 관계를 다룬 논문 1930년 국제 정신분석 출판사에서 출판(231).

 

종교적 욕구

종교적 감정의 진정한 원천은 어떤 독특한 느낌에 있다(로맹 롤랑). 이 느낌은 개인의 불멸을 약속해주지는 않지만 종교적 에너지의 원천이며 종교 체계는 이 에너지를 포착한다. 이 느낌을 과학적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관념적 내용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234). 그것은 외부 세계 전체와 결코 풀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느낌이다. 지적 통찰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느낌을 종교적 욕구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간주해야 하느냐인데 그런 느낌을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235).

자아는 내면으로 연장되어 우리가 <이드Id>라고 부르는 무의식적인 정신적 실체와 뚜렷한 경계선 없이 이어진다. 자아는 <이드>의 겉포장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아와 외부 세계의 경계가 불확실해지거나 실제로 경계선이 부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상태가 있다. 우리 자신의 자아 감각도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자아의 경계도 변함없이 일정한 것은 아니다. 자아 감각은 여러 단계를 거쳐 발달해 왔다(236). 유아는 외부 세계와 자신의 자아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차츰 외부 세계와 자아를 구별하는 법을 배운다. 유아는 어머니를 가절히 원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대상>을 자아의 맞은편에 놓게 된다. <>에 있는 외부 세계를 인식하도록 하는 또 다른 자극은 고통과 불쾌감이다. 불쾌감의 원천이 되는 것을 자아에서 분리하여 대결하는 순수한 쾌감-자아를 창조하려는 경향이 생겨난다. 원시적 쾌감-자아이 경계선은 경험을 통해 수정된다(237).

어린이는 자아에 속하는 것과 외적인 것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 현실 원칙을 도입하고 외부 세계에서 자신을 분리한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갖고있는 자아 감각은 훨씬 포괄적인 감각의 위축된 잔해에 불과하다. 원초적 자아 감각에 대한 관념적 내용은 무한함과 우주와의 유대감일 것이다(238).

정신 영역에서는 원시적인 것이 이후 변형과 나란히 보존된다. 대개 발달 과정에서 원시적 요소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달한다. 어떤 태도나 충동은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지만 다른 부분은 계속 발달한다. 모든 기억은 보존되고 적절한 상황에서 그 기억을 다시 한번 끌어낼 수 있다(239). 정신생활에서 과거의 것은 보존될 수도 있고 <반드시> 파괴되지는 않는다. 예외가 아니라 원칙이다.

어떤 느낌이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으려면 그 느낌 자체가 강한 욕구의 표현이어야 한다. 유아기의 무력함과 아버지에 대한 동경에서 종교적 욕구가 유래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싶은 욕구보다 더 강한 욕구가(243) 없다. 종교적 태도의 기원은 유아기의 무력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244).

 

2. 행복이란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그 행복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인생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쾌락 원칙의 프로그램이다. 처음부터 인간의 정신작용을 지배한다. 엄격한 의미의 행복은 극도로 억제되어 있던 욕구가 충족되는 것에서 오고, 일시적 현상으로만 가능하다. 인간은 오직 對照에서만 강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상태에서는 거의 즐거움을 얻지 못(248)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이미 제한되어 있다. 불행을 경험하기가 훨씬 쉽다. 우리 자신의 육체, 외부 세계, 타인들과의 관계라는 세 가지 숙명적으로 불가피한 고통이 우리를 위협한다. 쾌락 원칙 자체도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아서 절도 있는 현실 원칙으로 바뀐다(249).

인간이 행복을 얻고 고통을 막기 위한 방법

중독

우리 유기체에 가장 효과적인 화학적 방법

조증

우리 몸의 화학 작용, 마취된 것과 비슷한 상태, 쾌감을 비교적 쉽게 발산시키는 상태와 비교적 어렵게 발산시키는 상태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불쾌감에 대한 감수성도 줄어들거나 늘어남

리비도 경제학에서 확고한 지위

흥분제

당장의 쾌감과 외부 세계로부터의 독립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게 함

요가

고통방지법은 욕구의 내적 원천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것, 감각 기관과는 관계가 없게 되며 극단으로 치달으면 본능을 완전히 죽이는 방지법

충동 제어

현실 원칙에 복종하는 좀 더 고귀한 정신 작용

승화

리비도의 방향을 돌리는 것, 예술가, 과학자 부류의 만족인데 강도가 약하며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약점, 이 방법은 내적 정신적 작용에서 만족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외부 세계에서 독립시키지만 현실과의 관계가 더욱 느슨해짐.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음. 이 환상의 영역은 상상력의 세계이며 예술작품을 즐기는 것임(253)

은자

행복해지려는 현실과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인데 아무것도 얻지 못함

종교

현실을 망상에 따라 개조하여 행복을 확실히 손에 넣고 고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상당수 사람들이 공동으로 노력하는 경우, 집단 망상으로 분류되나 공유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망상으로 인식하지 못함

사랑

사랑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만드는 삶의 방식, 성애는 압도적인 쾌감을 경험하게 하고 행복 추구의 원형을 제공. 사랑을 잃었을 때만큼 무력하게 불행할 때도 없다는 약점

미학적 태도

미를 즐기는 것은 감각을 가볍게 도취시키는 성질, 미는 성적 감각의 영역에서 유래, 미와 매력은 원래 성적 대상의 속성, 미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성기가 아니라 부차적인 성적 특징임.

우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제한된 의미에서의 행복은 개인의 리비도 경제학의 문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황금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적 소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리비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변형되고 재배치되는 과정을 제대로 겪지 못한 사람은 외부 상황에서 행복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려운 일에 직면해서 대리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마지막 삶의 방식을 신경병으로 도피하는 것이고, 열심히 행복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만성적 중독이 낳는 쾌감 속에서 위안을 찾거나 절망적 형태의 반항을 시도할 수도 있다.

종교는 삶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현실 세계의 그림을 망상으로 왜곡시키는데, 본질적으로 반지성적이다(258). 종교는 인간을 강제로 심리적 유아 상태로 묶어 놓고 집단 망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사람들을 신경증에서 구제하는데 성공하나 그 이상의 성공은 거두지 못한다. 확실하게 행복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도 없다. 종교조차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3. 문명의 본질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책임의 대부분은 문명에 있으며 문명을 포기하고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면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고통의 원천에서 오는 위협에 대해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이 바로 문명의 일부다(260).

문명의 적대적인 두 요소는 기독교 신앙이 이단 종교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이다. 지상의 생활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낮은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또 항해가 진행되면서 원시적 민족이나 종족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였다. 유럽인에게는 이들이 소박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복잡한 문화적 요구가 없는 탓으로 생각했다. 사회가 자신의 문화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요하는 욕망 단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신경증 환자가 된다는 사실과 사회의 요구를 폐지하거나 줄이면 다시 행복해질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고 보았다(261).

몇 세대동안 인간은 지배권을 확립했으나 더 많은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지 못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인간 행복의 <유일한> 필수 조건도 아니다(262). 행복은 본래 주관적인 것이다(263).

문명은 동물적 상태의 삶과 우리의 삶을 구별해주고, 인간을 자연에서 보호해주고 인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해 주는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하는 규제와 성취의 총량을 가리킨다(264).

문명의 특징(260).

첫번째

불에 대한 지배력 획득, 도구 사용, 주거지 세움. 인간은 온갖 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체 기관을 완전하게 하거나 신체 기관의 기능에 대한 제한을 제거한다.(모터, 배와 비행기, 안경, 망원경, 현미경, 사진기, 축음기, 전화, , )

오래전에 인간은 전지전능이라는 이상적 개념을 형성했고 이를 신으로 구체화했다. 소망이나 금지된 모든 것을 신의 속성에 부여했다. 신들은 문화적 이상이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신이 되었다. 일종의 인조신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문명에게 아름다움과 청결과 질서를 요구한다. 질서는 일종의 강박적 반복행동이며 정신력을 낭비하지(268) 않고 공간과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두번째

문명이 고도의 정신 작용-인간의 지적·학문적·예술적 성취-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하며 지도적 역할을 부여한다. 종교 체계(가장 중요한 것), 철학의 고찰, 인간의 <이상>-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완전성에 대한 인간의 개념과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요구- 등이다.

세번째

인간의 상호관계를 규제하는 방식(270), 개인의 힘이 공동체의 힘으로 대치되면서 문명 시작, 개인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 문명의 필수 조건은 정의, 평등의 보장, 법의 지배 자유에 대한 욕망은 문명에의 적개심의 토대가 된다. 이것은 문명 전체에 저항한다. 인류의 노력은 개인의 요구와 집단의 문화적 요구의 타협안을 찾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272).

문명의 발달과정이 인간의 본능적 기질에 변화를 일으키는데 개인의 경우 본능 대신 다른 것이 성격으로 나타난다. 예로 <항문 성격>은 검약과 질서 의식, 청결벽을 낳는다. 또 승화는 전적으로 문명이 본능에 강요한 변화다(273). 문화적 <욕구 단념>은 인간의 사회 관계 대부분을 지배한다.

 

4. 문명의 발달은 어떻게 일어났고 무엇이 발달 경로를 결정했나?

문명의 결정적 변화는 직립보행 자세의 채택에서 시작되었다. 후각적 자극의 가치가 떨어지고 월경 중인 여자를 격리하는 시대를 거쳐 시각적 자극이 우세해지고 생식기가 눈에 띄게 되는 시대까지, 다시 가족이 형성되는 시대를 거쳐 문명이 시작되었다(32)(275).

인류의 공동 생활은 노동에 대한 강요와 사랑의 힘을 갖고 있었다. 후자는 성적 대상인 여성을 빼앗기기 싫어하게 만들고 여성이 자식을 빼앗기기 싫어하게 만들었다. 에로스(사랑)과 아난케(숙명)는 인류 문명을 낳는 부모가 되었다(277).

인류와 세상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지만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 보편적 사랑은 대상을 부당하게 대우함으로써 사랑이 지닌 고유한 가치의 일부를 상실한다. 게다가 모든 인간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토대인 사랑은 직접적인 성적 만족을 단념하지 않는 원래의 형태와 목적 달성이 금지된(278) 정애(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감정)라는 수정된 형태로 작용한다. 모든 문명에서 사랑은 강력하게 사람들을 묶어 준다. 목적 달성이 금지된 사랑은 가족 밖으로 확대되어 배타성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인 <우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랑이 문명의 이익과 대립하게 되고 문명이 상당한 제약으로 사랑을 위협한다. 이것은 가족과 공동체 사이의 갈등 때문이다. 가족은 개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279).

여자들은 가족과 성생활의 이익을 대변하고 문명과 관련된 일은 남자들의 일이 된다. 문명은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할 수 없는 충동의 승화를 강요한다. 남자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리비도를 알맞게 분배해야 한다. 다른 남자들과 끊임없는 교류 때문에 남편과 아버지 의무에서 멀어지고 그래서 여성은 문명에 적대적이 된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남자의 성생활 제약 중 가장 과감한 제약이며 터부와 법률, 관습은 여자에게도 더 많은 제약을 부과한다(280).

문명은 사회 경제 체계에도 경제적 필요의 법칙을 적용하며, 착취당한 계층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엄격한 예방 조치를 취한다. 유아 성욕의 발현을 우선적으로 금지된다. 성기를 사용하지 않는 성적 만족은 성도착이라 하여 금지된다. 인간의 선천적, 후천적 성적 소질을 무시하는 것으로 심각한 불공평의 원인이 된다. 이성간의 성애도 합법성과 일부일처제에 대한 강요라는 형태를 취한다(281).

사회의 금지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데도 문명인의 성생활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성생활 중 하나의 기능만 하도록 쇠퇴 과정을 밟고 있다(282).

 

5. 공격 충동과 문명에의 불만

문명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리비도적으로 한데 묶으려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한 동일시를 확립하고 우정으로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목적 달성이 금지된 리비도를 대규모로 불러일으킨다. 이를 위해 성생활을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상적 요구는 그 단서다(285). <원수를 사랑하라>네 이웃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네 원수이기 때문에, 너는 네 몸처럼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이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와 동일하다. 인간의 공격 성향은 이웃과 우리의 관계를 저해하고, 문명에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강요하는 요인이다. 인간의 원초적 상호 적개심 때문에 문명 사회는 끊임없이 붕괴 위기를 맞고 있다. 공격 충동의 표출을 억제하기 위해 동일시와 목적 달성이 금지된 애정 관계를 부추기기 위한 수단을 사용하고, 성생활을 제한한다. 이상적인 명령이 정당화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의 이러한 노력은 지금까지는 많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90).

공산주의자들은 사유 재산이 폐지되고 모든 재화가 공유화되어, 모든 사람이 재화를 누리는 데 참여할 수 있게 되면 인간들 사이의 악의와 적개심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의 이런 심리학적 전제는 환상에 불과하다. 사유재단을 폐지해도 공격 충동이 악용하는 힘과 영향력의 차이를 바꿀 수 없다. 또 공격 충동은 재산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므로 공경 충동의 본질을 바꿀 수도 없다(291).

인접한 공동체끼리 반목하는 것은 공격적 성향을 비교적 해롭지 않고 편리하게 만족시키는 방법이고 그 덕택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더 쉽게 단결할 수 있다.

사도 바울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기독교 토대로 삼은 것은 기독교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배척하게 된 것은 필연적

로마인의 종교

국가적 관심사, 국가의 생활 기반에 사랑을 두지 않아서 종교적 편협함이 없었다.

게르만족 세계 지배

완전하게 해주는 보충물로 반유대주의를 필요로 함.

러시아의 공산주의 건설

부르주아에 대한 박해에서 심리적 뒷받침을 찾음

문명은 인간이 성욕만이 아니라 공격 충동에도 희생을 강요한다면 인간은 문명속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293).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생활 설계도를 요구하지만 현재의 문명 상태가 그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며 피할 수도 있는 수많은 고통을 방치한다고 불평한다. 당연한 불만이다. 문명의 본질 속에는 장애가 존재한다. 충동을 제한당하는 것 외에 <집단의 심리적 빈곤> 상태가 생겨날 위험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의 유대가 구성원들 사이의 동일시로 이루어져 있고 지도자들은 집단 형성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중요성을 얻지 못할 경우 이런 위험이 크다(294).

 

6. 공격충동과 죽음 충동

정신 분석학의 충동 이론은 절대적이며 그 출발점은 식욕과 사랑이다. 식욕은 개체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충동을 대표한다. 사랑은 대상을 얻으려 애쓰는 것이며 주요 기능은 종족 보존이다(295). 자아 충동과 대상 충동은 서로 대결하며 리비도는 대상 충동의 에너지를 지칭한다. 이 대립은 자아 충동과 사랑이 대상에게 돌려진 <리비도적> 충동 사이에 성립된다. 대상 충동 중 가학적 충동은 리비도적 목적이 전혀 없는 지배 충동과 유사하다. 그러나 애정이 잔인함으로 바뀔 수 있지만 분명 성생활의 일부이므로 지배 충동과는 다르다. 신경증은 자기 보존 욕구와 리비도의 요구 사이의 투쟁의 결과이다. 이 투쟁에서 자아는 승리를 거두지만 그 대가로 심한 고통과 욕망 단념을 치러야 한다.

나르시시즘에 있어 리비도에 정신적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자아 자신이다. 자아는 사실상 리비도의 고향이며 여전히 리비도의 본거지로 존재한다.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는 대상으로 돌려지고 대상 리비도가 되며 대상 리비도는 또다시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로 바뀔 수 있다(296).

생물 개체를 보존하려는 충동과 그것을 점점 큰 단위로 결합시키려는 충동 이외에 그와는 정반대인 그 단위를 해체하여 원래의 무기물 상태로 돌려보내는 충동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죽음 충동이다. 생명 현상은 이 두 가지 충동의 협력 또는 상호 대립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 충동의 일부가 외부 세계로 돌려져 공격과 파괴 충동으로 나타난다. 자기를 파괴하는 대신 다른 것을(297) 파괴한다는 점에서 죽음 충동 자체를 강제로 에로스화 할 수 있다. 반대로 외부에 대한 공격성을 제한하면 은밀한 자기 파괴가 촉진될 것이다. 두 종류의 충동은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비율로 혼합되어 나타나며 그 비율도 끊임없이 달라진다. 사디즘은 사랑의 충동과 파괴 충동이 뒤섞인 것이고 마조히즘은 내면으로 돌려진 파괴 본능과 성욕의 결합이다(298).

죽음 충동과 에로스의 관계 및 그 충동의 본질을 가장 뚜렷이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사디즘이다. 죽음 충동이 성적 목적을 왜곡하면서도 성 충동을 만족시키지만 맹목적인 파괴성의 경우에도(300) 충동의 만족이 강렬한 나르시시즘적 쾌감을 수반한다. 파괴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은 전능에 대한 자아의 오랜 원망을 총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격 충동이 문명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 문명은 에로스에 봉사하는 과정이며 개인가족종족, 민족, 국가를 결합시켜 인류로 만든다. 인간의 타고난 공격 충동이 이 과정을 방해하는데 이것은 죽음 충동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문명은 인류를 무대로, 에로스와(301) 죽음, 삶의 충동과 파괴 충동 사이의 투쟁이라는 형태를 띤다.

 

7. 죄책감

문화적 투쟁이 없는 동물들의 경우 환경의 영향과 내부에서 서로 충돌하는 여러 충동들이 일시적인 균형 상태에 도달해서 발전이 정지되었을 수 있다(302).

개인은 자신의 공격 충동을 무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안으로 돌려 내면화한다. 실제로는 공격 충동이 나온 곳으로 돌려보내진다. 즉 자신의 자아로 돌려진다. 초자아로서 <양심>의 형태로 자아에 대해 가혹한 공격성을 발휘한다. 엄격한 초자아와 그 지배를 받는 자아 사이의 긴장을 죄책감이라고 한다. 죄책감은 자기 징벌의 욕구로 나타난다. 문명은 개인의 공격성을 약화시키고 무장을 해제하는 한편 개인의 내부에 공격성을 감시하여 개인의 위험한 공격 욕구를 통제한다(303).

무엇인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의 영향력이다. 이에 복종해야 할 동기는 인간의 무력함과 타인에의 의존이다. 사랑의 상실에 대한 불안인데 사랑을 잃으면 다양한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없게 되고 강한 타인에게 처벌당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사랑을 상실하게 할 우려가 있는 것은 모두 다 나쁜 것이다. 이 단계의 죄책감은 <양심의 가책>이라기보다 <사회적> 불안이다(304). 중대한 변화는 초자아의 확립을 통해 권위자가 내면화할 때에만 일어난다. 이때부터 양심이나 죄책감이 의미가 있다. 초자아는 죄를 지은 자아를 똑같은 불안감으로 괴롭히고, 외부 세계가 그런 자아를 처벌하게 할 기회를 노린다(305). 불운-외부의 힘에 의한 욕망의 좌절-은 초자아의 일부인 양심의 힘을 크게 강화한다. 불운이 닥치면 인간은 영혼을 찾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양심의 요구를 높이고, 자제를 서약하고, 속죄 행위로 자신을 징벌한다(306).

죄책감의 첫 번째 근원은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이고 두 번째는 초자아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전자는 충동 만족을 단념하도록 강요하고 후자는 단념에다가 징벌까지 요구한다(307). 그러나 충동을 만족시키고 싶은 원망은 지속되고 초자아에게 숨길 수 없어 충동을 자제해도 죄책감은 생긴다. 이것은 초자아의 확립(양심의 형성)에 경제적으로 불리한 요인이 된다. 외부에서 올지 모르는 불행은 끊임없는 내적 불행, 즉 죄책감의 긴장으로 바뀐다(308).

 

모든 충동 단념은 양심의 역동적 원천이 되고 충동을 단념할 때마다 양심은 더욱 엄격해지고 까다로워지는 것이다. 공격 충동의 경우 공격 충동을 만족시키기를 단념하면, 좌절된 공격 충동을 초자아가 모두 떠맡아서 초자아의 공격성이 높아진다. 양심이 처음 갖게 되는 공격성은 외부 권위자의 엄격함을 연장한 것이다(309). 공격할 수 없는 권위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그 권위자를 자기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권위자는 이제 그의 초자아로 변하여 공격성을 모두 소유하게 된다. 초자아가 처음에 갖는 엄격함은 대상의 엄격함이 아니라 자신이 공격 욕구를 나타낸다. 어린이의 보복적 공격성은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징벌적 공격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초자아의 엄격함은 처벌의 엄격함과 관련 없다. 초자아의 형성과 양심의 발생에는 타고난 기질적 요소와 현실적 환경의 영향이 함께 작용한다(311).

후회는 실제로 저질러진 행위와 관계있을 뿐이고 그 행위가 저질러지기 전에 이미 <양심>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후회는 일상적인 현상으로 후회로 말미암은 죄책감은 정신분석에서 다루지 않는다(313).

죄책감은 양가 감정에 의한 갈등의 표현, 즉 파괴 또는 죽음의 충동과 에로스 사이에 벌어지는 영원한 투쟁의 표현이다. 이 갈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나타나고 양심을 확립하여 최초의 죄책감을 만들 수밖에 없다. 공동체를 점차 확대하면 갈등의 형태는 과거에 의해 결정되고, 갈등은 갈수록 강화되어 죄책감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명은 인간 내면의 성 충동에 복종하여 인간을 긴밀한 집단으로 통합하려 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점점 강화해야만 집단 형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문명이 가족에서 인류 전체로 나아가는 필연적인 발달 과정이라면 사랑과 죽음 사이에 벌어지는 영원한 투쟁의 결과, 죄책감의 증대는 문명과 밀접한 관계로 얽힐 수 밖에 없다(314).

 

8. 문명적 초자아

죄책감은 근본적으로 불안의 한 변종이며 나중 단계에는 <초자아에 대한 불안>과 완전히 일치한다. 모든 증세의 배후에는 불안이 숨어있지만 의식을 온통 지배해버리기도 하고 완전히 모습을 감춘 무의식적 불안이기도 하며 느낌이라는 불안의 가능성일 때도 있다. 결국 문명의 소산인 죄책감도 죄책감으로 인식되지 않고 대부분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거나 <불쾌감>이나 불만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317).

종교는 이 죄책감(원죄)에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이 제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인류 공통의 죄를 혼자 떠맡는 방식에서 원초적 죄악이 처음 생겨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추론할 수 있다(318).

후회는 죄책감을 느낄 때 자아의 반응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서 죄책감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불안의 감각적 재료가 약간 변형된 형태로 포함되어 있다.

죄책감은 역사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시점에서 공격 충동이 행위로 실현된 결과로 시작되었다(319).

모든 신경증 환자는 무의식적 죄책감을 감추고 있으며 죄책감은 신경증 증세를 징벌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증세를 더욱 강화한다. 즉 충동적 경향이 억제되면 리비도적 요소는 증세가 되고 공격적 요소는 죄책감으로 변한다(321).

문명 과정은 에로스가 할당하고 아난케(현실의 필요성)가 부추기는 과업의 영향 하에 생명 과정이 경험하는 변화다. 이 과업이란 개개의 인간을 리비도적 유대로 묶인 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이다. 개인의 발달 과정은 행복을 얻으려는 욕구와 공동체 안에서 타인들과 결합하려는 욕구의 상호 작용의 산물이다. 전자를 <이기적>이라하고 후자를 <이타적>이라 하는데 주로 이기적 요구가 강조되고 이타적 욕구는 견제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문명의 과정은 개개의 인간을 통합하여 단일 집단을 창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둘의 발달 과정이 일치할 필요가 있을 때는 개인의 발달 과정이 공동체와의 결합을 목적으로 할 때뿐이다(323). 둘 사이의 투쟁은 원초적인 에로스와 죽음 충동 사이의 모순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리비도 경제학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으로서 개인에게는 결국 화해로 끝날 것이고 문명이 개인의 삶을 아무리 억압한다 해도 결국 문명과 개인 사이에도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공동체도 개인과 같이 문명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초자아를 발달시킨다. 문명의 초자아는 위대한 지도적 인물들(압도적 정신력 소유자, 여러 충동 중 하나를 강력하고 순수하게 발현한 자)이 남긴 인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버지 살해라는 원초적 사건을 가진 신화가 부활시킨 가장 감동적인 예가 그리스도이다(324).

문명적 초자아도 <양심의 불안>이 존재한다. 인간의 상호관계에 윤리를 요구한다. 실제 윤리는 모든 문명의 가장 큰 약점으로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윤리는 그 약점을 치료하려는 노력이다. 문명적 초자아는 명령을 내릴 뿐, 사람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어떤지는 문제삼지 않는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인간의 공격 충동을 막는 가장 강한 억지책이고, 문명적 초자아의 비심리학적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지만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거대하게 부풀리면 가치가 떨어질 뿐,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는다. 명령에 복종하기 어려울수록 복종하는 것이 더 많은 가치를 갖게 된다고 훈계할 뿐이다. 공격 충동을 막는 억지책도 공격 충동 못지않은 불행을 초래한다면 공격 충동은 문명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다(326).

인간의 가치 판단은 행복해지고 싶은 원망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자신의 환상을 논증으로 뒷받침하려는 노력이다(328).

인류에게 숙명적인 문제는 문명 발달이 인간의 공격 충동과 자기파괴 충동에 의한 공동 생활의 방해를 억누르는 데 대한 성공의 여부에 있다(329).

 

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 (21.02.24)바다사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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