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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생각과 토론의 자유

 

정부와 인민이 완전히 하나이고, 인민의 지시가 없는 한 정부가 그들의 자유를 강제로 구속하는 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상정하자. 나는 인민이 스스로든 정부를 통해서든 그렇게 강제할 권리는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권력은 어떤 정당성도 얻지 못한다(p. 50).

 

근거

어떤 의견을 폐기하고자 할 때, 우리는 결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여전히 옳지 못하다.

 

권력을 동원해서 억누르는 의견이 사실은 옳은 것일 수 있다(P. 51).

만일 그 의견을 짓밟으려는 사람들이 특정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확신 아래 다른 사람들이 들어볼 기회조차 봉쇄해버린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전제하지 않는 한 일체의 토론을 차단해버릴 수는 없다. 사람들이 흔히 이런 착각에 빠지는 탓에 자기와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 집단이 판단을 확신하게 되는 이유

절대적인 권력자나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데 익숙한 사람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 막무가내로 그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

각자의 직접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정당, 집단, 교회, 계급 속 보통 사람들

세계를 국가나 시대처럼 광범위하게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들

 

각 시대는 수 많은 의견을 잉태하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런 의견들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판명나는 경우가 많다(p. 53).

 

반론: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으므로 어느 누구도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직무상 해야 할 일이라면 비록 잘못된 개연성이 있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입각해서 처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p. 54).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어떤 목적을 향해 나가는 것이 좋은지 판단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이 자기 자신의 행동을 인도하는 진정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음을 믿어도 된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믿어야 한다(p. 55).

 

1) 온갖 논박을 거쳤지만 허점이 발견되지 않는 어떤 생각을 진리라고 가정하는 것과

2) 아예 그런 논박의 기회를 봉쇄하기 위해 그것을 진리로 가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 생각에 대해 철저한 부정과 비판 과정을 거친 뒤, 그래도 살아남은 생각에 입각해서 어떤 행동에 나선다면 그 행동의 타당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만 하면 보통 사람이라 해도 인간 능력이 허용하는 한 최고 수준의 이성적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p. 56-57).

 

인류가 발전시켜온 생각이나 일상적인 행동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우리의 삶이 더 나빠지지 않고 지금 이 상태로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간의 지적 능력 속에 들어 있는 그 어떤 힘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님.

지적 또는 도덕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보여주는 모든 자랑스러운 것들의 근원, 즉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인간은 토론과 경험에 힘입어 자신의 과오를 고칠 수 있다.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토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잘못된 생각과 관행은 사실과 논쟁 앞에서 점차 그 힘을 잃게 된다(p. 56-57).

 

잘못된 판단을 시정할 수단을 언제나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판단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의견이 상이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 로마 카톨릭 시성식의 악마의 변’(p. 58).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유 토론의 소중함을 인정하면서도 극단적인 상황에는 그 원칙을 외면한다(p. 59). 극단적인 경우에 소용없는 이성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쁜 인간들을 윽박지르고 못된 짓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발상을 따르게 되면, 어떤 주장이 진리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것이 유용한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토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된다(p. 61).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어떤 주장을 공론에 부치지 못하도록 차단하난 것이 얼마나 나쁜 결과를 낳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p. 62).

- 소크라테스라는 한 개인이 법률 당국과 대중 여론을 상대로 의미심장한 싸움을 벌였던 사건: 불경와 부도덕이라는 죄목 아래 죽음(p. 64).

예수의 사형: 신을 모독한 죄(p. 6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모든 철학자와 지배자를 통틀어 가장 자애롭고 온화한 사람인 그가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에서 그리스도교 박해 허용(p. 68-69).

 

어느 누구든지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더 현명하고 더 나사고 자부하지 못한다면,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가정을 던져버려야 한다(p. 70).

 

아무리 박해를 가하더라도 진리 그 자체에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으므로 진리를 박해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에 대해, 나쁜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진리가 수용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를 발굴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그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좋게 말할 수가 없다(p71).

 

진리가 언제나 박해를 이기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하나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 역사적인 모든 경험이 입증하듯이 사실은 유쾌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진리가 박해 앞에 무릎을 꿇고 만 숱한 사례를 보여준다(p. 72).

 

루터 이전에 있었던 적어도 스무 번의 종교개혁

1857년 영국 콘월의 순회재판소에서 그리스도교를 비방하고 징역형을 선고 받음.

올드 베일리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가 배심원 자격 박탈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을 부인하는 사람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과 마음 속 깊이 담고 있는 감정, 이런 것들이 영국의 정신의 자유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오랫동안 사람들은 법적 처벌을 받고 나면 사회적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이런 현실적인 두려움이 너무 컷기 때문에 영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의견을 자유롭게 공표할 수가 없었다(P. 77).

 

우리의 사회적 불관용은 사람을 죽이거나 어떤 생각을 뿌리째 잘라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관용 앞에서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게 된다. 또는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된다(p. 78).

 

만일 활동적이고 탐구심 강한 상당수의 지성인들이 스스로 확신하는 것들의 일반적 원칙과 근거를 가슴 안에 그냥 묻어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주장에 대해 내심으로는 수긍하지 못하면서도 일반 대중 앞에서는 억지로 맞장구치는 상황이 되면, 한때 지성계를 아름답게 수놓았던 개방적이고 두려움 없는 인품의 소유자들과 일관된 논리를 자랑하는 지식인들이 더 이상 배출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저 상식적인 것들을 따라가는 사람이나 진리를 멋모르고 추종하는 사람만 남게될 것이다(p. 79).

 

위대한 사상가를 위해서만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뛰어난 사람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 그런 자유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각자 타고난 능력만큼 정신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p. 81).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크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란을 봉쇄하게 되면 인간 정신의 깊은 곳을 뒤흔드는 일이 생길 수 없다(p. 82).

18세기 후반의 사상 운동: 괴테, 피히테. 자유로운 토론을 금지하는 권력의 사슬이 작동하지 않음.

 

2. 비록 자기의 생각이 옳다 하더라도 충분히 자주, 그리고 기탄없이 토론을 벌이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p. 83).

 

자기 생각으로는 어떤 생각이 매우 진실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그것이 토론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편견일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이는 이성적인 사람의 진리관이 될 수 없다(p. 84).

수학: 불가피하게 생각의 차이가 생기는 분야에서는 상반된 두 의견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다음에 진리를 찾아야 한다.

자연과학: 왜 다른 주장이 진리가 될 수 없는지 증명해 보여야 한다.

도덕, 종교, 정치, 사회관계, 삶에 관한 문제: 문제가 되는 주장을 지지하는 논거의 4분의 3은 자신과 관점이 다른 의견을 비판하는데 집중(p. 85).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그 장단점을 꿰고 있지 않으면 왜 자신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 설명하기 어려움(p. 86).

 

문제가 되는 것의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정학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하는 진리를 결코 얻을 수 없다.

 

진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두 주장에 똑같이 귀를 기울이고, 각자의 가장 강력한 논거를 편견 없이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p. 87).

 

도덕과 인간을 둘러싼 각종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이, 심지어 악마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는 사람까지도, 자유롭게 온갖 논리를 동원해서 자기 주장을 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p. 88).

 

별 생각 없는 일반 사람들은 진리의 분명한 근거만 배우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그냥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최소한의 정도로만 이해하게 되어도 쉽사리 만족한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자유로운 토론의 필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토론을 반대하는 사람들 조차도 특정 문제를 놓고 제기되는 모든 비판에 대해 만족스러운 정도의 답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p. 89).

 

) 카톨릭 교회의 방식: 사람을 둘로 나눠 한쪽은 이성적 확신에 따라 교리 수용, 다른 한쪽은 믿음에 입각해서 무조건 수용. 후자에게 반대편의 주장에 효과적으로 답변할 수 있도록 이단자들이 쓴 금서 허용.

 

자유토론을 하지 않는 것이 지적인 측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크게 해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 토론이 없다면 단순히 그 주장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모르게 된다. 그 의미를 둘러싼 몇몇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고 만다(p. 91).

 

어떤 이론, 어떤 교리든 그 창시자들, 그리고 그들의 직계 제자들은 자신의 이론과 교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른 이론이나 교리와의 싸움에서 이겨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p. 91).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든가 아니면 세상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대신, 마지못해 묵인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할 수만 있다면 반대쪽 주장에 귀를 막는다(p. 92).

 

이때부터 그 이론의 생명력은 쇠퇴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확신 앞에서도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며, 우리 마음과 정신을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상태로 이끄는 데만 신경을 쓰게 된다(p. 93).

 

세를 확장해나가는 종교의 경우, 교리를 둘러싸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며, 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p. 97).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런 현상은 전통적인 모든 교리, 즉 도덕이나 종교는 물론이고 인생에 관한 지식이나 지혜를 담고 있는 것들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p. 98).

 

우리는 우리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어떤 한 진리를 더 생생하고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진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다(p. 99).

 

소크라테스의 변증법(p. 100)

부정형 질문으로 구성

어떤 문제에 대해 그 본질은 모른 채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만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는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나아가 스스로의 무지를 깨달은 뒤 그 의미와 논거를 확실하게 파악한 바탕 위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고안된 최상의 기법

 

선생이나 책을 통해서 주입식으로만 지식을 얻는 사람은 엉터리 자기만족의 유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가 되는 사안의 양쪽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사상가들까지도 양쪽의 견해에 대해 두루 잘 아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p. 101).

 

만약 일반적인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법이나 여론이 이의 제기를 허용할 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p. 102).

 

18세기의 배운사람들은 근대인과 고대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잘못된 전제 아래, 그런 차이 때문에 결국 근대가 고대보다 결정적으로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소의 역설은 일방적인 의견을 가진 대중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주고, 그들의 생각이 더 나은 형태로 재구성되게 하며, 새로운 힘을 얻게 해준다.

루소의 역설: 사회계약론강제로 자유롭게 한다.” /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자연 상태의 인간이 더 우월하다.”

 

정치에서도 정당들이 무엇은 바꾸고 무엇은 지켜야 한다는 분명한 판단 아래 질서와 진보를 모두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인 그릇이 커질 때까지는, 질서 또는 안정을 추구하는 정당과 진보 또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당 둘 다 있는 것이 건전한 정치적 삶을 위해 중요하다는 생각이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p. 105).

 

민주주의와 귀족정치, 재산과 평등, 협력과 경쟁, 사치와 절제, 사회성과 개별성, 자유와 규율, 그리고 일상적인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상반된 주장들이 그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고 똑같은 비중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각 주장에 담긴 내용들이 빛을 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p. 106).

 

적대적인 깃발 아래 모인 양쪽이 서로 치고받는 과정을 거치고야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막 거론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두 가지 의견 가운데 하나가 다른 쪽 의견보다 단순히 묵인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더 장려되고 적극적으로 인정될 만한 주장이라 해도, 그것은 특정 시대나 장소의 일부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교 도덕이 완전한 교리로서 선포된 것인지 또는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어도 되는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p. 107).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하는 충고도 그리스와 로마의 도덕에 바탕을 둔 것이 많았다. 노예 제도의 정당성을 명백하게 인정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교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은 예수나 사도들이 세운 것이 아니고, 그들보다 훨씬 뒤 카톨릭 교회가 초기 500년에 걸쳐 조금씩 체계화 한 것이다(p. 108).

 

그리스도교 도덕은 반동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이교도들과의 투쟁을 통해 기본 성격이 형성되엇다고 할 수 있다. 그 기본 지향은 긍정적이라기 보다 부정적이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이다. 고귀함보다는 결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선을 활기차게 추구하기보다는 악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계율에는 어떤 일을 하라는 것보다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다(p. 109).

 

그 결과 그리스도교인들은 고대의 뛰어난 인물들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이 되었다(p. 110).

 

그리스도교 교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줄 완전한 규칙을 찾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교 윤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띤 윤리 체계도 인류의 도덕적 쇄신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p. 112).

 

나는 있을 법한 모든 의견에 대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토론을 벌인다고 해서 종교적 또는 철학적 분파주의의 해독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p. 114).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네 가지 이유(p. 115).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그것이 어떤 의견인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전제하는 셈이 된다.

 

침묵을 강요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3.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 해도 어렵고 진지하게 시험을 받지 않으면 그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진리의 합리적인 근거를 그다지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그저 하나의 편견과 같은 것으로만 간직하게 될 것이다.

 

4. 그 주장의 의미 자체가 실종하거나 퇴색하면서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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