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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예찬알랭 바디우 2021.3.14. 바다사자

 

5. 사랑과 정치

Q. 정치가 왜 사랑과 동류?

정치에서는 다수로, 대중 속에서 평등을 창조해낼 수 있는 여부가 문제. 정치의 열망을 누르기 위해 정치의 지평에는 권력, 즉 국가가 존재함. 공동체적 사유-실천으로서의 정치와 경영과 규격화로서의 국가나 권력 사이에는 사랑 대 가족(소유와 이기주의의 기본단위) 사이와 마찬가지의 관계가 존재함(66)

사랑과 정치 둘 다 매 지점을 통하는 절차들을 갖게 되며 종착점과 시련을 혼동하지 않아야 함.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이 아님(67).

 

Q. 사랑의 정치를 고려하지 않는가?

사랑과 정치는 서로 뒤섞일 수 없음(68)

 

Q. 정치는 적들 간의 대립인가?

사랑이란 만남·선언·충실성이 차이를 창조적인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 정치는 이런 유형을 전혀 생산할 수 없으며 실상 지명된 적들만이 존재함.

정치적 사유에서 진정한 의미의 적이란 당신과 관계된 것이며 그 어떤 것이든, 그가 결정한 것을 당신이 조금도 참아낼 수 없는 그런 존재(69).

정치에서 적과 맞선 싸움은 행동을 구성하는 요소, 적은 정치의 본질에 속하는 것, 진정한 정치라면 확실한 적을 구별해냄. 반대로 사랑의 경쟁자는 완전히 외부에 있으며, 사랑을 규정하는 일에는 조금도 개입하지 않음. 질투는 사랑의 인공적인 기생물이며 사랑의 정의 안으로는 결코 진입하지 않음(70).

사랑의 난점은 어떤 적의 존재와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절차 속에 내재함. 차이의 창조적 놀이 안에 놓여 있는 것,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71).

 

Q. 사랑은 전쟁이 될 수도?

사랑의 절차는 늘 평화롭지 않음, 난폭한 물음,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가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이별 따위를 동반함(71).

사랑 역시 모순과 폭력의 체제를 갖추고 있음. 동일성으로의 충동을 차이와 충돌하게 조장하게 함(72).

 

Q. 사랑과 정치의 결부는 가능할까?

코뮤니즘속에는 공동체가 극단적인 모든 차이를 통합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유가 존재함. 여기에 있건 저기에 있건, 다른 곳에서 왔건 그렇지 않건, 어떤 언어로 말을 하고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갖추고 있건 이들이 코뮤니트스라는 형태의 정치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며 정체성 역시 사랑을 창조하는데 장애물이 안됨(72).

박애는 분명 차이들, 즉 적과 근본적인 경계를 긋는 대면을 동반하는, 정치적 과정에서 벌어지는 차이의 우호적인 공존과 관련함. 인터내셔널리즘에 포괄되는 개념임. 공동체가 실질적으로 자기 고유의 평등을 담당하면 가장 큰 차이의 간극들을 통합해낼 수 있음(73).

 

Q. 어떻게 기독교가 사랑의 경이로운 힘을 포착했나?

기독교는 보편이라는 초월적 개념으로 사랑의 밀도를 이용하는 최상의 예. 사랑의 시련과 타자의 시련 그리고 타자를 향하는 시선을 수용하면 지고의 사랑에 우리가 기여하게 되리라는 사유가 있음. 기발하고도 천재적인 발상. 공동체의 최고 관심이라는 명분으로 고통을 수용하도록 한 힘을 전적으로 교회에 유리하게끔 포착해 냄(74).

문제는 사랑을 초월성에다 곧바로 투사해버린 것. 사랑의 보편적 요소를 다소간 높이 끌어올려 그 중심을 초월적인 하나의 힘 위에 다시 붙들어 매 놓음.

사랑의 보편적 힘은 전체-타자나 초월성의 대타자없이 존재하는 것. 종교가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님. 오로지 제 자신만이 창조할 줄 안다고 주장하는 주관적인 상태와 강렬함의 원천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임. 기독교는 수동적이고 신앙적이며 복종하는 사랑으로 대치해버림(75).

 

Q. 클로델의 기독교적 사랑이 탈기독교화한 현대사회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사랑은 가능성이 아니며 오히려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 불가능성은 현세적이고 관계적인데 클로델은 두 개의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배치, 첫 번째는 둘이 현세적 불가능성을 경험하는 무대이고, 두 번째는 믿음의 세계에서 서로 화해하는 무대임(77).

첫 번째 무대의 시적 장치들은 완전히 기독교적이기도 하며, 사랑의 현세적인 힘과 함께 자신의 프로파간다(77)를 만듦. ”이 지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내세에서도 반드시 불가능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매우 초보적이지만 강력한 프로파간다임.

 

Q. 코뮤니스트적 가설을 다시 활성화함이 사랑의 재발명이 되는 이유는?

사랑을 정치적으로 사용할 때 종교에서처럼 전개되며 초월성은 당의 그것, 당을 통한, 당의 최고 지도자의 그것임(76).

사랑을 정치적 열정과 뒤섞지는 말아야 함. 정치적 문제는 증오를 통제하는 문제이지 사랑의 문제는 아님. 증오는 필연(79)적으로 적을 촉발시키는 열정임.

정치의 조직의 역할 중 하나가 증오에서 파생되는 모든 효과를 통제하고 취소하는 것임. 이 역할은 사랑이 아닌 지성의 문제이며 적에 대한 선명하고 제한된 정의를 부여하는 것임(80).

 

Q. 정치에서 사랑은 분리해야 하나?

코뮤니스트적 해방의 정치란 지양, 코뮤니스트적 사유, 사적 소유 욕구에 지배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사유, 자유로운 결사와 평등의 세계에 대한 사유의 부활이어야 함(80).

코뮤니즘속에는 사랑과 즉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가능성의 새로운 조건들이 사랑과 결부되어 있음(81).

 

Q. 투쟁적 사랑의 특수성이란?

사랑과 혁명적 참여 사이란 사유의 영향을 받아 차츰 참여로 변해가는 삶의 강렬함, 사랑에서 차이로 인한 질적으로 상이한 강렬함, 이 둘 사이에 주체들의 은밀한 방향 속에 있음(82).

사랑의 확신, 정치적 확신은 절대로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

정치와 사랑 사이의 조화를 발견해야 함(83).

사랑예찬5장 -바디우(21.3.1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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