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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철학사2』 이정우 2021.5.30. 바다사자
11장 사람의 마음
조선이 주자학 일변도로 흐른 것은 주희와 유구연을 조화시키고자 한 오징 등의 학문이 아니라 북방의 학문, 주자학을 강력히 확대해나간 허형 등의 학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자학은 신흥 왕조의 창건 시에 매력적인 학문이었다(747).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대부 지식인들이 권력의 주체로 선 신권 중심의 국가였다. 군주를 통어하면서 인민을 지배하는 문사-관료라는 유교 지식인들의 이상이 조선왕조에서 두드러지게 현실화되었다. 명과 조선의 관계는 주희적인 우주-위계적 세계관과 중화주의-를 실제 정치에서 체현한 관계였다(748).
조선의 정주학은 이언적에 의해 확고한 초석이 놓였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은 리/태극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했다. 이론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역설했다(749).
조선 성리학의 알파요 오메가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의 ’배경‘인 것이다(773).
§1. 사단과 칠정
조선 성리학은 16세기에 심화가 일어났다. 대표적 인물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이황의 리기론
이황은 현실 정치에 깊은 환명을 느끼고(기묘사화) ’치인‘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수기‘로 돌아가 수양과 교육·학문에 정진했다. 남을 바꾸려고 하(750)기보다는 우선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했다.
이황의 리기론은 주희의 리기론을 독자적인 방식을 변형한 구성이다(751). 리가 그 본체에 입각했을 때 정의도 계탁도 조작도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지묘한 작용에 입각해 말한다면 발할 수도 있고 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 고유의 ’용‘이 있기에 기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리는 ’허‘ 또는 ’무‘로 이해할 수 있지만 노불의 허·무가 아니라 실·유를 내장한 허·무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리의 이런 성격은 그 본체에서이고 그 작용에서의 리는 발할 수 있고 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를 두 겹으로 즉 그 본체와 작용에 입각해 분화시켜 보았으며 “움직임과 멈춤”을 물리적 운동이 아니라 리의 기능/작용으로 본 것이다. 나아가 “리가 기를 낳는다”고 했다(752).
이황의 세계는 물질적 차원과 생명적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의 생명이란 도덕형이상학적 이념성을 내장하고 있는 성리학적 생명 개념이다. 세계는 위대한 생명의 힘으로 충만한 세계이며 이 생명이 물질을 낳아 구체적인 세계가 영위되는 곳이다. 이러한 구도는 미발의 심을 ’성‘이라 하고 이발의 심을 ’정‘이라는 성리학 일반적 구도와 정합한다. 본연 형태의 생명 차원이 인간의 ’성‘이(753)라면 이 생명의 활동이 기를 낳음으로써 인간에게 생겨나는 것이 ’정‘이다.
이황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나눈다. ’성‘을 기준으로하면 기질지성 역시 성이다. 기질지성과 정은 다르다. 본연지성은 순수 생명=리이며 곧 성이다. 기질지성은 역시 성이되 리와 기가 합하여 작동하는 맥락에서의 성이다. 추상 개념이 아니라 현실 작동의 성이다. 정도 두 차원으로 구분된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성이 아니라 정이다(인의예지는 성이다). 정 역시 사단과 칠정으로 나뉜다. 성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정은 사단과 칠정으로 분화되어 이해된다.
이황은 수양론에서 특히 ’敬‘을 중시했는데 경은 미발 상태의 수양과 이발 상태의 수양으로 나뉜다. 미발은 ’존양‘, 이발은 ’성찰‘이다. 미발 상태에서는 존양과 계구를 통해 ’중‘을 추구해야 하고 이발 상태에서는 성찰과 궁리를 통해 ’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원적 구도에 입각해 리와 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성과 정, 지와 행 사이의 갈등과 조화를 사유하고자 했다. 지와 행의 합일을 직관적으로 확신하는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보았다(754).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정지운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했고 이황은 “사단은 리(755)의 발함이고 칠정은 기의 발함이다”로 수정한다. 정지운의 경우 발한 것은 사단과 칠정이고 발함의 터가 되는 것이 각각 리와 기가 된다. 퇴계의 발함의 주체는 리와 기이고, 그 발함을 통해 나타나는 변양태들이 사단과 칠정이 된다. 기대승은 이들의 이분법적 구분에 이의를 제기했다. 사단도 감정인 한 역시 철정과 같다도 본 것이다(756).
이황 | 기대승 |
-사단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주력(사단은 도덕적 생명의 위대한 의지다) -칠정에 리의 측면을 부여해 리의 힘을 보다 넓게 해석 -리를 아래에 깐 기를 논함 -기와 섞이지 않은 정과 섞인 정을 구분함, 본연지정과 기질지정을 구분한 것 -본연의 정인 사단과 기질의 정인 칠정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감정의 핵심을 잃게 된다고 봄 -칠정도 리와 기를 겸함 →사단의 순수 리적인 성격 역설 |
-사단도 기의 측면을 가진다고 봄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기에서 발현 -리와 기를 떼어 논하는 것 자체 거부 -칠정이 리와 기의 발현에 있음이 중심, 칠정을 기에 귀속시킨 것에 대한 반론 제기, 초점이 감정이란 어떤 경우든 리와 기에서 발현되는 것이라는 점→양자의 논의 방향이 엇갈리는 지점 |
합의의 방향 | |
-칠정 또한 리의 발현이기도 하다는 점 인정 -사단과 기/칠정이 ‘互發’ |
-모든 감정은 리와 기의 발현이지만 사단은 특히 리라는 근원에 가깝다는 것 -사단을 포함하는 칠정이 모두 리와 기에서 ‘共發’ |
논쟁의 결과 | |
인간의 감정은 도덕적 감정인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비-도덕적/인간적 감정인 칠정(희,노,애,락,애,오,구)로 나뉨. 모두 리와 기에서 연유한다. 리와 기에서 발현한 감정은 아직 순선한 도덕적 감정이지만 기가 강하게 작용하는 현실에서는 점차 비-도덕적 감정으로 화함. 현실에서 둘은 두 갈래로 나뉜다. 애초에 도덕적 감정은 리에서 나오되 기를 동반하는 것이었고, 비-도덕적 감정은 기에서 나오되 리를 동반하는 것임. |
§2. 인심과 도심
이이의 리기설
이이는 이황의 ’호발설‘을 논박한다. 사단은 칠정의 한 국면이며 당연히 ’氣發理乘‘이라는 보편적 진리에 따른다. 감정을 통어하는 것이 ’리승‘인 것, 사단도 칠정도 모두 ’기발이리승지‘=’기발이승‘이라는 하나의 이치/길을 따를 뿐 두 이치의 ’호발‘을 성립하지 않는다.(763).
실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기다. 리가 ’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리의 주재하에 기가 발현하는 것일 뿐 이발현의 이치인 리 자체가 발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리와 기는 하나이자 둘이요, 둘이자 하나이다(763).
이이 리기설의 독창적인 면은 ’理通氣局‘설이다. 리는 보편적 원리이며 그 원리가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곳이 기이다. 기가 내포하는 다질성이 보편적 리를 개별화한다. 개별화의 원리는 기에 있다. 리가 물처럼 보편적으로 편재해 있다면 기는 개별적인 그릇들처럼 그것을 일정한 모양새로 개별화한다. 그래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다. ’리일분수‘의 이치가 “월인천강”에 비유되는 것과 유사하다(764).
’리통기국‘은 이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765).
이황 | 이이 |
-리를 현실에 불러내 악과 싸울 수 있는 구체성을 불어넣고자 함 -현실과 직접 맞붙어 싸우는 도덕적 역능의 성격 |
세상의 개별성과 이질성을 리의 차원으로 올라가 그 차이들을 극복해낼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함 -리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존재론적 기준의 성격 |
이이는 기 자체에 본연의 차원을 설정, 본연의 기는 리의 순선함을 가리지 않는 기인데 발현하는 과정에서 탁해지므로 기를 순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도덕적 맥락에서의 수련이며 기의 본연 됨을 ’호연지기‘라고 했다. 이 기가 천지를 가득 메우면 리를 조금도 엄폐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 수양방법으로써 기질을 바꾸어나갈 것을 제시한다(765).
’矯氣質‘해서 본연의 성을 회복하는 것이 이이 수양론의 핵심. 중앙 정계에서의 활동을 거부하지 않는 것과 관련된다. 요동치는 정치 현실에서 ’시세‘를 파악, 현실에 질질 끌려 다니(766)는 기를 다스려 성으로 이끄는 ’교기질‘, 이런 노력을 통해 도달해야 할 경지인 ’중·화‘의 이상이 이이 실천철학을 구성했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이이와 우계 성혼(1535〜1598)과의 논쟁.
도심은 도덕적 마음, 인심은 현실적 마음이다. 인간에게서는 두 가지가 항상 갈등을 일으킨다. 성리학은 인간의 성선을 믿는다(768).
’인심의 도심‘의 개념은 『서경』에서 유래한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로지 정진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잃지 말라) 주희는 『중용장구』 서문에서 ’중‘을 위 구절과 연계하면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했고 이로써 ’도통‘ 개념을 정립하고 성리학 핵심을 이루는 사유 구도를 정립했다. 인심과 도심이 차이나는 것은 인심은 형기의 사사로움(개별성)에서 유래하고 도심은 성명의 올바름(보편성)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형기와(767) 성을 다 갖추고 있으나 양자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 있으니 정진하여 둘을 잘 구분하라 함이며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 반드시 도심이 몸의 주인되게 하고 인심이 명을 따르게 하라는 의미이다.
사단과 칠정을 택일이 아닌 정도의 문제로 본 이이에게 사단은 인심의 범주에 들어가며 도심은 미발의 성으로 파악된다. 성혼은 이황의 논리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사단칠정론은 ’정‘에 대한 논변, ’인심도심론‘은 ’심‘에 대한 논변이다. 사단칠정론의 ’정‘을 특화해 다룬 논의가 아니라 심=마음을 그 전체에 있어 도심과 인심으로 구분해 논변한 경우다. 인심과 도심을 수평적 대립으로 놓을 것인가 수직적 전개로 놓을 것인가에 있었다(768).
이이는 마음을 이성·감정·의지로 구분하고 이성은 리로서 보편적인 것, 감정과 의지는 기와 더불어 실제 발현함으로써 실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의지를 특화해 이성, 감정과 같은 위상을 부여하며 실존의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도덕적 힘으로 파악한다.
이이에게 도심이란 리에서 이반되지 않을 때 즉 성의 보존은 물론 칠정이 아직 기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의지가 역할을 다 하는 때라고 본다. 인심이란 본연의 성은 깔려있지만 발현한 국면에서 기의 주도가 강해져 칠정에서 사단의 측면이 흐려지고 의지도 미미할 때를 가리킨다. 둘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기를 다스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770). 도심과 인심은 심의 두 존재 방식일 뿐인 것이며 수평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전개/표현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 근원은 하나지만 현실에서의 흐름이 두 갈래인 것이다.
§2. 인성과 물성
인물성동이론
인물성동이론은 ’성‘(도덕적 본성, 마음의 미발 측면)을 둘러싼, 즉 미발 상태에서의 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사람과 동물들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한 논쟁으로 핵심은 미발 상태에서는 인·물이 ’동‘하고 양자가 ’이‘한 것은 이발 상태에서의 기의 문제라는 입장과 미발 상태에서 이미 인·물이 ’이‘하다는 입장의 대립이다.
이론(호서지역)의 대표는 남당 한원진(1682〜1751)(773)이다. 그에게 성은 몸을 갖추고 살아가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포착된 인간 본성이다. 어디까지나 기를 포함한 성이다.
존재자들의 본성 | |
첫 번째 층위 | 기가 개입하지 않은 차원, 천리를 공유하는 차원, 개념적 추상의 층위에서만 존재 |
두 번째 층위 | -인성 물성 구분되는 층, 인간이라는 보편자와 다른 종들 양분되는 층위 -각 종들의 본연의 성(기 자체의 본연의미)을 유지하고 있으며 모두 선하다, 자연 그 자체는 선한 것 |
세 번째 층위 | -개체화의 원리가 작동하는 층위, 개별자들 각각의 기가 고려되는 층위 -악이 구체적으로 섞여드는 층위 -인·물의 본질적 차이는 선함과 악함이 아니라 온전함과 편벽됨, 인간의 기는 온전한 기지만, 다른 종들은 편벽된 기인 것, 오행의기를 온전히 갖추지 못했음 의미, 오행의 기는 오상의 덕과 상응한다. 동물은 한가지 기만 트여있으나 인간만이 오상의 덕이 모두 트여 있는 존재 |
동론을 주장한 대표자는 외암 이간(1677〜1727)이다. 본연지성의 개념은 순수 리=성에서만 쓸 수 있다. 기질은 성일 수 없기 때문에 성으로 본다면 성 자체에 이미 악이 내장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기 자체를 선하다고 보는 입(775)장과 기는 악의 요소를 포함하며 순수 리만이 순선하다는 입장의 대립.
이간의 사유는 본연지성과 지질지정이다. 본연지성의 차원에서 인·물은 같다. 그러나 기질지정의 차원에서는 인·물이 다르며 개개의 인간, 동물이 다 다르다. 기의 본질적 차이라는 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은 미발처이며 기가 포함되지 않는다. 기는 이발처에서 개입한다. 본성이란 마음이 발현되지 않은 차원이며 발현된 차원은 정을 포함하는 마음 전체가 활동하는 차원이고 여기에 기가 개입하는 것이다. 본성의 차원은 이미 리·기 혼합의 차원임을 동일하나 어떤 방식으로 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776).
이간의 특징은 오상의 차원과 리의 차원을 동일시하며 인·물이 오상을 똑같이 공유한다고 본 점이다. 동물에게도 미발처의 차원에서는 리=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에서의 같음이다. 한원진의 경우 인간과 동물을 공히 자연적 존재지만 그들을 구성하는 원료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777).
성인과 범인의 구분(777〜778)
한원진 | 이간 |
-본질적 기의 맥락에서 성인과 범인의 본성은 똑같음 -현실적 기의 차원에서 사람과 사람도 구분됨 |
-‘성’이라는 개념을 쓰는 한 기에서의 차이가 문제시되어서는 안됨 -성인과 범임의 본성은 무조건 같음 |
’리일분수‘의 새로운 해석
인물성동이론은 ’리일분수‘의 존재론에서 파생된 논쟁이었다. 리일분수의 구도란 궁극에서 하나인 리가 다양한 유·종·개체들로 분화하면서 개별화되는 과정이며 개별화의 원리로 기가 작동하나 전체로서는 조화로운 유기성을 잃지 않은 구도다. 이때 본질적 기를 상정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인물성 이론과 동론이 갈라지게 된다.
녹문 임성주(1711〜1788)는 ’리일분수‘를 ’기일분수‘로 전환시킴으로써 기를 본연으로서 밑에 깔고 그 위에서 오히려 리가 개별화의 원리로서 작동한다고 보았다. 기 중심 사유였다. 그는 기를 우주의 일차적 실재로 보았으나 기 일원론자는 아니었다. 우선 기를 밑에(779) 깔고 그 위에서 리를 생각했다. 기를 ’기연자‘이고 리는 ’소이연자‘로서 구도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이이와는 대칭적이다.
임성주의 ’기일분수‘설은 ’기통리국‘이 된다.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기이며 개별자들은 이 기가 그때그때의 특수한 리에 의해 제한되어 생겨나는 것들이다. 이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축을달리한다. 리·기 同實論이다. 인물성동이론 논쟁자들이 리와 기를 지나치게 나누어 리기불상리를 간과했다고 지적했으나 임성주의 개별화 원리는 리가 되며 모든 존재자가 각각의 리를 갖추고 있음을 뜻하게 된다(780). 모든 존재자들은 기로 되어 있으나 조직화의 원리는 각각 다르다. 이간과는 반대이다. 다 같은 것은 기 때문이고 다 다른 것은 각각의 리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노사 기정진은(1789〜1879) 리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역설한다. 기는 리의 구현 수단으로서 기능한다고 보았고 리와 기 사이에 분명한 주종관계를 설정했다. 기의 발현과 활동은 사실 리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781) 리의 주인-됨을 주장한다. 기정진은 임성주와 대칭적인 이론적 기반 위에서 궁극적으로 리·기 불상리불상잡에 대한 주장을 가졌다. 리에 대한 기정진의 역설은 19세기 조선이라는 극도의 환란기에 처한 지식인이 내린 처방일 수 있었고 창조적인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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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학사가 오로지 주자학이라는 단일한 흐름을 이어간 것은 아니지만 19세기까지도 제도권 철학의 중핵을 형성했다. 이것은 정치의 맥락에서도 똑같이 성립한다. 조선의 정치가들은 덕성 있는 철학자들이 나라의 통치자가 되는 구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명과 에도막부에 비해 훨씬 수준 높은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사상과 문화에 입각해 강고한 동일성을 유지했기에 전체적으로 다질성과 역동성이 떨어지는 정치가 전개되었다(784).
조선 철학과 정치가 낳은 가장 긍정적인 결과는(785) ’사람의 마음‘을 둘러싼 집요한 철학적 성찰과 도덕적 정치가들의 실천이다. 국가의 정통성을 지키고 유교적 왕도를 견인하기 위해 헌신한 지식인들의 예는 유사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고 사람의 마음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탐구와 ’살신성인‘을 통한 정치적 실천을 보여준 ’선비‘들은 인간존재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주자학적 가치로 재단됨으로써 사회 전체가 강고한 동일성, 즉 위계질서의 지배를 받는 결과를 낳았다(786).
학문을 통해 세상을 구하는 것과 권세를 잡는 것이 극히 복잡미묘하게 얽혀 학문하는 것과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것이 비극적으로 얽혀 있었던 것이다(787).
조선왕조의 대외적인 면도 이런 성격이 잘 드러난다. 화이질서 관념은 조선에 강하게 내면화되었고 명청이 교체되면서 ’소중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화이는 지리적인 아니라 문화적 개념이 된 것이다(787).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옛 형태의 중화 개념에 집착했고, 세계사가 거대한 전환을 겪던 19세기까지도 주자학적 동일성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동일성에 대한 견고한 집착으로 새로운 타자를 만났을 때 차이생성을 소화해 내면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바꾸어나가기를 소홀히 한 조선은 고난의 시간을 맞아야 했다(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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