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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철학사2』 이정우 2021.6.27. 바다사자
12장 새로운 자아의 발견
명조 후기 왕수인에 의해 새로운 철학이 제시되면서 사상사의 새로운 지도리가 도래했다. 이 흐름은 지중해 세계에서 ’인간적인 것의 발견‘을 통해 근대성의 뿌리가 내린 과정과 조응한다. 동북아에서의 이 흐름은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789).
(허심(虛心)에 세 번째 길은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는 것이다. 도추는 문을 여닫는 ‘지도리'이다. 지도리는 열림과 닫힘에 모두 다 관계 하나 어느 하나 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열림과 닫힘의 근원이면서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여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반응하나 열림이나 닫힘에 매이지 않는다. 도추는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는 허심의 은유이다. 도추에 서면 시비를 가르는 기준점이 해소되기 때문에 개별자의 무궁한 시비에 자유롭게 응할 수 있다. 시비에 대한 ‘자아’의 편중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시비를 ‘부득이’라는 상황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즉 시비하려는 마음이 없이 ‘시비의 근거가 없는 시비’를 천균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도 동시적이고, 시비 역시 동시적으로 이 둘 모두를 상관적으로 포용하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가와 불가, 생과 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도추의 관점이고, 조지어천이며, 밝게 비추는 허심이다.https://pakhanpyo.tistory.com/615)
§1. ’양지‘의 행동철학
명대 대외적으로는 쇄국이었으나 상업자본주의 발달도 상당한 수준, 농민의 ’상품‘작물의 재배는 큰 변화, 평민의 힘이 상승하면서 새로운 자아의 발견, 특히 욕망과 감정을 긍정하는 사회적 변화 도래(790).
소설의 탄생을 비롯해 다양한 현상들이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791).
양지(良知)의 철학
새로운 자아의 발견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그 전체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인욕을 포함한 감정도 마음의 일부분이라면, 그 감정 또한 진지한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791).
왕수인은 뛰어난 무인이었다. 삶의 심장부에서 무(791)엇인가를 얻고자 했으므로 주자학의 주지주의에는 중요한 무언가를 결여한 것으로 느꼈을 것이다.
반-합리주의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개념들이 극한까지 정교화한다 해도 이 세계를 소진시키지 못하리라는 직관에 있다. 왕수인은 리=성이 사람의 마음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이것이 그가 리=심을 제시한 이유이다. 천리를 성과 동일시 할 경우 생생한 삶의 맥동이, 사람의 마음의 많은 부분이 빠져나가버린다고 본 것이다. 체험과 일체가 되어 있는 그의 사유는 언어로 정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언어로 정착되는 순간 체험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기호들은 단지 생생한 체험의 빈약한 표상일 뿐이다(792).
내면적이고 직관적인 왕수인의 철학은 맹자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맹자의 사유가 논리적이고 논쟁적이라면 그의 사유는 감성적이고 행동적이다. 유배지인 용장에서 철학적 깨달음을 얻었는데(龍場悟道)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외부에서 리를 찾은 것은 잘못”이라는 목소리를 듣고 리는 사실 사람의 마음임을 제창하게 된다. 이것이 ’심즉리(心卽理)‘이다(793).
사람의 마음은 자체로서 밝게 빛나는 것, 양심(良心)인 것이다. 인욕을 벗어나 본래 마음을 지키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존천리 거인욕‘의 의미는, ’존천리‘ 본연의 마음을 따르는 것, ’거인욕‘ 마음이 빗나가려 하는 것을 다잡는 것을 의미하며 제거해야 할 것은 마음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마음에 끼어드는 불순물인 것이라는 것(794).
’심즉리‘ 테제는 심을 천리와 동일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유심론적 성격을 단적으로 취한 것이다. 객관적 세계 모든 것의 의미는 사람의 마음과의 관련성을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음을 뜻했다. 왕수인에게 ’물자체‘ 같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795).
’지‘와 ’행‘을 따로 생각하는 것은 심과 리를, 마음과 천리를 다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며, 둘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생각까지도 비판한다. 지와 행은 즉각적으로 일치한다. 알면서도 행위하지 않는 이유는 진정한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인욕에 물들어 참된 앎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라고 했다(796).
무엇이 옳고 그른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왕수인의 확신이다. 우리 모두가 갖추고 있는 이 앎 즉 윤리적/도덕적 직관을 ’양지‘라 불렀다. 천리는 곧 양지이며, 양지를 깨닫는 것 자체가 이미 천리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을 뜻했다(797).
’심즉리‘를 ’치양지‘의 사유로써 심화하는데 치양지란 양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천리와 마음의 일치의 내용이 곧 양지라는 것이다(797). 체험을 통한 생생한 심화였다. 양지는 자신의 행위의 준칙이다. 이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단이며 양지의 실재를 확인해주는 경험적 증거였다. 그러나 내면적인 깨달음이기에 이를 도덕준칙으로서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왕수인은 양지의 깨달음은 어느 경우든 각각의 주관에 의해 다른 형태를 띨 수 있다고 보았다. 양지라는 대체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런 차이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798). 이것은 개성의 긍정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가져왔지만 후계자들에 의해 사분오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799).
계승의 갈래들
개성을 주요 가치로 담고 있는 왕수인 이후의 양명학은 근본적으로 인간 스스로가 도덕적일 수 있는 존재인지, 어떤 형태로든 외적인 준칙에 의해서만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799).
왕기, 태주학파 : 진정한 양지에 도달하려면 의념(인식, 삶에서의 구체적 지각, 항상 선악을 동반, 양지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적 선악을 초월한 절대 선의 경지이다)의 차원을 단번에 제거해야 한다고 본 것, 현실의 구체적인 것들을 티끌같은 것으로 여기면서 본체=양지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는 태도이다. 양지로써 현실을 사는 것, 현실을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공부는 거부한 채 선악을 초월한 본체에만 즉하게 되고 선불교와 동일해진다(800). 그저 하나의 신체만 갖추고 있어도 누구나 성인이라는 것 때문에 서민층까지 보급되었으나 이는 도덕과 정치에 힘쓸 이유가 없게 되고 선악을 무시해버릴 수도 있으므로 거의 궤변이 될 위험이 있었다.
강우학파(추수익, 구양덕) : 본체가 즉하는 것 자체가 공부라는 입장, 현성양지를 비판함(800). 오히려 정주학의 전통으로 다시 접근해감(801).
현성양지의 사유는 갈수록 속화와 희화화로 흘렀다(801). 객관적 공부를 거부하고 주관적 깨달음으로 치닫는 길은 어떤 개성적 인물들에 의해 활짝 핀 후 급속히 조락해버린다. 양명학이 그랬다.
이지 : 사회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지식인들이 패배주의 냉소주의에 빠진 시대에 태주학파의 정점을 보여주었다(802). 그의 사유는 ’성‘과 ’심‘이 아닌 ’정‘을 최고의 원리로 삼았다. 부부가 만물의 시초라고 보았다. 부부는 음기와 양기이므로 이 위에 태극이나 리, 무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수인이 성과 정을 포괄하는 심을 리와 동일시했다면 이지는 음양 이기의 상위 존재들을 아예 잘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은 마음에서의 기의 활동이다. 기 일원론이지만 그에게는 음양 이원이 더 본질적인 역할을 하고 정이 세계와 인간 이해의 핵심이다(803).
명말청초의 황종희 왕부지 고염무등이 볼 때 주자학은 너무 추상적, 정태적이었고 양명학은 너무 주관적이며 혼돈스러운 것이었다. 리와 심 사이의 기를 과거보다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당대의 새로운 과학정신도 자극이 되었다.
리와 심의 불일이불이 관계는 성리학의 근본 가정이다. 심이 성을 포함하고 성즉리 자체에 이미 리와 심의 연속성이 전제되어 있다. 성즉리와 심즉(804)리에서 성은 심의 일부이다. 따라서 성과 심의 관계에서 문제는 결국 정이다. 감정의 문제인 것이다. 16세기 이래 동북아 철학사의 근본은 결국 감정의 문제였던 것이다.
황종희는 양명학을 수용하면서도 감정보다 기와 심을 중심에 놓고 성(/리)과 정을 보듬는 방향을 택했다. 구체적으로 파악된 기의 내재적 형이상학과 이에 입각한 심 개념을 중심으로 이학의 전통적 가치와 당대의 주정주의가 갖는 생동감을 가미한 사유는 성리학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생동하는 의지로서의 주체인 마음의 능동성을 통해 내재적 세계 구원의 길을 제시한 점에서 양명학을 높이 평가한다(805).
§2. 인정(人情)을 찾아서
퇴계와 율곡 이후 조선 철학은 자체의 차원에서 자폐적으로 흘러갔다(806).
왕수인의 학문은 곧바로 동시기에 수용되었다. 초기에 이해 수준은 높지 않았고 이단시되어 피어나지 못했으나(807). 최명길, 장유 등을 거쳐 하곡 정제두(1649〜1746)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의 사유는 순수 양명학이라기보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조화를 꾀한 사유였다. 주희가 리를 외부에서 찾았다고 보았으나 유심론을 취하지 않고 리의 여러 층위를 분명히 하는 방식-물체의 리, 생명체의 리, 사람의 마음의 리, 참된 리(진리)는 마음이라는 리-을 취했다(808). 인간의 심과 성은 같은 것이며 참된 리이고, 생명체들은 심과 같고 물리는 최하위의 범상한 리로 격하시켰다. 심 자체가 본연지성, 기질지성은 생명 차원이 되는, 정제두의 사유는 ’심-즉-진리‘로서의 ’심즉리‘의 사유이다.
정제두는 마음에서 성과 정을 구분하고 마음과 만물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良知體用圖>에 중앙에 ’성‘, 가운데 ’정‘, 외곽에 ’만물‘로 개념을 정리했다(808). 마음을 출발점으로 하나 ’정‘을 ’성‘과 구분하였다. 성을 마음의 체(양지의 체)로 정을 마음의 용(양지의 용)으로 보았다. 도 성·정 차원과 만물 자원을 구분하여 존재론적 위계를 강조했다. 즉 심을 성과 동일시하여 양지로 보면서도 성=심에서 성과 정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마음 속의 정을 따로 구분하려 했다. 양명학이 마음을 감정에 맡겨 욕심을 따를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과 정은 형식적으로 구분되며 한마음의 두 측면일 뿐이며 또 마음과 만물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고, 단순한 일원론적 유심론이 빠질 수 있는 주관주의에 일정 정도 제동을 가했다(810).
에도 막부에 주자학을 세운 이는 하야시 라잔이다. 이 시기 사무라이들은 유한 계층이 되자 학문과 무사도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세워나갔다. 막부는 예와 법으로 사회 전체를 새롭게 계층화해야 했기 때문에 주자학은 국학의 위치를 차지했다. 막부시기 쵸닌 계층이 새롭게 전면 등장했다(811).
야마가 소코(1622〜1685) : ’인간적인 것‘에 대한 긍정에 입각해 도덕형이상학이 아닌 윤리를 추구했다. ’격물‘은 ’궁리‘가 아닌 사물들에 대한 경험적인 인식과 적극적인 실천에 연관된 것으로서(813) 예·악·형·정이라는 객관적 구조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근세 일본 사상사에서 중요한 특이점을 형성했다.
’고의학‘ 이토 진사이(1627〜1705) : ’성‘이란 ’생(生)‘, 그저 태어난 그대로의 본성으로 ’본체‘라기보다 ’특성‘으로 보았다. 성과 정사이에 존재론적 위계를 두지 않는다. ’인정‘이 중요했으며 성과 정은 각(814)각 특성/성향과 욕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경험주의적 사유를 펼쳤기에 ’심‘에 대한 분석보다 현실적 삶에서의 덕이 중요했다. 세계를 일원적인 기로 되어 있다고 보았고 천지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리는 단지 ’조리‘일 뿐이며 기라는 실체가 ’화‘해가는 방식을 뜻할 뿐이다(815). ’천도‘를 경험주의적으로 탈구축하면서도 고대적 뉘앙스에서의 ’천명‘을 역설한다. 그의 윤리학의 핵은 공자로의 회귀에 있다. ’인‘의 세계는 엄격한 규범의 세계보다는 ’정‘을 긍정하는 세계였다. 엄격주의를 비판하면서 관유인후한 마음을 강조했고 인지상정에 입각해서 따뜻한 윤리를 실천할 것을 역설했다. 공자로의 회귀와 당대에 대두한 ’인간적인 것의 발견‘이 중첩해 있는 사유였다(817).
나카에 도주 : 양명학을 정착시킨 인물, 마음을 단적으로 인격신인 황상제와 동일시했다. ’성즉리‘가 ’심즉상제‘로 변환된 것이다. 황상제는 인격신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보편자로서의 하느님의 한 국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818). 반면 상제는 사람의 바깥에 존재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사람 안으로 들어와 있기도 한 사람의 마음 자체가 그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의 구도는 이중적이다. 도주의 사유는 주객합일의 사유지만 독립된 양자의 합일을 추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애초에 즉자적으로 합일해 있는 사유이다(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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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의 문제는 주관에 머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으로부터 ’태허‘, ’하느님‘으로 너무 쉽게 건너뛴 데에 즉 그 사이의 구체적 객체성으로서의 자연과 역사를 건너 뛰어버린 데에 있다(820).
객관적 인식은 인간을 다소 냉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엄정한 지식을 가져다주지만 행위 앞에서 머뭇거리게 만든다. 주관적 신념은 인간을 뜨겁게 만들어 때로 위대한 경지를 주지만 참혹한 불행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이 두 경향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두 측면을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표현하기에 두 철학은 동북아세계의 두 일반성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821).
요시다 쇼인 :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민족주의적인 ’국학‘, ’존왕양이‘ 사상인 미토학, 사무라이 정신 외 양명학이 중요한 토양이었다. 나카에 도주를 사숙했고 그의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로서 활동했다. 무사도와 양명학은 기질적으로 매우 가깝다.
일본 제국주의 역사는 사무라이들의 후손인 일본 군부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군인들을 이끈 정신적 배경은 민족주의, 무사도, 양명학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결정적인 분기점을 만든 인물이었다. 자신들의 ’양지‘를 세계로 투사해 타자들을 짓밟았으며, “광자”가 되어 아시아 세계를 처절하게 파괴했다. (822). 자가준칙에 입각하는 양명학은 어떤 사상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본 근현대를 추동한 정신적 힘은 양명학의 전통이었다(824).
맺는말
그리스가 고대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민주정을 실시한 데에 비해, 아시아 세계의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왕조‘의 형태를 띠었다. 이 점이 양 철학 전통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좌우했다. 인도와 동북아 철학은 상고 시대의 강고한 권력이 와해된 공간에서 만개했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정치의 세계와 거리를 둔 인도 사회 바깥에서 활동했다면, 동북아 철학자들은 정치의 심장부에서 ’문사-관료‘들로서 활동해야 했다(825).
철학이란 강고한 정치적-종교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활짝 피어난다는 것, 권세를 얻은 철학은 철학 자체로서는 반드시 퇴락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술(’점‘)에서 시작했으나 점차 철학적 수준으로 승화된 역학과 자연에 대한 동북아 지식인들의 직관이 가장 농밀하게 녹아 있는 사유인 기학이 동북아 세계관의 기초를 형성했다(827).
동북아 세계와 지중해 세계 철학의 차이점(828∽831).
동북아 세계 | 지중해 세계 | |
자연철학 | 자연과 인간이 서로 맞물려 현상하는 차원에 초점, 그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의미, 가치/행위를 사유 | 세계를 객관화해서 그 원리를 밝혀내는 작업, 형이상학은 그 위에서 실재를 사유함 |
기학 | 기와 도 사이에 날카로운 분리는 없었음. 내재적이고 경험적인 관점, 유동적이고 실천적인 사유가 지속되어 옴 | 부차적인 실재로서 격하된 유동적 실재를 제1의 실재로 삼고 그 위에서 삶의 길 모색 |
기본 | 처음부터 끝까지 인문학적 사유.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적 성격은 아니었음. | 자연철학과, 형이상학, 인식론을 기반으로 인문학적 논의 |
차이점 | ‘문’과 ‘인(人)’의 사유 | 특정한 동일성을 상정해 다채로운 사물, 현상들을 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사유 |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추구 |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을 추구 | |
‘생(生)’, ‘화(化)’의 사유 – 제작적 사유 거부 | ‘작(作)’의 사유 – 플라톤 이후 ‘제작적 사유’, 일신교의 중세에 확립 | |
기의 흐름에 발맞추어가면서 현실의 생성을 사유(공자의 ‘시중(時中)’ 강조, 개성에 입각한 교육, 물의 유동적, 타자중심적 성격에 대한 노자의 경도, 기를 기반하는 한의학적 치유) 윤리적-정치적 맥락에서의 높은 도덕성과 실천성에 집요했음 |
논리학적-수학적 엄밀성, 추상도 높은 사유의 추구를 생명으로 발전 | |
궁극적 목표 |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지혜를 통해 지속되는 어떤 길을 모색 | 객관적이고 엄정한 탐구를 통해 모색 |
철학의 기초 | ‘사람의 마음’의 탐구 | ‘존재’의 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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