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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원리론

1장 공정으로서의 정의

 

- 사회의 협동 체제 속에서 정의가 갖는 역할

- 정의의 일차적 주체인 사회의 기본 구조

-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기본 이념

-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고전적 공리주의, 직관주의의 정의관 차이

 

1절 정의의 역할

사상 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덕목이다(p. 36).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사회란 비록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한 협동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해관계의 일치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의 상충이라는 특성도 갖는다(p. 37).

 

이득의 분배를 결정해줄 사회 체제를 선정하고 적절한 분배의 몫에 합의하는 데 필요한 어떤 원칙들의 체계가 요구된다. 이러한 원칙들이 바로 사회 정의의 원칙으로서, 그것은 기본적인 사회 제도 내에서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방식을 제시해주며 사회 협동체의 이득과 부담의 적절한 분배를 결정해준다.

 

각자 서로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가진 개인들 간에 공유되는 정의관은 동료 시민으로서의 유대를 공고히 해주며, 정의에 대한 일반적 욕구가 다른 목적들의 추구에 한계를 정해준다.

 

사람들은 그들 공동체의 기본 조건을 규정해줄 원칙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각자 그 나름의 정의관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 38).

 

다양한 정의관들과 구별되면서 그 상이한 원칙과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역할을 나타내주는 정의의 개념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어떤 합의의 기준이 없을 경우, 서로 이익이 되는 체제의 유지를 보장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그들의 게획을 조정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불신과 원한이 시민적 유대를 좀먹으며, 의혹과 적개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달리하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행동으로 몰고간다. 그래서 정의관이 갖는 뚜렷한 역할은 기본적으로 권리와 의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해주고 적절한 배분의 몫을 정해주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방식은 효율이나 조정, 그리고 안정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2절 정의의 주제

우리가 논하려는 것은 사회 정의인 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정의의 일차적 주제는 사회의 기본 구조,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의 주요 제도가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고 사회 협동체로부터 생긴 이익의 분배를 정하는 방식이 된다(p. 40).

 

사회 제도로 인해서 어떤 출발점에는 다른 출발점보다 유리한 조건이 부여된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뿌리 깊은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정의의 원칙들이 제일 먼저 적용되어야 할 부분은 어떤 사회의 기본 구조 속에 있는 이와 같은 거의 불가피한 불평등인 것이다.

 

우리의 연구 범위는 두 가지 점에서 제한되어 있다. 첫째로 나는 특수한 경우의 정의만을 문제 삼고 있다. 나는 제도나 사회 체제 일반의 정의를 문제 삼거나 국제법이나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정의를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p. 41).

 

나는 우선 다른 사회와 분리되어 폐쇄 체제로 생각되는 사회의 기본 구조에 합당한 정의관을 정식화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우리의 논의에 대한 또 하나의 제한은 우리의 논의의 대부분이 절서정연한 사회를 규제하는 정의의 원칙을 검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행동하고 정의로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상적인 이론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상 이러한 보다 긴요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기초를 제시해준다는 생각에서이다(p. 42).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기본 구조에 관한 정의관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가치 있다는 점이다. 그 원칙이 다른 분야에서까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p. 43)

 

기본 구조가 갖는 덕목의 원칙들을 규정하고 그들 간에 대립이 있을 경우, 그 각각의 비중을 정하여 조정해줄 전체적인 관점이란 정의관 이상의 것이며 그것이 바로 사회의 이상이 될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전통과 부합하지 않는 것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p. 44).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정당하게 각자에게 속하고 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각자의 당연한 몫은 흔히 사회 제도나 그 제도가 제시하는 적절한 기대치로부터 도출된다고 생각한다.

 

3절 정의론의 요지

나의 목적은 이를테면 로크, 루소, 그리고 칸트에게서 흔히 알려져 있는 사회계약의 이론을 고도로 추상화함으로써 일반화된 정의관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원초적 계약을 어떤 사람이 특정 사회를 택하거나 특정 형태의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핵심이 되는 생각은 사회의 기본 구조에 대한 정의의 원칙들이 원초적 합의의 대상이라는 점에 있다(p. 45).

 

그것은 자신의 이익 증진에 관심을 가진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평등한 최초의 입장에서 그들 조직체의 기본 조건을 규정하는 것으로 채택하게 될 원칙들이다. 정의의 원칙들을 이렇게 보는 방식을 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라 부르고자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의 평등한 원초적 입장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사회계약론에 있어서의 자연 상태에 해당한다. 그것은 일정한 정의관에 이르게 하도록 규정된 순수한 가상적 상황으로 이해된다.

 

정의의 원칙들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선택된다. 그 결과 원칙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무도 타고난 우연의 결과나 사회적 여건의 우연성으로 인해 유리하거나 불리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보장된다. 모든 이가 유사한 상황 속에 처하게 되어 아무도 자신의 특정 조건에 유리한 원칙들을 구상할 수 없는 까닭에,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한 합의나 약정의 결과가 된다.

 

원초적 입장이란 적절한 최초의 원상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거기에서 도달하게 된 기본적 합의는 공정한 것이다(p. 47).

 

각자는 이미 어떤 특정 사회의 특정 지위를 갖고 태어나게 되고, 이러한 지위의 성격은 그의 인생 전망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을 실현하는 사회는 가장 자발적인 체제에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p. 48).

 

합리성이란 개념은, 경제 이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주어진 목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취한다는 뜻에서 가능한 한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각자는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증진시키고 자신의 이익과 능력을 보호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만족의 보다 큰 순수 잔여량을 가져오기 위해 자신에게 돌아올 손실을 말없이 참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끈질기고 강렬한 이타적 충동이 없는 경우에는, 합리적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기본 권리와 이해관계에 미칠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전체 이득의 산술적인 총량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기본 구조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p. 49).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이한 두 원칙을 채택하리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원칙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며,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예를 들면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원칙의 선택 문제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해답이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고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다른 계약론에서처럼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 최초의 상황 및 거기에서 생기는 선택의 문제에 대한 해명 (2) 합의될 원칙들의 체계에 대한 논증이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내가 계약론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예이다(p. 51).

 

계약론적 설명 방식이 갖는 장점은 그것이 정의의 원칙들은 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는 원칙들로 생각될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정의관들이 설명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완전한 계약론은 아니다(p. 52).

 

4절 원초적 입장과 정당화

나는 분명히 원초적 입장에 있는 합리적 인간들이 정의의 역할로 봐서 어떤 정의관에 입각한 정의의 원칙들을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경우, 그 정의관은 다른 것보다 더 합당한 것이며 그에 관한 당화가 더 수월하다고 말하고 싶다(p. 53).

 

원초적 입장이라는 개념은 정의론을 위한 이러한 최초의 선택 상황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가장 유력한 해석에 의한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유력한 해석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첫째로 정의의 원칙들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선택되어져야 한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리라고 생각한다.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이 평등하고 생각하는 것은 합당한 것 같다(p. 55).

 

원초적 입장에 대한 특정한 규정을 하는 데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는 선택되어질 원칙이 정의에 대한 우리의 숙고된 신념과 합치되는 것인지 혹은 그것을 제대로 확대한 것인지의 여부를 살피는 일이다. ) 종교적 편견이나 인종차별 / 부나 권력의 올바른 분배

 

가장 유력한 설명을 찾는 데 있어 우리는 양쪽 끝에서부터 작업을 하게 된다(p. 56).

 

이쪽저쪽을 맞추면서 때로는 계약적 상황의 조건들을 변경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판단을 철회하거나 그것을 원칙들에 따라 조정하기도 하면서, 결국 우리는 합당한 조건들을 표현해주면서도 정리되고 조정된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도 부합하는 최초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나는 반성적 평형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것을 평형이라고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우리의 원칙과 판단들이 서로 들어맞기 때문이며, 그것을 반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이 따를 원칙이 무엇이며 판단이 도출될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형의 상태가 반드시 안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약 상황에 부여될 조건들에 대한 자세한 검토나 우리의 판단을 수정해줄 특수한 경우들에 의해 뒤집혀지기가 쉽다(p. 57).

 

일정한 정의의 원칙들이 정당화되는 근거는 바로 그것들이 평등한 최초의 상황에서 합의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줄 하나의 관념을 필요로 하는데, 원초적 입장이라는 직관적 개념이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5절 고전적 공리주의

나의 목적은 공리주의 사상 일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그럼으로써 그 여러 가지 상이한 변형들 모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정의론을 전개하려는 데 있다(p. 58).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여기에서 설명하려는 공리주의의 종류는 시즈위크에 의해 가장 명료하고 접근하기 쉽게 정식화된 엄밀한 고전적 이론이다. 그 주요 사상은 한 사회의 중요 제도가 그에 속하는 모든 개인이 만족의 최대 순수 잔여량을 달성하도록 편성될 경우 그 사회는 정당한 질서를 갖춘 것이며 따라서 정의롭다는 것이다(p. 59).

 

나는 윤리학에 있어서 두 주요 개념은 옳음[정당성]과 좋음[]이며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인격이라는 개념도 이것들로부터 도출된다고 생각한다(p. 61). 그런데 그들을 관련짓는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는 목적론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우선 좋음을 옳음과는 상관없이 규정하고 그리고 옳음은 그 좋음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목적론은 합리성이라는 이상을 구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강한 직관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합리성이란 어떤 것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도덕에 있어서 그것은 선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적론은 보다 분명히 말하면 구체적으로 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p. 62).

선의 규정 사상 주창자
인간의 탁월성 실현 완전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쾌락 쾌락주의
행복 행복주의
(합리적) 욕구의 만족 공리주의

 

공리주의 정의관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러한 만족의 총량이 개인들에게 어떻게 분배되는지에 대해 간접적으로만 문제 삼으며, 한 개인이 자신의 만족을 시간적으로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만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다(p. 63).

 

정의에 대한 상식적인 신조가 갖는 엄정성은 부정의와 사회적으로 유해한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인간의 경향성을 제한해주는 어떤 효용성을 갖기는 한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는 이러한 엄정성을 도덕의 제 1원칙으로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p. 64).

 

공리주의에 도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물론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개인에 있어서의 합리적인 선택 원칙을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채택하는 일이다.

 

이상적인 입법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결정의 성격은 갖가지 특정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는 기업가의 결정이나 특정 부류의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자기 만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는 소비자의 결정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p. 64-65).

 

공리주의는 개인의 차이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게 되는 것이다(p. 65).

 

6절 상호 비교 고찰

정의는 어떤 사람들의 자유의 상실이 다른 사람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을 부인한다. 계약론은 정의의 우선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대체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공리주의는 그것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착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p. 66).

 

두 번째 대비가 되는 것은 공리주의자는 한 개인의 선택 원칙을 사회로 확대하는 반면 계약론의 입장에 선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사회적 선택의 원칙, 따라서 정의의 원칙이 원초적 합의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흔히 공리주의는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또한 분명히 이에 대한 정당한 근거들도 있다. 공리주의자들은 자유권과 사상의 자유의 강력한 옹호자였으며, 또한 그들은 사회의 선은 개인들이 누리는 이득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욕구의 모든 체계를 융합함으로써 보다 자연스러운 사유 과정을 거쳐 한 개인의 선택 원칙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공리주의는 개인주의적이지 않다(p. 67).

 

공리주의에서는 어떤 욕구의 만족이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고려되어야만 할 어떤 본질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만족의 최대 잔여량을 계산하는 데 있어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것이 무엇에 관한 욕구인가가 문제시된다(p. 68).

 

반면에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먼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자신의 보다 특정한 목적에 대한 지식 없이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p. 69).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 중심적인 특성임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기본 구조를 설계함에 있어 어떤 규준을 제시해주는데, 이러한 체제가 정의의 두 원칙(즉 애초부터 특정 내용을 갖는 어떤 원칙들)에 상반되는 성향과 태도를 산출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한 그 체제는 정의로운 제도가 안정적임을 보장해야 한다. 그래서 선이 무엇이고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형태의 인격이 무엇이며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어떤 제한이 가해지게 된다(p. 70).

 

고전적 공리주의와 공정으로서의 정의 간의 대비 속에는 암암리에 사회관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질서정연한 사회를 후자에서는 공정한 최초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선택하게 될 원칙에 의해 규제되는, 상호 이익을 위한 협동 체제로 생각하며, 전자에서는 주어진 것으로 인정된 여러 개인들의 욕구 체계로부터 공평한 관망자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욕구 체계를 최대한 만족시킬 수 있도록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p. 72).

 

7절 직관주의

나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주의를 생각하고자 한다. 즉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여러 개의 제1원칙들이 있으며, 그들 간에 어떻게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인지는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 비추어 상호 간의 비중을 잼으로써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학설로 보고자 한다(p. 72-73).

 

직관주의 이론의 두 가지 특징

1) 그 이론은 특정한 유형의 경우에 있어서 상반되는 지침을 주는 상충하는 제1원칙의 다원성으로 이루어지며,

2) 이러한 원칙들의 순위를 가려 줄 명확한 방법이나 우선성의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p. 73).

 

우리는 직관에 의해서 가장 그럴듯하게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해서 조정점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보다 넓은 의미의 직관주의는 다원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p. 74).

 

상충하는 이해관계에 대한 단순한 사실적인 해결이나, 기존 관습과 통념적 기대에의 의존을 넘어설 수 있는 이해와 합의에 어느 정도 이르기 위해서는, 신조들 간의 우선을 가려 주거나, 적어도 문제를 보다 좁은 범위로 제한해줄 좀 더 일반적인 체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p. 75).

 

(직관주의자의 주장은) 기하학적 도식이나 수학적 함수로 그 비중을 나타낼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합리적으로 타당함을 입중해줄 어떤 구성적인 도덕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직관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사회 정의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우리가 결국 제1원칙이 다수라는 결론에 이르게 마련이며, 그 원칙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일정한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보다 더 옳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p. 79).

 

직관주의자는 도덕 현상의 복잡성 때문에 우리의 판단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하려는 노력은 소용이 없으며, 대등한 여러 원칙들이 있다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원칙들을 넘어서게 되면, 사회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할 때처럼 평범한 이야기가 되고 말거나, 모든 것을 공리의 원칙으로 해결할 때처럼 오류 내지는 지나친 단순화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관주의를 논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숙괴된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여러 원칙들이 합당하게 가려질 비중을 설명할, 인정받을만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일이다.

 

8절 우선성 문제

직관주의는 대립하는 정의의 원칙들 간에 경중을 가리는 문제에 어떤 적극적인 해답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직관 능력에 의존해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고전적 공리주의는 직관에의 의존을 전적으로 피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의 궁극적인 기준을 가진 단일 원칙적인 입장이다(p. 81).

 

우선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관에 의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원칙들의 다원성을 넘어설 길이 없을 가능성도 인정해야만 한다(p. 82).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한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일을 줄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흔히 그렇듯 사람들이 최종 원칙들의 경중을 서로 달리 가리는 경우에는 그들의 정의관도 서로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 직관의 역할은 여러 점에서 제한되고 있다.

 

첫 번째 점은 정의의 원칙들이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소위 서열적 혹은 축자적인 순서로 배열된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끝으로 직관에의 의도를 줄일 수 있는 길은 보다 한정된 문제를 제시하고 도덕 판단 대신 타산적인 사려 판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선성 문제를 논함에 있어 주어진 과제는, 직관적인 판단에의 의존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키는 일이다(p. 86).

 

9절 도덕이론에 관한 몇 가지 제언

나는 실질적인 내용을 갖는 도덕적 입장들에 관한 연구가 갖는 중요한 위치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갖는 복잡성을 인정하게 되면, 그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의 현재 이론은 초보적이며 심대한 결함을 갖는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단순화를 통해서 우리의 판단의 일반적인 윤곽에 접근해 그것을 해명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단순화 작업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p. 94).

 

모든 이론은 어딘가 미흡한 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언젠가 진정한 문제란 이미 제시된 입장들 중에 어느 것이 대체로 최선의 접근 방식인가를 아는 일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립적인 이론들의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제안함에 있어 나는 그것을 공리주의와 대비시키려 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설명의 방편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적 입장의 여러 변형들이 우리의 철학적 전통을 오래도록 지배해왔고 지금도 게속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는 공리주의가 일으키기 쉬운 고질적으로 미흡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p. 95).

 

물론 앞으로 제시하는 계약론이 방금 살펴본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전체 체계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라 생각될 때는 여러 가지 단순화도 잠정적인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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