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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하는 공동체조르조 아감벤 2021.6.12. 바다사자

 

01. 임의적

도래하는 존재는 임의적 존재이다. 임의적(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 ’마음대로’, ’뜻대로‘, ’아무‘) 존재는 욕망과 근원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임의적인 것은 특이성과 관련되는데 존재가 그것 그대로 존재함에 근거한다(9).

임의적 특이성은 자신의 그러함/그렇게 존재함, 그 귀속성 자체를 지향한다. 그렇게 존재함으로서 노정되는 특이성은 임의적이며, 즉 사랑스럽다(10).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를 그 존재가 존재하는 대로 그렇게 존재함을 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특수한 페티시즘이다. 임의적 특이성은 앎의 가능성의 앎[가지성의 지]이 된다. 대상이 고유한 자리 잡음안에 즉 그것의 이데아 안으로 옮긴다(11).

 

02. 고성소로부터

고성소는 아퀴나스에 의하면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원죄 말고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죽은 아이들이 가는 지옥이다. 받는 벌은 단지 신에 대한 직관에 영원히 들지 못하는 박탈의 벌이다. 그들은 자연적 지성만을 갖고 태어났을 뿐 세례 시에 우리에게 심어지는 초자연적 지성을 받지 못했으므로 최고선을 박탈당한 것을 알지 못한다(13).

구제할 길 없는 상실을 당한 그들은 아무런 고통 없이 신에게 버림받은 상태에 머문다. 신이 그들을 잊은 것이 아니라 일찍이 그들이 신을 잊었다.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처럼 복에 겹지도 않고 저주받은 자들처럼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명멸될 수 없는 환희로 충만해 있다. 로베르토 발저의 피조물들은(14) 구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구원의 이념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최고로 급진적인 항변이다. 그의 인물들은 죄와 정의의 세계를 등지고 떠나왔다(15).

그들의 얼굴에는 마지막 심판의 날 그 이튿날 새벽의 만회불가능한 서광이 쏟아지고 이후에 지상에서 개시되는 삶은 순전히 인간적인 삶이다(인간적인 것만이 구제가능을 갖는다)(16).

 

03.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모순은 언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러셀의 역설(자신을 포함하면서 동시에셍 포함하지 않는 집합)은 언어적 존재의 장소를 지칭한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의 집합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적 존재(불린 존재)는 집합(나무)인 동시에 특이(19)(그 나무, 어떤 나무)인 그런 것이다.

보편자와 특수자의 이율배반에 사로잡히지 않는 개념이 바로 예이다. 예는 다른 것들 가운데 하나인 특이성이면서도 다른 것을 대신하고 전체를 대변한다. 특수하지도 일반적이지도 않으며 그런 것으로서 스스로를 제시하는, 자신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특이한 대상이다(20).

모든 현실 공동체를 제한하는 것은 가장 공통적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임의적 존재의 무력한/비잠재적인 보편타당성이 비롯된다(21).

순수한 특이성들은 어떠한 공통 속성과 정체성으로도 묶이지 않은 채 오직 예가 보여주는 텅 빈 공간 속에서만 소통할 수 있다. 그 특이성들은 기호 , 즉 귀속 그 자체를 전유하기 위해 모든 정체성을 박탈한다. 트릭스터나 게으름뱅이, 조수(발저의 인물), 만화 속 인물들 그것들은 도래하는 공동체의 범례들이다(22).

 

04. 자리 잡음

윤리의 의미는 진정성과 참이 비진정성과 거짓에 완전히 평행하는 실제 술어가 아니다. 윤리는 선이 악의 포착에 다름 아니라는 점, 진리는 오직 그것이 거짓을 드러낼 때에만 현시될 수 있다. 진리는 공간을 내주거나 비-진리에 자리를 내줌으로써만, 즉 거짓의 자리잡음으로서,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도덕/비고유성을 노정함으로써 계시된다(‘모순론‘)(25).

신이나 선, 장소는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의 자리 잡음이자 그것들의 더없이 내밀한 외부성이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고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의 규정이자 한계로서 외부성과 비-잠재성이 있다는 것. 이것이 곧 선이다.

악이란 것은 사물들의 자리 잡음을 많은 것들 가운데 한 가지 사실로 환원하는 것이며 사물들의 고유한 자리-잡음에 내재한 초월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선은 단지 그 사물들이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자리-잡음을 포착하는 그 지점에 있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선은 악의 자기 자신의 포착으로, 구원은 자리의 자기 자신으로의 도래로 정의된다(28).

 

05. 개체화의 원리

임의성은 특이성의 수학소(라캉-어떠한 개념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는 방식에 반발하여 만든 말, 의미를 축출한 문자로서의 수학소)이다. 그것 없이는 존재도 특이성의 개체화도 사유될 수 없다. 공통 형상이나 본성은 임의적 특이성에 무차별할 수밖에 없고 그 자체로 특수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임의적이고 특이한 통일체와 나란히 놓이는 것을 개의치 않는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31).

공통적인 것은 결코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할 수 없다. 낱낱의 개별자들 사이에서 이념은 결코 본질과 관련되지 않는 연대(전체의 임의성)의 이념이다(33).

임의적이라 함은 자신의 모든 속성을 전부 갖지만 그 속성들 중 어느 것도 차이를 구성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속성에 대한 무-차별성은 특이성들을 개체화하고 산종한다. 특이한 실존의 개체화는 점(34)점의 사실이 아니라 생장과 감퇴, 전유와 박탈의 연속적 단계 변화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실체의 발생선이다(35).

 

06. 아죠(agio-편안함, 안락함, 여유)

모든 피조물이 지닌 가장 고유한 특성은 바로 자기 자신의 대체가능성이자 항상 이미 타인의 자리에 있는 그의 존재이다(39).

타인을 대신한(40)다는 것은 제자리와 타인의 자리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 존재의 자리 잡음은 항상 이미 공통적인 것이며 나눌 수 없고 철회할 수 없는 환대에 열리는 빈 공간이다(41).

아죠는 대표/재현될 수 없는 공간의 고유명이다(42).

 

07. 습성

마네리스란 개념은 흐르다에서 온 것으로 생성 중인 존재와 관련된다. 것은 서구 존재론의 구분법으로 보자면 본질도 아니고, 실존도 아니며 생성 습성이다. 이런저런 양태 속에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 양태 자체인 존재이다. 그것은 특이하지만 무차별적이지는 않으면서도 다(46)자적이며 모두에 해당된다.

자신의 조건들 속에서 자신을 노정하는 존재는 잔여 없는 존재의 이렇게이고, 그런 존재는 우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으며, 자기 자신의 습성으로부터 꾸준히 산출된 것이다(47).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활용, 실존을 속성으로 다루지 않는 방식을 이해하는 길은 실존을 하비투스, 에토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저 습성이 우리를 엄습한다거나 우리를 정립하지 않고 우리를 산출할 때 그것은 윤리적이다. 생성 습성은 임의적 특이성의 자리이자 그것의 개체화 원리이기도 하다. 자신의 고유한 습성이 존재를 본질로 규정하고 식별하는 것은 속성이 아니라 비-속성이다(48). 우리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서 노정하는 비-속성, 우리가 사용하는 습성은 우리 자신을 산출해낸다. 그것은 우리의 제2, 더 행복한 본성이다(49).

 

08. 악마적

악마는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우리의 도움을 조용히 요청하는 비존재의 가능성이다. 악은 단지 우리가 이러한 악마적 요소와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부적절한 반응이다. 불능 혹은 존재하지 않을 능력은 부수적 의미에서만 악의 근원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내적인 비존재 가능성을 놓침으로써, 사랑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창조는 신이 자(52)기 자신의 불능에 대해 갖는 불능이며, 신이 존재의 우발성에 대해 내리는 허락-존재하지 아니할 수 있는 존재-이다.

카프카와 발저가 말하는 악마는 유혹자가 아니라 끝없이 유혹당하기 쉬운 존재이다(53).

도래하는 공동체1-8(아감벤,21.6.1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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