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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간의 본질로서의 욕망

윤리학 특강 7강 발제(22.07.16).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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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나투스와 욕망

 

스피노자에게 개체란 무엇인가?

p192 : 개체는 다수의 물체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며, 개체를 이루는 각각의 물체는 1차적으로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되는 존재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수의 물체들이 어떤 근거에서 하나의 개체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는 위의 정의에서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 서로 의지할 때하나의 개체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다수의 물체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하나의 개체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다수의 물체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 내지 비율을 유지할 때, 그 물체들은 하나의 개체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수의 물체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 내지 비율을 유지 할 때, 그 물체들은 하나의 개체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193 : 그리고 스피노자는 개체를 개체로 규정하는 이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형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동일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유지되는 한에서 그 개체는 아무런 형상의 변화 없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본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p194 :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보조정리 7의 주석에서 말하듯이 자연 전체가 하나의 개체이며, 그 부분들, 곧 모든 물체들은 전체 개체의 변화 없이도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단 하나의 개체로 간주된 자연 전체가 바로 앞에서 말했던 연장 속성에 속하는 매개적 무한 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입니다.

하위의 개체를 형성하는 부분들 각자도 역시 그 자체가 다수의 부분들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 물체로서의 개체입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무한하게 분할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p195 : 각각의 독특한 실재, 결과적으로 (2부 정리 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인간이 실존하고 작업하는 역량은 다른 톡특한 실재에 의해서만 규정된다(1부 정리 28에 의해).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어떻게 독특한 실재로서 인간의 자(196)기 보존 역량이 다른 존재자들과의 끊임없는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관계를 통해 증대하고 감소하는가에 관한 논의입니다.

 

2. 스피노자 인간학의 기초: 코나투스

스피노자 인간학의 중심에는 코나투스와 욕망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습니다. 코나투스(conatus)는 라틴어로 노력이나 경향또는 분투등을 가리키는 말이며, 영어로는 effort,endeavor 또는 최근에는 perserverance라고 주로 번역합니다.

 

p197 :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본질로 하는 것은 단지 생명체만이 아니라, “각각의 모든 실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 곧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는 생명체에게만(198)고유한 것이 아니라, 무생명체들까지도 공유하는 특성입니다.

 

또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부르는 것에게 고유한 것으로 한정하지도 않습니다. 국가와 같은 집합적인 실재도 코나투스를 갖고 있으며, 지구 전체도 자기 나름대로의 코나투스를 계속 발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를 좁은 의미의 의식적인 노력이나 지향적인 추구 행위로 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p199 : 우리가 3강에서 본 것처럼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본질을 이루는 신의 속성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신 또는 실체의 본질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신이 지닌 원인으로서의 무한한 역량을 나누어 가짐을 의미합니다.

 

p200 :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각각의 모든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역량 또는 노력은 실재의 주어진 본질 또는 현행적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포텐시아 시베 코나투스”, “역량 또는 노력즉 각각의 독특한 실재가 무한한 신의 역량에 근거하여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역량이 바로 코나투스라는 독특한 실재들의 본질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외부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한, 각각의 독특한 실재가 지닌 이러한 코나투스는 무한정하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은 관성 원리의 형이상학적 표현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인간의 본질로서의 욕망

p201 : 우선 스피노자는 의지욕구를 구별합니다. 의지와 욕구는 모두 코나투스의 표현이지만, 의지는 정신의 측명에서만 표현되는 코나투스를 가리키며, 욕구는 정신과 신체에서 동시에 표현되는 코나투스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욕구를 인간의 본질로 정의합니다. (202) 스피노자는 욕망을, 욕구에 의식이 결합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욕구와 욕망은 사실 동일한 것입니다. 다만 욕망은 욕구에 의식이 더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죠.

 

p204 : 스피노자가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코나투스 곧 존재의 보존으로서의 욕망을 이미 주어져 있는 확정된 본질의 보존으로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3부 부록에 따르면 욕망은 그것의 주어진 여하한 변용으로부터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를 의미합니다. 욕망은 이미 정해져 있는 어떤 본질의 단순한 보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주어진 여하한 변용으로부터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205)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행복과 능동성을 추구하는 길은 우리 욕망의 상이한 표현들인 다양한 변용들 사이의 선택과 조절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더 나아가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은 정신과 신체의 관계가 위계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지 않게 해줍니다. (206) 정신의 역량이 강할수록 신체의 역량도 강해지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33의 주석에서 잘 나타나듯이 정신이나 신체가 능동적일수록 그에 비례하여 신체나 정신도 능동적이라고 이해합니다.

 

셋째, 더 나아가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은 이성과 욕망, 이성과 정서 사이에도 위계 관계나 대립 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함축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윤리학>에서 스피노자가 가장 중요한 비판 대상으로 설정하는 관점은 바로 이것, 즉 정신과 신체를 상반된 것으로 이해하고, 정신이 정념 또는 정서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2. 세 가지 일차 정서 : 욕망, 기쁨, 슬픔

 

역량의 변화로서의 정서

아펙투스, 즉 정서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닙니다.

 

첫째, 한편으로는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용들이 있습니다.

둘째,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이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의 모든 인식은 외부 물체가 인간의 신체를 변용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변용으로 인해 우리 신체에 생기는 흔적이 바로 이미지이며, 변용 작용과(210)동시에 우리의 정신에서는 이 변용에 대한 사고로서의 상상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상상은 변용의 결과 신체에 생긴 물질적 흔적으로서 이미지에 대한 관념입니다.

 

이렇게 외부 물체들이 우리의 시각이나 청각, 촉각을 변용하여 이미지들을 남기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정신은 그 이미지들에 대한 관념들을 형성하며, 스피노자는 이를 상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신체를 변용한 이 물체는 대개의 경우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거나 아니면 해로운 것입니다. (322) 신체의 행위 역량이 증대함과 동시에 나의 마음에 기쁨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신체의 행위 역량이 증대함과 동시에 정신이 기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아펙투스, 곧 정서입니다. (212)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서란 결국 우리의 존재 보존 역량, 즉 코나투스 역량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세 가지 일차 정서

 

p213 : 어쨌든 스피노자는 인간의 모든 정서는 욕망, 기쁨, 슬픔이라는 세 가지 일차 정서에서 파생되며, 그 정서들이 혼합된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p214 : 기쁨은 쾌감과 희열로 나뉘는데, 쾌감이 신체의 일부분의 역량의 증대를 나타낸다면, 희열은 신체의 모든 부분이 동등하게 역량이 증대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쾌감은 역량의 증대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리학 4부 정리 43에서 말하듯이 쾌감은 과도할 수 있고 나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13 : 데카르트는 놀람을 첫 번째 시초 정념으로 제시하지만, 스피노자는 놀람이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키지도 감소시키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상상으로 규정합니다. 또한 스피노자는 사랑과 미움을 일차 정서에 포함시키지 않고 각각 기쁨과 슬픔에서 파생되는 정서라고 간주합니다. 이는 사랑과 미움이 각각 외부 원인의 관념에 수반되는 기쁨과 슬픔이며, 따라서 기쁨과 슬픔의 변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3장 연관망으로서의 정치

 

사랑과 미움

p218 : 스피노자는 사랑을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에 수반되는 기쁨으로 정의하고, 미움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에 수반되는 슬픔으로 정의합니다. 사랑과 미움에 대한 정의가 뜻하는 바는 매우 분명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기쁨은 우리의 행위 역량이 증대되는 것을 나타내며, 슬픔은 반대로 우리의 행위 역량이 감소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2. 정서들의 연관망

p221 : 만약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낳고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우연에 의해라는 말을 통해,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지 않는 것도 우리의 사랑이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합니다.

(223) 이제 3부 정리15와 따름정리의 내용을 조금 더 철학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정서 산출이 우연에 의해 이루(224)어진다는 것은, 루이 알튀세르의 개념을 빌려서 말한다면, 정서산출의 인과 작용이 과잉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리 13까지의 논의에 입각할 경우, 우리가 어떤 정서를 갖게 되는가는 우리 정서의 원인이 되는 외부 대상의 객관적 성질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25) 반면 정리 15는 외부 대상의 객관적 성질과 우리 정서 사이의 인과관계가 이처럼 단선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우연적인 작용에 의해 굴절되거나 변형되며, 이러한 인과관계를 과잉결정하는 우연적 요소는 바로 상상에 고유한 연상작용입니다.

 

둘째, 따라서 이러한 외부의 물리적 작용이 주관적인또는 정신 내적인작용에 의해 굴절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 두 번째 논점입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관적인 또는 정신 내적인 작용은 의지적이거나 능동적인 작용이 아니라, 주체나 정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작용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비의지적인,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셋째, 따라서 정서 산출이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 정신의 정서적 경험이 단순히 외부의 실재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또한 정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신 자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작용에 의해서도 수동적으로 규정된다는 뜻입니다.

 

p227 : “끌림싫음은 각각 사랑과 미움의 일종인데, 다만 끌림과 싫음의 경우는 우연히”, 즉 어떤 대상이 지닌 객관적 성질과는 무관하게 그 대상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랑 및 미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228) 우리가 어떤 대상들에게 이끌리거나 싫음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대상 자체의 성질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우리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실재들과 유사하다고 상상하는 작용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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