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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말하기의 의무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말하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다. 주인만이 말할 수 있고, 신하들은 존경, 숭배 또는 공포로 인해 침묵한다. 말하기와 권력 사이의 관계는 한쪽의 욕구가 다른 쪽을 장악함으로써 실현된다.

권력과 말하기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사회가 실재적이든 잠재적이든 간에 국가를 지니는가의 여부에 따라 사회를 나누는 근본적인 구분은 권력과 말하기의 연계방식을 문제 삼지 않고는 충분히 밝혀질 수 없다. 국가 없는 사회에서는 이 연계 방식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국가를 형성한 사회에서는 말하기가 권력이 지닌 권리인 데 반해 국가 없는 사회에서는 거꾸로 말하기는 권력의 의무이다. 인디언 사회에서 추장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말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추장에게 말하기는 강제적 의무이고 부족은 추장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 이것은 정치적인 영역에 대한 것이다. 원시사회의 총체적인 정치철학은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추장의 의무 속에서 드러난다. 그곳에는 권력이 차지하고 있는 진정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부족이 그것의 반복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이러한 연설의 본질과 이러한 능숙한 말하기의 본질이야말로 우리에게 권력이 실질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다.

추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추장의 말하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례화된 행위이다. 추장은 새벽이나 황혼 무렵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연설을 한다. 이러한 추장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추장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지만 전혀 아무런 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의 요점은 반복된 전통적인 생활 규범에 대한 칭송이다.

그렇다면 추장의 말하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시사회는 추장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가 권력의 진정한 소재지이기 때문에 분리된 권력을 거부하는 장이다. 원시사회는 폭력이 권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권력과 제도, 명령권과 추장을 명확히 분리하고 경계선을 그어주는 것이 말하기의 영역이다. 추장에게 부과돤 말하기의 의무, 즉 그가 부족에게 지고 있는 끊임없는 말하기야말로 무한한 부채이며 말하는 사람이 권력자가 되는 것을 막는 보증서인 것이다.

 

 

8장 밀림의 예언자

 

문명과 미개를 대비시키는 전통에서 정신은 문명이라는 좀 더 풍요로운 대지에 뿌리내렸을 때에만 고귀한 형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 야만인의 정신은 야만스러운 정신에 머물러 있다는 확신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음비아-과라니족은 가르쳐주었다. 신들과 인간들이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의 원초적인 신선함 속에서 전개되는 인디언들의 종교사상은 엄밀하면서도 자유로운 명상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샤먼을 악령으로 보지만, 기독교와 동등한 차원에서 훌륭히 맞설 만큼의 무언가와 조우했음을 자신도 모르게 고백하고 있다. 자신들의 세계의 한계와 기독교 담론의 공허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조우하게 되었다. 음비아족은 4세기에 걸친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들이 인간에게 거주지를 주고 떠날 때 명령한 규범을 지키면서 조상들을 따라 자신들의 고토에 계속 거주하기를 고집하며 부족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다른 인디언들처럼 선교소에 나올 것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자신들을 멸시하던 것이 자신들이 생존과 명예 그리고 윤리를 위협하는 것을, 즉 새롭게 나타난 자들의 신이 자신들의 신들과 신들의 이야기를 서서히 파괴하는 것을 앉아서 지켜봐야 하는 치욕과 고통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거부는 강력한 것이었다. 거부야말로 과라니족 특유의 것이고 인디언 문화 속에서 과라니 문화가 차지하는 매우 특수한 위치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민족학적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말하기의 주인인 카시케-샤먼들이 열의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에 인디언들은 언제나 귀를 기울인다. 음비아족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주제들에 관한 것이다. 이 지구사에서의 운명, 신들에 의해 정해진 규범에 순종할 필요성, 완벽한 상태, 즉 아구이에의 성태에 도달할 희망이다. 샤먼들은 이러한 성격 이상의 것이 있다. 의사이고 명상가이다.

과라니족의 구전 문헌에서는 침전의 층위가 발견되는데, 하나는 세속적인 것으로서 신화 체계의 전체이고, 다른 하나는 성스러운 것, 백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기도와 종교적인 노래 그리고 파이들이 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느낄 때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그들의 입을 빌려 터져 나오는 즉흥적인 이야기 모두가 포함된다. 샤먼이라기보다는 예언자인 파이들은 시적 풍부함으로 가득한 언어형식을 드러낸다. 거기에서 우리는 세속적인 언어를 부정하는 언어로써 성스러운 영역을 표현하는 인디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존재와 사물을 그들의 숨겨진 차원과 신성한 본질에 따라 명명하고자 하는 바람으로부터 생겨난 언어의 창조 행위는 위대한 이야기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것에 고무된 소리의 주인이자 인간과 신들과의 대화를 기다리는 자인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로고스와 아름다운 지혜의 형태로 생동하는 신념을 집어넣는다. 거주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들은 인간의 그러한 노력에 동요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고 이야기하는 자에게 과거의 기억과 조상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아직 신들과의 끈을 놓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아직 가능한 것이다. 신으로부터의 말 즉 계시를 기다리는 것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신들은 귀를 기울이는 자들에게 그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뒤늦거나 혹은 너무 때 이른 애원의 움직임은 이렇게 구성된다. 나만두는 다시 빛을 비추어줌으로써 인간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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