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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부활하는 보편경제학
p260 : 소비란 파괴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형의 것을 파괴해서 무형의 것으로 만들거나, 예쁘게 담겨 있는 요리를 입속에 집어넣고 와작와작 씹어 먹어버리는 것도 틀림없는 파괴입니다. 바타유가 거론한 종교적 제의의 경우를 보면, 신에게 인간의 생명을 바치는 ‘sacrifice’(공희)등에서는 이 파괴는 좀 더 극적인 표현을 취합니다. 파괴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죽음은 소비의 한 형태이며, 생산은 죽음을 목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p262 : 프로이트가 무의식 속에서 발견한 죽음의 충동에서는 모든 것이 스파크를 일으키듯이 단락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순서에 따른 질서를 무너뜨리고 중간에 삽입된 매개체를 무시한 채, 단번에 목적지로 가고자 하는 강한 충동이 작동하지요. 삶의 최종 목적지는 어딘가 하면, 그것은 아마도 죽음일 겁니다. 인간의 무의식에서도 순서에 따른 질서를 무시하고 단번에 목적지로 가고자 하는 충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그런 ‘마음’의 작용을 ‘죽음의 충동’이라 명명했던 겁니다.
p264 : 포틀래치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한 부를 선물의 형태로 단번에 소비해버리고자 합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일부 과격한 수장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귀중한, 문장이 들어간 동판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산산조각내거나,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곤 했습니다. 성대한 제의로서 거행되는 증여의 행위는 그 극한에서 바타유가 말하는 ‘지고성’과 접촉하게 됩니다. 창조력이 넘치는 ‘무’라고나 할까요? 그런 무가 증여의 다이내믹한 행위 전체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p270 : 결국 수는 인간의 표상화 능력의 가장 기초부분에 존재하는 ‘시니피앙’인 셈입니다. 그런 ‘시니피앙’이 사고 속에 존재하는 덕분에 사물의 표상이 가능해지는 셈이므로, 이것은 곧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초적 억압’의 작용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기는 수는 자연수이므로, 자연수가 인류의 ‘마음’에 원초적 억압을 가함으로써 모든 논리적 사고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p273 : 순수증여와 같은 지고성을 포함한 보편경제학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초적 억압 이전 내지는 직전에 펼쳐지는 대칭성 무의식의 영역과 절묘하게 접촉하고 있는 새로운 개념의 ‘수’를 찾아야만 합니다. 다행히 현대수학은 그런 ‘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라이프니츠 식의 실무한(현실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무한)으로서의 ‘무한소’나 ‘무한대’를 포함함으로써 확대된 실수, 즉 ‘초실수’의 체계입니다.
라이프니츠는 미적분학을 창조할 때, ‘유용한 상상의 수’로서 무한수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수는 0과는 다르지만 어떤 실수보다도 작은 수입니다. 어떤 실수보다도 작은 셈이므로, 무한소는 몇 번을 더해도 역시 어떤 실수보다도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수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가 성립합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는 어떤 실수든 계속 더해가면 다른 어떤 실수보다도 커질 수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의 직관에도 부합하는 생각이지만, 무한소에서는 그것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278) 수학의 신비함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기호화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게다가 그 기호는 엄밀한 논리의 규칙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수학의 룰입니다. 그럼으로써 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무의식의 영역에서의 일이 엄밀하게 비대칭적인 논리로 표현되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음악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p281 : 증여가 상품으로서의 가치나 물질의 사용가치만이 아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a를 함께 상대방에게 건네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증여되는 물질은 하나의 성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수의 가치로 표현할 수 있는 ‘표(282)준적 부분’과 실체가 없는 ‘무한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초실수’와 서로 유추관계에 있습니다.
p288 : 크리시트교 신학에서 천사는 육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이므로, 질료적 신체를 수반하지 않은 성령의 한 부류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천사는 신의 피조물이라고도 합니다. 즉 천사는 무는 아닌 셈이지요. 게다가 천사는 신이 사는 ‘영원’의 시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애붐’의 시간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애붐’의 시간은 신의 소유인 무시간의 영원성과 인간의 소유인 유한한 시간 사이를 잇는 중간적인 시간의 개념을 나타내므로, 여기에도 역시 무척 얇고 희박한 물질적인 현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수’의 개념으로 나타내보면 ‘무한소’가 되면, 그것은 또한 무척 촘촘한 필터의 개념이 되어 초실수의 체계를 형성합니다.
<신의 발명>에서는 저는 ‘신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는 정령이나 성령이나 천사의 존재를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쓴 바 있습니다. 그런데 글로벌 자본주의 이후에 출현해야 하는 것은 이런 촘촘한 사고의 필터를 거쳐 나타나는 ‘섬세한 정신’을 포함시킨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아닐까요? 지고성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바타유의 보편경제학이 지향한 것도 아마 그런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런 개념이 반영되면 자본주의의 존재근거가 흔들리면 다음 체계로 이전하게 되지 않을까?
종장. 형이상학 혁명으로의 길안내
p292 : 언어가 갖는 합리적, 형식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랑그(소쉬르가 처음 사용한 언어학 용어로, 각 개인의 머릿속에 저장된 사회 관습적인 언어의 체계)가 대칭성 무의식이나 유동적 지성과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지도 않고도, 문법구조의 생성 메커니즘 등을 순수하게 논리적인 관점에서 밝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합리적으로 구성된 언어가 일단 인간의 ‘마음’을 통해 표현되자마자, 거기에 비논리적인 무의식의 작용이 침입해오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문법구조가 무의식의 대지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비로소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리고 말이 ‘마음’의 진실과 맞닿아 있는 깊은 땅속까지 내려가보면, 거기서는 논리적인 구조를 가진 문법구조와 대칭성의 非(비)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무의식이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하나로 융해되어 있는 모습이 보일 겁니다.
-> 소쉬르와 다르게 랑그가 아닌 파롤의 문제에 집중한다고 선언한 라캉. 그리고 공시성(synchrony)이 아닌 통시성(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어의 변화를 연구, diachronic, 시간을 통과한 변화를 본다)의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해간 언어구조주의자들(언어인류학)의 계보. 결국 언어학에서는 화용론으로 이어가고, 언어의미론과의 분열을 막기 위한 언어학자들의 분투 속에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 등 표준이론을 정립해 이 분열을 봉합하고자 한다.
p305 : 다신교적인 사고에서는, 스피리트가 활동하는 대칭성 무의식의 영역을 변형시키게 되는 원초적 억압에 대해 특권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종의 ‘기능’으로서 이해되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을 계기로 해서 두 종류의 신관념이 형성된 셈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탄생시킨 원초적 억압 자체를 신성화해서 거기에 하나의 아니 유일한 신 관념을 두려는 움직임(306)은 다신교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신교 세계에서는 유동적 지성=대칭성 무의식의 작용 자체를 신화나 도상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이종교배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이질적인 영역 사이를 횡단해가는 유동적 지성의 움직임에 대한 표현으로서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 앞에 출현한 ‘야훼’라는 이름만을 가진 그것은 이런 무의식의 작동을 도상화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이름만 가르쳐줍니다.
이때 모세의 신이 한 것은 대칭성 무의식을 언어의 논리에 의해 억압하는 ‘원초적 억압’을 신성한 빛으로 감싸는 일이었습니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모든 의미표현(시니피앙)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은 자신에게는 ‘야훼’라는 이름만 있고 다른 감각적 요소는 전혀 없다고 단언함으로써, 자신은 모든 시니피앙(307)이 탄생하는 근원인 ‘순수 시니피앙’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신교의 성립에 의해 원초적 억압의 신성화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원초적 억압이 다신교 세계에서 갖고 있던 양의적인 작용에 대해서도 억압이 가해집니다.
p310 : 국가건력 자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트릭스터적인 성격을 가진 양의성의 왕이 힘의 원천에 가한 원초적 억압이었는데, 근대는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왕권에 숨어 있는 양의성이나 트릭스터적인 성격 자체가 부정되거나 직접적인 파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권력을 성립시킨 원초적 억압의 기능이 더욱더 억압을 당해, 사회 표면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그렇게 해서 왕권 가운데 법률적이고 질서유지적 측면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자 이런 권력의 형이상학화 운동에 있어서는 왕이 현실의 인간이라는 사실마저도 불필요한 것, 존재 자체만으로도 성가신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311) 따라서 그런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연적인 와’ 대신에, 설령 구체적인 육체를 가진 왕이 죽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불사의 사회적인 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왕의 권력을 ‘법인’이라고 하는 결정적인 해석이 등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은 더 이상 왕 같은 건 필요 없어지므로, ‘주권자는 국민이다’라는 국민국가관이 탄생하는 것은 자명한 귀결이겠지요.
국가에 대한 기억의 심층에는 여전히 ‘원초적 억압’에 대한 기억이 변형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그런 억압이 일어나는 경우 사람은 반드시 악몽을 꾸게 된다고 하는데, 국민국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독재자의 출현이나 전체주의국가 같은, 예전 원초적 억압의 장면을 재(312)현하는 존재가 행여 되돌아올까 봐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죠. 민주주의에 의한 국민국가는 결코 인류의 ‘자연사’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힘’을 둘러싼 형이상학화 운동의 종국에 출현한 권력형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변화’에 따라서 다른 형태로 변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p316 : 본원적 축적은 실제로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실행됩니다. 증여경제가 만드는 따듯한 공동사회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은 ‘배포가 큰 사람’은커녕 ‘게이른 불량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들이 살고 있던 토지로부터 쫓겨났으며, ‘자기 자신의 가죽’이(317)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자신들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파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 도시로 대거 흘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본원적 축적의 과정에서 대칭성의 사회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p319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원초적 억압에 의해 이루어진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잊으려 한다는 거지요. 즉 원초적인 억압의 장면 자체를 다시 한 번 ‘억압’해버림으로써, 자본주의는 희망으로 가득 찬 생활을 계속할 수가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그 사회를 움직이는 노동자라는 존재는 본원적 축적의 과정에서 ‘노동력 이외에는 갖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린 이들에 해당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본원적 축적=원초적 억압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운행상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에서도 자본주의는 본원적 축적에 대한 기억을 억압할 필요가 있습니다.
(320) 억압한 것이 회귀해서 올 때, 사람은 악몽을 꾼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합리주의의 권화와 같은 경제 시스템에 억압당한 것이 회귀해서 올 때, 주기적인 ‘공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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