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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성 인류학 5, 6장 발제

화니짱

대칭성 인류학 5,6장 발제(화니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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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완성된 무의식-불교(1)

 

p163 : 대칭성인류학은 억압당하지 않는 무의식의 작용을 가능한 한 순수한 형태로 끌어내려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미 2천 몇백 년 전부터 같은 시도를 해왔으며, 그 사상을 철학이나 공동체의 형태로 현실세계 속에 표현하고 실천하려 해왔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일찍이 <슬픈 열대>라는 자전적인 책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구조인류학은 어딘가 불교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쓴 바 있습니다.

 

p166 : 불교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처럼 의식이 있는 존재를 유정이라고 하는데(의식이 없는 존재는 비정입니다), 이 유정의 마음은 비록 그 생물체가 죽더라도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차원의 구조를 한 마음의 연속체에 합류해 다음 세상에서 유정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사고에 의하면, 지금 있는 우리의 개인 존재라고 하는 것도 그 자체로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무한한 과거로부터 계속되어온 생명윤회의 거대한 고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p169 :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같은 본질이 공유되어 있으므로, 수렵민들은 그런 자연을 로서 취급하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필요한 포획이나 파괴를 억제하는 심리적 내지 사상적인 제어장치가 엄연히 존재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p171 : 대칭성의 논리는 일반적인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그런 일반적이지 않은 논리로부터 윤리라는 사고가 탄생한다고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대신 과학의 토대인 합리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형의 논리에서는 도덕이 발생하겠지요. 도덕은 합리적 사고가 납득할 만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73 : 자신만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공리적인 목적을 추구하려고 할 때마다, 대칭성의 사고에 의한 윤리가 제동을 걸어왔습니다.

윤리에 의한 명령은 항상 부분과 전체가 일치한다라는 대칭성의 논리를 따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윤리는 합리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합리화가 불가능한 윤리에 의해, 지구상의 생태계는 균형을 유지해왔습니다.

 

p175 :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공덕을 쌓을 수 있었다라는 생각이 단 한 순간이라도 떠올랐다면, 이미 그 보시는 교환의 사고에 의해 오염되고 맙니다. 뭔가를 증여함으로써, 그 보상으로 뭔가를 기대하기 때문이죠.

 

p176 : 보시는 순수증여로서 그런 교환의 고리 속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선물을 통해서 증여하는 사람증여의 대상자의 구별이나 분리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상황, 즉 완전한 대칭성의 상황에서만 순수증여는 가능해진다. 보살은 그런 대칭성의 사고의 이상을 체현하는 존재여야만 한다. 보시라는 행위는 차별상이 발생할 소지를 마음에서 차단한 채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p180 :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과학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이진연산에 의해 작동하는 논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이진논리적인 구조를 이용하면서 신화와 같은 형태를 통해 대칭성의 논리를 따르는 독특한 사상을 전개해왔습니다.

 

p182 :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또한 개체성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은, 개체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다 큰 실재 속에 발생한 자그만한 매듭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자기라는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한한 확대 가능성을 갖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연기)이 마주치는 작은 점에 순간적으로 생기는 매듭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묶였다가는 풀리고, 풀렸다가는 다시 묶이는 끝없는 반복과정 중에 생긴 순간적인 매듭에 불과한데, 우리는 것을 영속하는 실재로 착각하고, 그로 인해서 온갖 착각이나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타자나 대상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광대한 연기의 상호작용 중에 발생하는 거품효과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인간은 또다시 자기 밖에 있는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집착합니다.

 

P184 : 대칭성의 사고는 본래 분열증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일종의 망상에 사로잡힌 종교가 신화나 의례가 활약하던 장소를 점거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런 시대에, 즉 대국가가 지구상에 잇달아 출현한 시대에 불교가 등장했던 겁니다.

 

P191 : 무의식이 형성될 때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서 일차과정이 사람의 마음속에 형성되는데, 그 일차과정은 고차원의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표상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표상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고차원의 유동성인 일차과정을 억압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생명적인 일차과정을 억제해 삼차원적인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논리가 활동 가능한 평면이 형성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밑바닥에서 원초적 억압이 끊임없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일신교는 이 마음의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원초적 억압이라는 근원적인 현상을 중요시했습니다. 바로 그 원초적 억압에 인간의 징표가 있다고 생각해, 거기에 그들의 신을 두었다-라캉은 프로이트의 생각을 발전시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생명적인 과정을 억압할 때, 신경증이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옳았던 셈입니다. 종교는 강박신경증이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기구를 출발점으로 삼으니까요.

 

6. 원초적 억압의 저편으로 불교(2)

 

P200 : <화엄경>이라는 책에는 무한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무의식이 무한집합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현대 정신의학의 발견과도 대응함을 알게 됩니다.

 

P204 :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계열에 따라 정렬되어온 우리의 의식에는 엄청난 전환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안다라는, 시간 질서를 무시한 인식방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으로 명명한 것이 그와 똑같은 작동을 하는 것을 이미 지켜봤습니다.

 

P207 : 19세기에 활약한 수학자 데데킨트는 이런 식으로 해서 무한집합이라는 것을 정의했습니다. “집합을 그 자체의 진부분집합과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때에 한해서만 그 집합은 무한하다라는 것이 데데킨트의 정의인데, <화엄경>에 표현되어 있는 법계의 구조는 그야말로 정확하게 이 무한집합의 정의를 따릅니다. 이처럼 아무리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도 법계는 무한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우리의 마음역시 무한 구조를 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P209 :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성이라는 것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비대칭성의 논리학을 사용해서 많은 것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불교는 거기서 반전해, 개체를 대칭성의 사고 속으로 던져 넣음으로써, 비대칭성과 대칭성의 공존에 의해 발달해온 야생의 사고의 (복논리적인) 지혜를 가능한 한 완전한 형태로까지 발달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서구의 전통에서 형성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자유에 대한 사고가 형성되었습니다. 자신은 이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개체성에 대한 예리한 의식을 유지한 채, 모든 것(존재)사이에서 동질성을 발견하려는 대칭성의 사고를 작동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우주 속 극히 작은 부분으로서의 개체나 개인의 자유에 대해 생각했던 셈입니다.

 

P211 : “존재는 상호관련성 그 자체인 셈입니다. 관련 혹은 관계라고 해서 단순히 AB의 관계처럼 각각의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그런 전체적 관련성의 망이 우선 있고, 그 관계적 전체 구조 속에서 비로소 AA이며 BB이고, AB는 개별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212) 여기서 자유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탄생합니다. ‘에는 자성이 없다고 한다면, 개체성은 전체적 관련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셈입니다. 그때 유동적 지성만이 수 있는 존재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의 바다 속에서, 모든 것이 개체로서의 존재를 반짝이게 됩니다.

-> 사이버네틱스나 커뮤니케이션 이론, 라캉의 정신분석학, 맑스의 공산주의저 존재론과 유사.

 

P220 : 서구의 정원은 무의식에 대한 원초적 억압 위에 기호표현으로서 정원을 만듭니다. 그에 비해 일본의 정원은 무의식의 작동을 억압하는 모든 비대칭성의 사고를 제거해, 무의식의 작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놔두고자 합니다.

기호표현(시니피앙)이 무의식을 억압하면, 거기에 기호내용(시니피에)이 형성됩니다. 그렇게 해서 의미가 발생하는 거지요. 그런데 돌 정원은 쓰레기를 세계의 쓰레기를 해체하는 버섯이나 이끼처럼’, 의미와 상징을 해체해버리려 합니다. 돌과 모래와 이끼만으로 이루어진 그 정원에는 시니피에가 없습니다. 순수한 시니피앙만으로 이루어진 ()’인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생의 사고가 행해지던 사회에서는 부나 권력의 축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대칭적 사고의 이상은 바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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