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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_야생의_사고_제8장_되찾은_시간_2024061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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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되찾은 시간 (Time regained)

 

 

 

지금까지 나는 절차와 방법의 일람표를 만드는 데 특히 주력해왔다. 그 체계를 총괄적으로 바라볼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와 같은 절차와 방법을 이어주는 관계의 체계성이다. 거기에서 이 체계의 양면성을 곧 알 수가 있다. 한 쪽은 내적 통일성의 면이며 다른 쪽은 실제로 무한한 확장 능력의 면이. 내가 든 예에서 보았듯이, 구조는 어느 경우에나 하나의 축(수직축이라고 상상하면 편리하다)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 축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추상과 구체를 서로 연결해주지만 분류하고자 하는 속성은 어느 쪽 방향을 택해도 언제나 그 극한까지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극한은 모든 분류가 이분법적 대비를 톨해서 이루어진다는 암암리의 공리에 의해 정해진다. (315)

 

분류하는 의도가 위쪽을 향할 때, 즉 보편성과 추상성이 극대화될 때는 다양성이라는 것은 분류 도식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장애요소가 되지 않는다. 현실 세계는 도식의 작용에 의해서 서서히 순화되어가며 그 극한에 이르러서는 이 작업의 의도이기는 하지만, 안순한 이항대립(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전쟁과 평화 등)의 형태로 남는다.

 

분류가 밑으로 진행될 때도 이 방법은 외적인 한계가 없다. 자연종의 질적 다양성도 한 질서의 상징적 재료로서 훌륭히 취급되고 있으며 구체적, 특수성, 개별성에의 전진은 인명호칭이라는 장애물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는다. 고유명까지도 분류항으로 사용될 수 있다. (316)

 

(영문본 p. 247, 인용문이 다름)

Far from always being hostile to the rise of science, as is assumed today, the regime of fetishes long served to underwrite its spontaneous preparation, since it consecrated concrete observation, out of which abstract contemplation had to arise. (Comte 2, 3:93)

 

콩트는 이 야생의 사고(Pensee sauvage)’를 역사의 한 시기-물신숭배(fetichisme)와 다신교의 시대-의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야생의 사고라는 것은 야만인의 사고도 아니며 미개인인이나 원시인의 사고도 아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세련화되었다든가 길들여진 사고와는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이다. (317)

 

야생의 사고가 현재 비교적 잘 보호되는 영역이 있다. 예술의 경우가 그것으로서 우리의 문명은 그에 대해서 국립공원 급의 대우를 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인공적인 방식에는 다분히 그에 따르는 이익과 손해가 있다. 또 사회생활 가운데서도 아직 미개척된경우에 해당되는 영역이 많다. 거기에는 무관심으로 해서 또는 무력하기 때문에 또 많은 경우는 우리들이 무르는 이유로 해서 야생의 사고가 아직도 번성하고 있다. (318)

 

(아마도 현대의 토테미즘?)

(영문본 247~249)

Now, this is in fact what Comte became increasingly convinced of:

 

Thus we must go back to fetishism in order to conceive of the true institution of a logic which, despite the stupid vanity of our pedants, would necessarily lose its main value if it were not popular and perpetual. (Comte 2, 3:121) (영문본 p.248)

 

This remarkable evolution, which leaves far behind the “sort of intellectual sympathy” for fetishism expressed at the conclusion of Lesson 52 (Comte 1, 5:60), may be explained in two ways. Already in the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Comte recommended the “judicious exploration of the various contemporary savages” (Comte 1, 5:63). He returns to this theme persistently in the Système de politique positive, praising the “humble thinkers of Central Africa” and “the remarkable works produced by contemporary fetishists.” And, speaking of sculpture and painting: “Their decisive first draft is plainly due to fetishism, above all for the former, of which Negro artists continue to offer us such remarkable examples despite the imperfection of their instruments” (Comte 2, 3:99, 120, 137).

 

내가 야생의 사고라고 부르고 콩트가 자발적 사고라고 부르는 그것의 특이성은 그것 자체가 갖는 목적의 광대함에 있다. 이 사고는 분석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이고자 하며 또 양 방향의 극한까지 진행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동시에 그 양극 간의 조종 능력을 보유하려고 한다. 콩트는 이 분석적 방향을 아주 잘 파악했다. (318)

 

콩트가 종합적인 면에 대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야만인은 현상의 무한한 다양성의 포로이며 막연한 상징작용’(Comte, p.63)도 전혀 몰랐으므로 그들에 대한 올바른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콩트는 믿었다. (318-319)

 

야생의 사고를 규정하는 것이, 인류가 이미 그 후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강한 상징 의욕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구체성을 향한 세심한 주의력이며 또 이 두 태도가 실은 하나라는 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라면, 그 것은 바로 야생의 사고가 이론적, 실제적 견지에서도 콩트가 그 능력을 부정한 지속적 관심에 바탕을 두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이 관찰하고, 실험하고 분류하고, 추론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미신의 추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 우연의 장난도 아니다. 문명의 기술발견에 우연성이 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 책 처음에서 이야기한 바 있으나 그것은 매우 천진난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영문본)

Catching up in this manner, if I may put it this way, with domesticated thought, this thought that I call wild and that Comte calls spontaneous lays claim to being simultaneously analytic and synthetic. It is defined both by a voracious symbolic ambition, to the point that humanity has never again experienced anything comparable, and by scrupulous attention turned entirely toward the concrete. But when man observes, experiments, classifies, and speculates, he is no more driven by arbitrary superstitions than by the

vagaries of chanceand we saw at the beginning of this work that it is naive to ascribe a role to chance in the discovery of the arts of civilization.

 

콩트의 견지에서 보면 지적 진화는 모두 신학철학이 갖는 피치 못할 원초적 힘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인간이 자연현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성의 본질적 양식을 인간 자신의 행위와 동화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Comte, 51e lecon ; , p. 347). ··· 인간이 스스로의 욕구에서 자연의 속성을 보지 않고 자연을 인간의 의지와 똑같은 의지로 생각한 데에 콩트나 그의 추종자 대다수의 잘못이 있었다. (319)

 

효율적인 실제 활동과 비효율적인 주술 의례적 활동과의 차이는 흔히 생각되듯이 양자를 각각 객관적 성향과 주관적 성향으로 정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위자에 의하면 실제 활동은 그 원리에 있어서 주관적이며 그 방향성에 이:ㅆ어서 원심적이다. 그 활동은 행위자의 자연계에 대한 간섭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주술 조작은 행위자에게 우주의 객관적 질서에 부속된 첨가물로 여겨진다. 그 조작을 행하는 인간에게 주술은 자연이 인과적 고리와 동일한 필연성을 드러내며 행위자는 의례라는 형식 하에서 그 자연의 인과 고리에 그저 보조적인 고리를 첨가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주술 조작을 바깥에서 관찰하여 마치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320)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미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관찰 또는 해석할 떄 나타내는 예리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명인은 이미 없어진 능력을 개발하거나 특별한 감수성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자취에서도 짐승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자기 집단 누구의 발자국이라도 서슴없이 알아맞출 수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Meggitt)의 방법은,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바퀴의 미세한 회전이나 엔진 속도의 변화에서, 또 상대방의 눈빛에서 그 의도를 알아채고 이제 추월할 때라든가 지금 상대방의 차를 피할 때라고 신속히 판단을 내리는 그 방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중략) 이와 같이 우리는 인간과 세계가 서로의 거울이 된다는 시각의 상호성이 기계 문명의 면에 투영되는 것을 또다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호성만이 야생의 사고의 속성과 능력을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다. (321)

 

야생의 사고는 관찰의 시점과 해석의 시점을 구별하지 않는다. 즉 말 상대가 쓰는 기호를 관찰에 의해서 먼저 기록하고 그 다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대가 이야기 할 때 음성으로 표현된 기호는 의미를 담고 나온다. 언어 음성을 통해 분해해서 추출되는 요소의 하나하나는 기호가 아니고 기호를 만드는 수단이다. 그것은 변별적 단위이며 다른 단위와 바꾸면 반드시 의미가 변화한다. 그러나 그 단위 자체는 의미의 속성을 포함하지 않고 다른 단위와의 결합이나 대립에 의해서 의미를 포함한다. (322)

 

(분류체계를 의미체계로 보는 개념을 보여주는 첫 번째 예시: 토테미즘과 공물 관계)

 

토테미즘의 경우 명조 대신 다른 동식물이나 자연현상을 대치하지 못하는 것은 명백하다. 어떤 동물 대신에 다른 동물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체계의 유일한 실체는 비연속적으로 배열된 사이의 변별망에 있다. 공물의 경우에는 그것이 거꾸로 된다. 어떤 신이건 어떤 종류의 공물이건 간에, 공물에 사용되는 물체는 기호의 차는 있으나, 기본 원리는 대치의 원리이다. 정해진 물건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무엇인가 다른 물건을 대신해도 좋다. 무엇을 희생하는가에 다라서 열의의 폭이 변화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의도뿐이다. 그러므로 공물의례는 연속성의 세계에 위치하는 것이다.(323)

 

토테미즘의 체계와 공물의 체계 사이에는 두 개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테미즘이 양화(量化)된 체계 인데 비해 공물의례는 그 항들 사이의 연속적 이행을 인정하는 체계이다. 제물로서 오이는 계란과 같고 계란은 병아리와 같고 병아리는 닭과 같고 닭은 산양과 같고 산양은 소와 같다. 또 이 추이에는 방향성이 있다. 소가 없으면 오이를 제물로 바치지만 오이 대신 소를 희생시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반면에 이른바 토테미즘에서 이 관계는 언제나 쌍방향적이다. 소와 오이의 양자를 포함한 씨족 호칭의 체계가 있다면 거기에서는 소는 실제로 오이와 등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혼동될 수 없는 것이고 소와 오이의 이름은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토테미즘에 의해서 이 양자가 구별되며 서로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어야 한다. (323-324)

토테미즘: 상동성에 기초, 병렬적 계열 전체 관계가 동형. 체계 사이의 상관성, 비연속적, 쌍방향적 -> 은유적 관계
 
공 물: 두 극항 간 중개자, 상동성 X, 연속적, 일방적,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인접한 것들을 묶어서 관계를 설정(환유를 통한 동일시 작업)-> 연결항 제거 -> 인접성 공백

 

공물의례는 원래 분리되어 있던 이 두분야 사이에 바람직한 연결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언어에도 잘 표현되어 있듯이 공물의 목적은 멀리 있는 신에게서 인간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 희생된 제물을 이용하여 두 영역을 먼저 연결하고 아울러 이 연결 항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그 목적이 달성된다고 여긴다. 공물의례는 이와 같이 (신과 인간의) 인접성의 공백을 가져옴으로써 기원이 갖는 목표지향적 성향에 의해 대신 다른 면의 연속성을 불러일으킨다. (326)

인티츄마의 역할은 주기적으로 짧은 시간에 새산과 소비와의 사이의 인접성을 재건하는데 있다. (326)

 

인티츄마는 사회집단간의 교환이며 유사성과 인접성 사이의 조종일 뿐 어떤 유사성을 다른 유사성으로 혹은 어떤 인접성을 다른 인접성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다. (327)

 

분류체계는 언어의 수준에 속해 있다. 분류체계 자체에 우열은 있을지 몰라도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부호임엔 틀림없다. (328)

 

씨족명 호칭 신화는 세계 어디나 비슷하다. 특히 그 단순함이 서로 닮았다. (329)

(분류체계를 의미체계로 보는 개념을 보여주는 두 번째 예시: 씨족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의 범세계적 유사성)

메노미니족은 씨족 호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곰이 인간의 형태를 부여받고 (중략) 메노미니 강 하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착한 뒤 그곳에서 철갑상어를 잡고 있었다. 어느 날 세 마리의 뇌조가 와서 윈네바고 호의 퐁 뒤 락이라는 장소에 지금도 볼 수 있는 암초에 머물렀다. 뇌조들은 사람으로 탈바꿈한 뒤 곰을 찾아가서 여러 동물들을 불러들이기로 의논했다. 엘크, , , 사슴, 해리 등 그밖의 씨족 사이의 관계가 생긴 것도 우연한 만남과 도움에 의한 것이. (330)

 

신화의 공통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겉보기에는 하찮은 이야기 같지만 실은 숨겨진 의미가 풍부하면서도 여담이라곤 전혀 없이 간결하다. 이야기는 핵심적 줄거리에 한정되어 있어 분석자에게 새로운 면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둘째로 이러한 신화들은 옳은 의미에서의 기원론이 아니다(하나의 신화는 진정으로 기원론적일 수 있다는 가정하에). 신화들의 역할은 기원론보다도 표식의 뜻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는 기원이라든가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 내지 원인을 끄집어내어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어떤 미세한 일을 특별 취급하든가 어떤 하나의 종을 강조하는 것이다. (331)

 

역사는 눈에 띄지 않게 거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구조 속에 스며들어 온다. 역사는 현재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요소들을 구별하고 그중 몇몇만을 선택하여 거기에 과거를 갖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토템신화가 빈곤한 것은 신화 하나하나가 주로 차이를 차이로서 설정하는 것에 그치고 있으며 그것이 체계의 구성단위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문제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신화 하나하나의 수준이 아니고 그것들이 구성요소가 되어 만들어낸 체계의 수준에서 대두된다. (332)

토테미즘은 체계로서의 여러 성질을 나타낼 수도 있고 배제할 수도 있다. 토테미즘은 어휘로 퇴화되도록 운명 지어진 문법이다. 사고되거나 행해지는 체계가 아닌 항상 체험되는 체계이다. 즉 구체적인 집단이나 구체적인 개인에 밀착하고 있다. 세습적인 분류체계이기 때문이다. (333)

 

강물에 떠내려가는 궁전과도 같은 분류는 분해되어, 물의 흐름이나 깊이. 장애물과 협곡 등에 따라 설계자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배열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기능이 구조보다 우세함은 불가피하다. 토테미즘 이론가에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구조와 사건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구조 자체는 어떤 사건에 의해 소멸되더라도 구조의 형식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토테미즘이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이다.(333)

 

역사와 분류체계 사이에는 기본적 반감이 존재한다. 토템분류는 초초자연적인 원초계열과 문화적 양상의 인간이 포함된 파생계열로 나눈다. 원초계열은 동식물종으로 통시성 속에서 인간 계열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두 계열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파생계열은 원초계열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하나의 계열을 만들어버리기에 유한군으로 분류하기가 불가능해진다. (333-334)

 

인간계의 질서를 자연계 질서의 고정적 투영으로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한계점에 위치한다. 자연계의 질서가 인간계의 질서를 산출하는데 후자는 전자를 반영하는 대신에 그것을 연장하는 것이다. 역사적 생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 없는 형식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만 그들이 지니는 유일한 의미는 서로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334)

 

진화론에는 어떠한 유형의 토테미즘적 종합도 들어갈 여지가 없다. 사물이나 자연 존재는 인간 집단들 사이의 정적(靜的) 다양성에 대한 정적 모델은 될 수 없으며 질서 있게 배치되어 인류의 출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화론과 토템형 종합과의) 양립불가능성 그것 자체가 반대로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그것들이 양립하지 않는다면 분류체계는 어떻게 해서 역사를 배제하며 배제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그것을 통합할 수 있을까? (335)

 

차가운 사회는 역사적 요인이 사회의 안정과 연속성에 끼치는 영향을,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를 통해서 거의 자동적으로 제거하려 한다. 뜨거운 사회 쪽은 역사적 생성을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Charbonnier, pp.35~47; Levi-Strauss 4, pp. 41~43). (335)

 

공시성: 차가운 사회, 회귀성을 가지는 역사적 연쇄, 연쇄가 지속 되어도 구조가 반드시 변하는 것이 아님
통시성: 뜨거운 사회, 단 하나의 계열 속에서 연속적 진화

차가운 사회의 목적은 시간적 순서가 연쇄 내용에 되도록이면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사회들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얻는 가가 아니고 그들이 어떠한 끈질긴 목적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들 사회가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현실의 본질적 부분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335)

 

과거를 역사 과정의 한 단계로 보기보다는 시간을 초월한 모델로 생각하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채택된 입장을 나타낸다. 그 체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하나의 기술, 규칙, 습관에 대해 끈질기게 반복되는 정당화 수단은 세계 어디서나 조상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기때문이라는 것이 유일한 주장이다. 서구에서도 고전이라는 것과 지속성이 정통성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 고전이라는 것은 역사의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절대성을 띤다. 또 이 연속성은 방향도 단계의 개념도 허용하지 않는다. (338)

 

남은 과제는 야생의 사고가 이 이중의 모순을 성공적으로 극복할 뿐 아니라 통시성을 다소 극복하여 공시성과의 협력을 통해 양자 사이에 새로운 알력을 사전에 방지하면서 통일된 체계를 위한 재료를 어떻게 끌어내는 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338)

 

공시적·통시적 체계를 멋지게 분석한 것은 샤프(Sharp, p.71)이다. 그는 케이프요크 반도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여러 부족의 의례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조절의례역사의례상장의례‘. 의례 체계의 기능은 세 개의 대립을 극복하고 종합하는 것이다. 세 개의 대립이란 통시성과 공시성의 대립, 양자 중의 어느 쪽도 생길 수 있는 주기성과 비주기성의 대립, 그리고 통시성 속에서 가역적 시간과 비가역적 시간의 대립을 말한다. (338)

 

아란다 족은 각 개인이 출생 전에 어느 무명의 조상에게 제비뽑듯 선택되어 그 사람으로 현세에 환생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외양이 어떻든 간에 추링가는 특정한 조상의 육체를 나타낸다. 그리고 대대로 그 조상의 환생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엄숙히 부여된다. (340-341)

 

뒤르켐에서 있어서 추링가의 해석은 그의 기본 이론의 하나인 토테미즘의 문장성(紋章性)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토템의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의 동물은 기표(signifiant)의 역할을 할 뿐 성스러움은 그 동물이나 그 도상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쪽으로도 표시될 수 있는 기의(signifie)에 결부되는 것이다. (344)

 

임신이 되면 조상은 곧 자기의 추링가(아니면 추링가의 하나)‘를 포기하고 자기 대신 환생할 자에게 그것을 준다. 자손들이 한 몽이라는 것을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여성이 신비롭게 임신을 한 그 지점에서 본래의 추링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대신하는 추링가를 새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증명서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추링가는 고문서와 흡사하다. 그것은 어떻든 취급자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부동산 등기서와 비슷하다. 물론 분실 또는 훼손되어도 다시 만들 수 있다. (344)

 

고문서가 간행되어 있기만 하면 정치적. 사회적 대변동이 일어나 원본을 상실하더라도 지식이나 조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추링가의 신성함은 이 체계 속에서 유일하게 통시적 의미를 줄 수 있는 기능에서 비롯된다. 이 체계는 분류체계이므로 완전한 공시태 속에 전개되며 그 공시태에는 지속(시간성)도 가능하게 된다. 고문서를 상실했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345)

 

산이나 시냇물, , 늪 등은 원주민에게는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나 흥미 있는 경관에 그치지 않는다……. (중략) 이 토지 전체가 그에게는 예부터 존재했으며 지금도 살아있는 하나의 가계보(家系譜)’와도 같은 것이다. 원주민들은 각자 토템 조상의 역사를,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계를 창조한 전능자의 지배하에 있던, 천지개벽의 시대, 생명의 여명기의 원주민 자신의 행동인 것이다(T. G. H. Strehlow, pp. 30~31). (347)

 

미개 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논리적 우연성과 감정적인 소용돌이라는 이원적 양상의 비합리성을 합리성 속에 수용하고자 합당한 방법을 전개시켜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분류체계는 역사를, 특히 체계에 저항한다고 생각되는 역사를 끼워맞추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토템 신화는 미미한 사건을 마치 대사건인 것처럼 이야기하며 특정 장소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등 역사로 치면 고급의 역사가 아니라 르노트르나 라포르스 등의 야사(野史)적 역사를 말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입사자가 장로의 인솔로 정기적인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은 우리 서구사회에서 괴테나 빅토르 위고의 유적을 답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들은 유품인 가구를 보고 강한 감동을 받지만 그 감동은 그 물건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347- 348)

8장의 제목은 마르셀 프루스트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06-1922년 작품)에서 영감을 받음.
 
앞선 1955년 작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에서 남비콰라족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면서 붙인 제 7, 24장의 제목은 잃어버린 세계 (The Lost World)’ - > 야생의 사고8장 되찾은 시간(Time Reg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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