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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12.
기레민
4. 교단의 그리스도상
이전까지 전해진 예수상 즉 ‘전승 예수’에는 변화가 생긴다. 예수의 ‘부활’을 믿게되면서 ‘교단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시간이 도래한다. 이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건은 유대 전쟁으로 이 66년간의 전쟁 때문에 예루살렘은 무너지게 되었다.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이 전쟁의 영향으로 예수의 이야기는 우주론적 이야기로서 세계의 변화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신의 나라를 위해 사탄과 싸우는 자로 나타나며 그는 세상의 종말과 구세주의 도래를 예언하는 자이다. 저자인 마르코는 예수의 죽음을 바리세이파에 의한 것으로 주장한다. 율법주의자인 바리세이파는 군중의 배후에서 사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된 바리세이파는 예수에 대하여 배타적인 모습을 형성하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루카, 마태오, 요한 등의 복음서는 당시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창조해 내기 위한 고투의 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대교로부터 분리된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은 유대교 예언의 목표를 성취한 것과 동시에 그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는 ‘구제형’의 그리스도의 그림을 담고 있다. 동시에 그와 함께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그림은 ‘구출형’의 의미도 담은 것이다. ‘구출자’ 또는 구출의 단서로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진주의 노래>라는 이야기에서 참고할 수 있다.
신약 성서 외전에 있는 <토마 행전>에는 사도 유다가 감옥에서 부르는 ‘진주의 노래’ 대목이 나온다. 어느 왕자가 부모로부터 이집트 바다에서 용이 지키고 있는 진주를 가져오면 대를 이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집트에 갔지만 주민들이 이방인 왕자에게 식사를 대접하여 그의 목적을 망각하게 해다는 내용이다. 그 망각의 심연에 빠진 왕자는 부모의 편지를 받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벗어던지고 부모가 보낸 옷을 입고 돌아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가 벗어던진 옷은 지상의 신체를 상징하며 부모가 보낸 옷은 ‘인식(그노시스)의 운동’이 작동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방탕한 아들(또는 탕자의 비유)’인데 두 이야기는 아들이 자신의 신분을 상실하고 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같은 구조를 갖고 있지만 회심의 계기가 서로 다르다는 데에서 참고할 점이 있다. 방탕한 아들의 경우는 스스로 회심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반면 왕자를 각성시키는 것은 ‘신적인 재촉’ 즉 아버지의 편지이다. 왕자는 부모의 편지가 없었더라면 영원히 어둠(또는 세속)에 갇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주의 노래>가 담고 있는 그노시스적 인간관은 인간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예수라는 구세주의 가르침에 의해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강조되면서 인간은 육체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주의 은혜에 따라서 그노시스에 참여하면 더러움이 사라지고 하늘로 귀환할 수 있는 우주론이 펼쳐질 수 있었다. 그 전의 인간은 그노시스 없는 무지의 상태에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율법에 영향을 받아왔던 바오로에게 있어서 이원적인 몸의 한계는 육체적 한계를 벗어날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으로 분화되어 극복될 수 있게 된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자신의 행위와 마음이 분열되어 버리기 마련인데 여기에서 육이란 신체라기 보다는 분열된 자기이다. 이 육이란 존재 방식을 하고 있는 인간은 어떤 형태로라도 “모조리 상실된 인간”이다. 이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아가페뿐이다. 율법을 통하든 사랑을 통하든 신에게 도달할 길은 없다. 신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고, 자신의 목숨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한 행위에서 신의 사랑 아가페만이 인간을 구출할 수 있다.
아가페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힘을 부정한다. 이 대가 없는 사랑에 대해 인간은 그저 그것을 타자 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바오로가 보기에 이웃 사랑의 가능성은 오로지 신의 대가 없는 사랑에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의 아가페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모방할 필요가 있다. 바오로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인데 이는 신의 사랑이 대가 없이 넘칠 정도로 인간들에게 부어졌기 때문이다. 신을 모방하면서 타자를 사랑하게 되는 타자에 대한 시선이 자기에 대한 시선과 중첩된다. 따라서 타자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며 타자의 기쁨은 자신의 것이 된다. 바로 이러한 아가페의 구조가 그리스도교에서 사목자의 시선을 지탱했다. 유대 공동체에서 사목자의 일을 하는 것은 사제나 왕 그리고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회에서 타자의 죄는 타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을 통해서 타자를 사랑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타자의 문제는 자신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 아가페 개념은 자기 행복을 스스로의 영위 속에서 모표로 하는 고대 철학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다.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이는 “모든 고대적 가치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5. 그리스도교와 파레시아
구약 성서에서는 파레시아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반면 신약 성서에서 파레시아는 그리스적 의미에서, 특히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되게 된다. 특히 사울이 회심하여 바오로가 되었을 때 로마 시민권의 힘으로 황제에게 직접 소를 제기하면서 파레시아를 행사한다. 이는 그리스의 고전적인 파레시아와 완전히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처음에 파레시아는 두려움 없이 자기 신념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사실 자체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파레시아는 죽음을 부르는 것이 되기도 했다. 한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이 정치적 의미에서의 파레시아는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필론의 양심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필론에게 양심이란 무엇보다도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감찰관이다. 이 감찰관은 ‘신의 로고스’로 주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감찰관 덕분에 인간은 회개하고 자신이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을 통해서 인간은 개인으로서 마음에 말을 걸어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필론은 인간을 바른 행동으로 인도하는 것은 이성에 의한 판단이 아닌 신의 재판관 앞에서 켕기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보았다. 신의 재판관인 양심에 기초하여 회개할 수 있게 되고 삶의 방식은 전환 즉 메타노니아의 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신에 대해서 “전혀 거짓이 없는 양심의 진지함”의 상태를 필론은 파레시아라고 불렀다. 이처럼 필론에게서는 파레시아와 깨끗한 마음이 연결될 수 있었고 자신의 의식에서 켕기는 것이 없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의식할 때 신의 종은 신을 향해 머리를 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파레시아의 조건이기도 하다.
바오로가 보기에 인간의 양심에는 기묘한 역설이 있었다. 꾸짖고 또 스스로에게 악을 느끼게 하는 것이 양심의 책무인데 한편으로는 올바른 양심이 제 약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악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또는 율법) 때문에 필요한 것이 예수이다. 예수는 자신의 피를 바침으로써 사람들의 양심을 ‘죽음의 업’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하느님께 나아가므로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하게 될 수 있게 되므로 신도는 예수 아래서 신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때 파레시아와 관련맺게 될 것이다.
요한서의 저자는 파레시아 개념을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모색한다. 죄를 고백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증표이다. 아가페도 마찬가지의 구조를 갖고 있다. 타자가 타자이기 때문에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을 위해 타자를 사랑한다는 굴절된 구조 말이다. 이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확신(파레시아)’를 가질 수 있다. 요한은 죄를 고백해서 깨끗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확신(파레시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필론이 말한 양심의 깨끗한 상태를 지시한다. 이 파레시아는 두 가지 행위를 통해서 확보된다.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1)하고 크게 말함(2)으로써 깨끗한 마음이 된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신 앞에서의 자유를 보여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신 앞에서 자기 유죄 선언을 경유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발견한 파레시아는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신 앞에서 자신을 직면하여 마음의 깨끗함을 향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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