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p13 : 자기에게 함몰된다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듣고 바로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법을 잊는다는 것이다.

모든 말은 응답을 기대하며 응답하기에 말이 된다. 고통을 겪으며 자기에게 함몰된 이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응답으로서의 말이다. 응답을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지만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을 겪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딜레마다. 그래서 그 말이 파국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내뱉게 된다. “넌 내 고통을 모른다.”

 

p18 : 고통을 겪는 이는 대체로 바깥은 붕괴하고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그에게 곁이 존재한다면, 그 곁은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증하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p59 :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존재하는 것이 허락된 것은 신이나 사물이다. 인간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홀로라는 단수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무엇과 함께 그 사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이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성격인 복수성이라고 말했다.

 

p67 : 방언과 주문은 일종의 텅 빈 기표역할을 한다. 말을 하는 것이긴 하되 그 말에 특정한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주문과 방언으로만 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그 말을 알아듣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신이요, 두 번째는 그 주문과 방언을 공유하는 공동체. 그래서 방언은 여전히 말일 수 있다. 새벽기도회에, 신흥종교 집단의 집회에 넘쳐나는 말, 그 말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아니라 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가장 말다운 말이다. 어린아이의 옹알거림이 말은 아니지만 너무나 명확한 말인 것처럼 말이다.

 

p96 : 주문은 작게 보면 고통을 경감하고 공동체를 만드는 언어였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을 세계에서 고립시켰다. 그들에게 주문은 바로 그 세계를 변혁하는 언어였지만 말이다. 이 주문에는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p97 :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다시 거주할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는 다 다르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고 동시에 주변과 공감하고 더구나 실존적 측면을 응시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는 없다. 다른 말로 한다면 세계와 주변-곁과 내면을 동시에 구축할 수 있는 그런 단 하나의 마법의 단어는 없다. 그런 단어는 사실상 주문이다.

 

p100 : 고통에 직면하여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파괴되는 집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지을 수 없는 공동의 집은 세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사회적 차원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들과 짓는 집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안에서 자기 자신과 거하는 내면이라는 집이다. 고통의 끔찍함은 이 모든 거주지를 파괴하고 사람을 존재로부터 추방해버린다는 것이다.

 

p103 :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역사적, 우주적 차원의 고난으로 매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동료 집단, 혹은 내가 단속사회이후 이라고 부르는 집이다.

 

p106 : 고통의 특징이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07) 재희 어머니의 경우 상대방에게 듣기만 하고 응답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면, 태석의 경우는 반대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응답하게 되었다. 후자의 경우, 다른 이들의 고통이 가진 개별성은 가치 없는 것이 되며 사회적인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증(108)거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렇게 되자 태석의 곁 역시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 말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말을 꺼리고 나누지 않는 세계가 되었다.

 

p114 :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우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

 

p118 : 주문이 주문으로만 머물면 말이 생기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방편으로서의 주문은 다르다. 그것은 다르게 대처할 수 있게 되거나 힘을 길러질 때까지 상황을 잘 견디고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유용한 약이 된다. 그래서 방편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방편으로서의 주문은 상황이 바뀌거나 힘이 길러지면 스스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사라진다.

반대로 주문이 된 방편은 강을 건너고도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게 한다.

 

p120 :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말은 바깥을 잊고 자기에게만 코를 들이박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집중한 게 아니라 자기에게 함몰된 상태다. 그런 상태로는 바깥을 인식할 수 없고 자기 자신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p125 : 외로움이 세계를 파괴하(126)고 사람을 고립시켰지만, 바로 그 외로움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외로움은 통하게 된다. 지금 몸부림치는 다른 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이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게 된다. 주문이 가로막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넘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응답을 요청하기에 응답 가능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응답을 요청한다는 것은 응답하려는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통으로 파괴된 세계가 재건되는 시작점이다. 세계는 이처럼 어떻게 해서든 말을 통해서만 재건될 수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