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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심리학의 탐구3 자기와 자기실현 / 이부영 / 19.07.04/ 화니짱

자기와 자기실현-이부영(19.07.0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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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 자기실현은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다. 바로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한결같이 성인 군자나 초인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삶을 가능한 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다. (32) 분석심리학에서 콤플렉스란 정신의 자연스러운 구성요소들인데 자아는 그 많은 콤플렉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자아 콤플렉스는 마치 자석과 같은 큰 매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내용을 우리가 모르는 어둠의 세계에서 끌어당긴다. 그것은 또한 밖에서 오는 여러 인상들을 끌어당긴다.

 

p34 :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자아의식을 탄생시킨 모체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프로이트의 관점과 다른 점이다. 프로이트는 최초에 자아의식이 있었다. 이로부터 억압에 의해 무의식이 생겨났다는 관점을 견지하였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의식의 부수물과 같은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관점은 어떻게 자아가 위험한 무의식의 충동을 승화시키는가를 강조하는 데 비해 융은 어떻게 자아가 무의식의 창조성을 받아들이느냐에 집중한다. ‘자기자기실현의 관념은 무의식에 창조적 기능이 있다는 견지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학설이다.

 

p39 : 자아의식이 대상과의 원초적 동일시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한다. 융은 그것이 사춘기가 지난 다음에야 가능하고 그때까지 자아의식은 고도의 충동과 환경조건 사이의 노리개와도 같다고 보았다. 심지어 소아기에서 사춘기까지는 자체적인 정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였다. 여섯 살에 학교에 가는 아이는 어떤 의미에서든 아직 부모의 산물이라고 그는 잘라 말한다. (...) 문제아를 개성적이며 자기 고유의지를 갖춘 아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으나 그것은 착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경우에는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심리적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아이에게 고유한 존재의 표현이라기보다 부모의 해로운 영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융은 부모의 콤플렉스가 아이에게 주는 전염력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거듭 강조했다. 또한 아이의 개인의식이 부모와의 원시적 동일성에서 해방될 때 이 해방의 투쟁에서 학교교육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p40 : 의식성을 갖춘 자아의식이야말로 성숙한 자아이다. 의식성이란 자신이 미처 몰랐던 것을 집중적으로 통찰하고 깨닫는 자세, 다른 말로 깨어 있음을 말한다. (...) 그러나 항상 깨어있음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무의식성의 편안함 속에 잠들기를 좋아한다.

 

p44 : 페르조나는 (...) 한 집단에서 통용되는 화폐나 지폐에 비유된다. 이것들은 다른 집단에 가면 통용되지 못하므로 그 곳에서는 거기서 쓰는 지폐나 화폐로 바꾸어야 한다.

 

p47 : 청소년기에는 자아와 무의식간의 단절, 즉 심혼과의 관계상실이라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페르조나는 형성되어야 한다.

 

p51 : 청소년기는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지는 시기이다. 친구 사이에도 싫고 좋음이 뚜렷하며 모든 것은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자아의식이 밝고 긍정적인 이상상만을 치열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 사이의 긴장과 분리가 생기는 것이다.

 

p60 : 자기는 얼핏보기에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극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대극의 존재와 대극의 갈등을 삶 본연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대극을 철저하게 체험해나감으로써 정신의 전체성, 즉 자기에 도달한다. 그 결과는 대극 간의 적당한 타협이거나 하나가 다른 것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대극을 뛰어넘는 하나의 경지, 융이 초월적 기능이라고 부른 것에 의한 새로운 의식성의 탄생이다.

 

p91 : 그리스도나 불성이 자기의 상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곧잘 그리스도와 붓다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이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전범인 한, 그리스도 모방이나 붓다 모방만으로는 결코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집단이 만들었고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 즉 페르조나와 동일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모방은 그 사람 자신인 자기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실현해야 할 것은 집단규범으로서의 그리스도나 붓다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개성적인 길을 걸어간 그리스도와 붓다의 그 정신과 용기.

 

p92 : 개인지상주의는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과 다른 것이다. 진정한 개성은 전체정신을 포괄는 것, 즉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그 사람 그 자체인 것이다.

 

p101 : 젊은 신경증환자가 삶을 두려워하듯, 늙은이는 죽음을 회피한다. 한때 청년들에게 정상적인 목표였던 것이 노인에게는 신경증적인 지장이 된다.

그러므로 환자의 연령은 나이가 가장 중요한 적응증인 듯 보인다.

 

p104 : 버림받음 때문에 겪는 고통은 지금까지 자기를 지탱해온 사회적 관계, 사회의 기대와지지, 사회적 입권, 명예, 칭호의 박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페르조나의 상실과 관계된다.

버림받음의 고통과 방황은 원시사회의 성인의례의 3단계, 즉 고통, 죽음, 재생 가운데 첫 번째 단계이다.

 

p107 : 페르소나는 그 사람의 전인격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남들이 만들어준 것, ‘남에게 보이는 나일 뿐이다.

 

p106 : 고통이 자기실현의 기회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을 실제로 좋은 기회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버림받음과 상실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자기실현의 일차적 과제는 한편으로는 바로 자기와 페르소나를 분리하여 구별하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밖의 대상으로 투사된 자기의 무의식의 내용들을 인식하여 자기의 분신들을 자신에게도 돌려오는 작업이다.

 

p108 : 석가모니는 왕국의 왕자, 남편과 아들의 역할을 ㄹ버리고 더 큰 자기 안의 대인을 만나러 수행의 길을 떠났다.

 

p111 : 페르조나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무턱대고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요할 때 써도 좋은 감투와 같은 것이다. 담나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의식할 필요가 있다. (112) 버리는 것은 페르소나에 대한 집착이지 페르조나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수동적 버림을 능동적 버림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p114 : 뇌나 신경계 신체기관에 이상이 없고 심리적,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될 경우, 이것을 과거에는 정신병과 구분짓기 위해서 신경증(노이로제)이라 불렀다.

요즘은 신경증이라는 말도 별로 쓰지 않고 불안장애, 우울장애, 강박장애, 전환장애 등으로 부른다.

융의 신경증 가설의 핵심은 자기로부터의 소외이며 그로 인한 인격의 해리이다. 자아가 전체정신인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 관계를 상실했을 때 신경증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소외는 왜 새기는가? 한마디로 자아를 집단정신의 한 측면인 페르조나와 지나치게 동일시한 때문이다.

외부세계에 대한 적응에만 치우치고 내면세계, 즉 무의식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무의식은 항상 전체가 되고자 하는 자율적 조정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을 자극한다. 이것을 무의식의 보상기능이라고 하는데 의식이 이것을 외면하면 보상기능이 과도하게 나타나 의식의 흐름을 여러 형태로 방해하게 된다. 신경증적 장애의 증상은 이렇게 인격이 해리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경계신호와도 같다.

 

p145 : 아니무스에 사로잡힌다 함은 자기의 판단이 무의식의 부정적 의견으로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것을 그 여성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p29 : 자기실현은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다. 바로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한결같이 성인 군자나 초인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삶을 가능한 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다. (32) 분석심리학에서 콤플렉스란 정신의 자연스러운 구성요소들인데 자아는 그 많은 콤플렉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자아 콤플렉스는 마치 자석과 같은 큰 매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내용을 우리가 모르는 어둠의 세계에서 끌어당긴다. 그것은 또한 밖에서 오는 여러 인상들을 끌어당긴다.

 

p34 :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자아의식을 탄생시킨 모체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프로이트의 관점과 다른 점이다. 프로이트는 최초에 자아의식이 있었다. 이로부터 억압에 의해 무의식이 생겨났다는 관점을 견지하였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의식의 부수물과 같은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관점은 어떻게 자아가 위험한 무의식의 충동을 승화시키는가를 강조하는 데 비해 융은 어떻게 자아가 무의식의 창조성을 받아들이느냐에 집중한다. ‘자기자기실현의 관념은 무의식에 창조적 기능이 있다는 견지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학설이다.

 

p39 : 자아의식이 대상과의 원초적 동일시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한다. 융은 그것이 사춘기가 지난 다음에야 가능하고 그때까지 자아의식은 고도의 충동과 환경조건 사이의 노리개와도 같다고 보았다. 심지어 소아기에서 사춘기까지는 자체적인 정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였다. 여섯 살에 학교에 가는 아이는 어떤 의미에서든 아직 부모의 산물이라고 그는 잘라 말한다. (...) 문제아를 개성적이며 자기 고유의지를 갖춘 아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으나 그것은 착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경우에는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심리적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아이에게 고유한 존재의 표현이라기보다 부모의 해로운 영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융은 부모의 콤플렉스가 아이에게 주는 전염력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거듭 강조했다. 또한 아이의 개인의식이 부모와의 원시적 동일성에서 해방될 때 이 해방의 투쟁에서 학교교육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p40 : 의식성을 갖춘 자아의식이야말로 성숙한 자아이다. 의식성이란 자신이 미처 몰랐던 것을 집중적으로 통찰하고 깨닫는 자세, 다른 말로 깨어 있음을 말한다. (...) 그러나 항상 깨어있음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무의식성의 편안함 속에 잠들기를 좋아한다.

 

p44 : 페르조나는 (...) 한 집단에서 통용되는 화폐나 지폐에 비유된다. 이것들은 다른 집단에 가면 통용되지 못하므로 그 곳에서는 거기서 쓰는 지폐나 화폐로 바꾸어야 한다.

 

p47 : 청소년기에는 자아와 무의식간의 단절, 즉 심혼과의 관계상실이라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페르조나는 형성되어야 한다.

 

p51 : 청소년기는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지는 시기이다. 친구 사이에도 싫고 좋음이 뚜렷하며 모든 것은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자아의식이 밝고 긍정적인 이상상만을 치열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 사이의 긴장과 분리가 생기는 것이다.

 

p60 : 자기는 얼핏보기에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극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대극의 존재와 대극의 갈등을 삶 본연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대극을 철저하게 체험해나감으로써 정신의 전체성, 즉 자기에 도달한다. 그 결과는 대극 간의 적당한 타협이거나 하나가 다른 것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대극을 뛰어넘는 하나의 경지, 융이 초월적 기능이라고 부른 것에 의한 새로운 의식성의 탄생이다.

 

p91 : 그리스도나 불성이 자기의 상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곧잘 그리스도와 붓다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이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전범인 한, 그리스도 모방이나 붓다 모방만으로는 결코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집단이 만들었고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 즉 페르조나와 동일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모방은 그 사람 자신인 자기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실현해야 할 것은 집단규범으로서의 그리스도나 붓다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개성적인 길을 걸어간 그리스도와 붓다의 그 정신과 용기.

 

p92 : 개인지상주의는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과 다른 것이다. 진정한 개성은 전체정신을 포괄는 것, 즉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그 사람 그 자체인 것이다.

 

p101 : 젊은 신경증환자가 삶을 두려워하듯, 늙은이는 죽음을 회피한다. 한때 청년들에게 정상적인 목표였던 것이 노인에게는 신경증적인 지장이 된다.

그러므로 환자의 연령은 나이가 가장 중요한 적응증인 듯 보인다.

 

p104 : 버림받음 때문에 겪는 고통은 지금까지 자기를 지탱해온 사회적 관계, 사회의 기대와지지, 사회적 입권, 명예, 칭호의 박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페르조나의 상실과 관계된다.

버림받음의 고통과 방황은 원시사회의 성인의례의 3단계, 즉 고통, 죽음, 재생 가운데 첫 번째 단계이다.

 

p107 : 페르소나는 그 사람의 전인격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남들이 만들어준 것, ‘남에게 보이는 나일 뿐이다.

 

p106 : 고통이 자기실현의 기회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을 실제로 좋은 기회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버림받음과 상실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자기실현의 일차적 과제는 한편으로는 바로 자기와 페르소나를 분리하여 구별하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밖의 대상으로 투사된 자기의 무의식의 내용들을 인식하여 자기의 분신들을 자신에게도 돌려오는 작업이다.

 

p108 : 석가모니는 왕국의 왕자, 남편과 아들의 역할을 ㄹ버리고 더 큰 자기 안의 대인을 만나러 수행의 길을 떠났다.

 

p111 : 페르조나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무턱대고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요할 때 써도 좋은 감투와 같은 것이다. 담나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의식할 필요가 있다. (112) 버리는 것은 페르소나에 대한 집착이지 페르조나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수동적 버림을 능동적 버림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p114 : 뇌나 신경계 신체기관에 이상이 없고 심리적,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추정될 경우, 이것을 과거에는 정신병과 구분짓기 위해서 신경증(노이로제)이라 불렀다.

요즘은 신경증이라는 말도 별로 쓰지 않고 불안장애, 우울장애, 강박장애, 전환장애 등으로 부른다.

융의 신경증 가설의 핵심은 자기로부터의 소외이며 그로 인한 인격의 해리이다. 자아가 전체정신인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 관계를 상실했을 때 신경증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소외는 왜 새기는가? 한마디로 자아를 집단정신의 한 측면인 페르조나와 지나치게 동일시한 때문이다.

외부세계에 대한 적응에만 치우치고 내면세계, 즉 무의식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무의식은 항상 전체가 되고자 하는 자율적 조정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을 자극한다. 이것을 무의식의 보상기능이라고 하는데 의식이 이것을 외면하면 보상기능이 과도하게 나타나 의식의 흐름을 여러 형태로 방해하게 된다. 신경증적 장애의 증상은 이렇게 인격이 해리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경계신호와도 같다.

 

p145 : 아니무스에 사로잡힌다 함은 자기의 판단이 무의식의 부정적 의견으로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것을 그 여성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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