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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영토 인구』 8강 / 푸코 / 2015.12.30.(수) / 화니짱 발제 (난장 버전)

안전영토인구 8강 발제 15.12.30.hwp

 

8강. 1978년 3월 1일 (286쪽~)

 

지난번에 제가 사목에 관해 소묘했던 것과 관련해,

1) 첫 번째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로부터 시작해 발전하게 된 모든 것, 즉 사목적 기술과 절차가 극도로 복잡해지고, 매우 엄밀하고도 조밀하게 제도화되는 것을 봤습니다.

2) 두 번째로 아주 특수하고 개별적이면서도 중요한 방식으로 사목의 제도화를 특징지으면서 이항성, 요컨대 사목 영역 내부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대치시키는 이항대립적 구조가 형성됨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86) 이런 이항성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들여온 불만은 곧 주된 문제, 사목적 대항품행의 충돌지점 중 하나가 됐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이항성의 출현처럼 이 역시 비교적 뒤늦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장로, 주교나 감목[목자]은 결코 성사권력을 갖지 않았습니다. (287)

사목이 세속적인 통치-정치권력과 착종된다는 점에서 이미 잘알려진 사목 실천에 새로운 모델이 도입된 것입니다.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비종교적인 모델, 요컨대 사법적 모델입니다. 교회는 7-8세기부터 이미 사법권을 획득해 그 기능을 행사 중이었습니다. (288) 그러나 중요한 것은 11-12세기부터 고해의 실천이 발전하고 의무화되는 것이 목격된다는 것입니다. 연옥이 존재한다는 믿음, 즉 완화되거나 일시적인 징벌의 체계가 출현해 발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체계와 관련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사법, 결국 사목이었습니다. 그 역할이란 면죄의 체계, 다시 말해서 목자나 교회가 몇몇 조건, 본질적으로는 금전적 조건을 이용해 예정된 징벌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주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12세기부터 교회 내에 사법적 모델이 침투했는데, 그것이 반-사목 투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 틀림없는 듯합니다. (289)

 

사목에 대한 대항품행(역사의 환기) :

①수덕주의 ②공동체 ③신비주의 ④성서 ⑤종말론적 신앙

 

①수덕주의

3-4세기의 동방이나 서구 교회에서 사목은 주로 수덕의 실천에 대항해 발전했습니다. 과도한 수행, 은둔수련(이집트, 시리아)이라 불러 던 것에 맞서 발전했던 것이죠.(292) 공동생활, 즉 의무적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 수도원장과 그의 권력을 중계해주는 휘하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련의 위계가 조직됐습니다. 이처럼 위계화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에서 전원에게 똑같이 부과되는 규칙이 탄생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급자의 명령에 대해서는 결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복종의 규칙이었습니다. 즉, 수덕주의에서 무한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 혹은 권력의 조직과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바로 그 조직을 통해 제한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293) 복종에서 본질적으로 反수덕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수덕은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맞붙는 싸움이고, 거기서는 타인의 권위나 존재나 시선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수덕주의는 점차 어려움이 가장되는 단계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그 어려움의 수준은 수도자 자신의 고통입니다. 장애물과 한계를 즉각 몸소 느끼는 경험을 통해 수도자는 그 경험을 뛰어넘도록 내몰립니다.

셋째, 수덕주의는 일정한 형식의 도전입니다. (294) 혹은 다른 사람에게 도전하는 내적 도전의 형태(수도사들끼리의 극한 훈련 도전 경쟁)를 띠고 있습니다.

넷째, 수덕은 어떤 상태를 지향합니다. 어떤 평정이나 평온의 상태, 아파테이아의 상태를 말입니다. 복종의 사목적 실천에서는 원래 의미와 달라지지만 아파테이아는 근본적으로 수덕주의의 또 다른 방식입니다. 수도자에게 아파테이란 수도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신체, 자신의 고통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수도자는 고통을 더 이상 고통으로 느끼지 않는 단계로, 자신의 신체에 부과되는 모든 것이 어떤 동요-혼란-정념-강한 감각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295) 수도자는 유혹을 억눌러야 한다기보다는 끊임없이 제어해야 합니다. 수도자의 이상이란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온갖 유혹에 무심해지는 제어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수덕주의는 신체의 거부, 따라서 물질의 거부, 영지주의나 이원론의 차원 중 하나인 무우주론[물질계과 신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주장]과 관련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신체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96)

이것들은 항구적으로 복종하고 단순한 의지조차도 포기하고, 속세에서 개인의 품행을 펼치는 사목적 구조와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복종의 사목적 원칙에서는 세계에 대한 그 어떤 포기도 없습니다. (297)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지복의 상태, 최종적으로 완벽한 자기제어의 상태도 없습니다. 이와 달리 애초부터 주어진 타인의 명령에 최종적으로 복종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런 복종에는 타인이나 자기와의 경쟁은 전혀 없고, 오히려 항구적인 겸손만이 있습니다. (298) 권력구조의 측면에서 그리스도교를 특징짓는 것이 사목인 한에서,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反수덕적입니다. 오히려 수덕주의는 권력구조에 맞설 때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종교적 경험의 어떤 주제를 사용하는 일종의 전술적, 전복적 요소입니다. 수덕주의는 이기적인 자기제어로 변해버린 일종의 과격하고 뒤집힌 복종입니다. 이를테면 수덕주의에는 특유의 과도함, 외부권력에 접근하기를 거부하는 과도함이 존재합니다. 수덕주의는 개인이 자신에게 행하는 명령이나 도발의 과잉을 통해 복종을 질식시켜버립니다. 우선 법의 존중이라는 수준이 있습니다. 사목은 거기에 타인에의 복종이라는 원칙을 덧붙였습니다. 수덕주의는 이 관계를 자기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수련에 대한 도전으로 만듦으로써 사목을 다시 뒤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사목, 사목에 대한 반-품행의 제1요소는 수덕주의입니다. (299)

②공동체

사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어느 정도 수덕주의와 반대되면서도 사목권력에 불복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수덕주의는 오히려 개인화를 진행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확실히 단절됐던 몇몇 공동체는 교회 자체, 그리고 교회의 중심적 조직을 이루고 있는 로마가 새로운 바빌론이며 거짓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원칙에 근거했습니다. (299) 이처럼 공동체 형성활동이 미묘하게 중요한 교의상의 문제를 근거로 이뤄졌습니다.

첫째, 죄를 범한 상태의 목자라는 문제입니다. (300)이에 대해 후스는 “복종의 이단”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죄를 범한 상태에 있는 자, 법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은 목자, 즉 복종의 원칙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은 목자에게 복종한다면 자신도 이단이 되어버립니다. 후스가 말하는 복종의 이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둘째, 또 다른 교의적 측면은 사제의 성사권력 문제입니다. 성사를 베푸는 사제의 권력을 구성해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일까요? 사제는 세례를 통해 누군가를 공동체에 들어오게 할 수 있고 고해를 통해 하늘에게 용서받도록 하며,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301) 아동 세례에 대한 반발로 의지에 따라 행하는 세례가 발전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경향은 재세례파로 귀결됐는데 이미 발도파, 후스파에게서도 발견됐던 것입니다. 게다가 고해에 대한 불신도 있었습니다. 왜 너는 사제에게 네 비밀을 털어놓았느냐? 너는 너를 위해 네 비밀을 간직해야 하다. 고해에 대한 거부의 경향은 이런 것입니다. (302)

마지막은 성체배령입니다. 바로 여기에 신의 실제적 현전에 관한 모든 문제가 있고, 대항품행 공동체들에서 발달한 모든 실천이 존재합니다. 이 공동체들 안에서는 성체배령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공동체의 식사라는 형식을 다시 취하게 되지만, 신이 실제로 이 과정 중에 현전한다는 교의는 일반적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확실히 대항품행 공동체들은 그리스도교 사목 조직 특유의 사제-평신도라는 이항성을 없애거나 그런 경향을 띠며 발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항성을 대체한 것은 무엇일까요? 타보르파처럼 목자를 선거로 뽑거나 임시로 세우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때 임시로 선출된 목자는 책임자에게는 당사자를 다른 이들과 결정적으로 구분해주는 특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임시로 어떤 임무, 책임,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의지입니다. 또한 선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목자의 효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선출된 사람과 선출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 이항성은 일반적인 교회에서 발견되는 저 사목권력의 조직과 효능을 모두 배제하는 것입니다. (303) 이런 집단에서는 위계가 체계적으로 전복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장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명예와 평판을 가장 많이 잃은 자, 가장 타락한 자를 선택합니다. (306) 그러니 이 공동체에는 반사회적 측면, 사회적 관계와 위계의 전복이라는 측면, 카니발의 측면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성의 사목적 위계방식과 정확히 역전된 방식을 갖는 종교 단체의 구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두에 있는 자는 실제로 가장 뒤에 있는 자이고, 최후에 있는 자는 가장 선두에 있는 자일 것입니다.

③신비주의

신비주의는 그 정의상 사목권력을 벗어난 경험에 특권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사목권력은 근본적으로 진실의 체계, 진실의 가르침에서 개인의 시험으로 향하는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신비주의는 이와 전혀 다른 체계입니다.

첫째. 가시성이 전혀 다르게 작동됩니다. 영혼은 시험이나 고백의 체계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에서 영혼은 자기 자신(을 통해 신)을 봅니다. 그런고로 신비주의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시험을 피해갑니다.

둘째. 신비주의는 신이 영혼에 직접 계시하는 것이기에 가르침의 구조, 즉 진실을 아는 사람에게서 진실을 배우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진실의 전파에서도 벗어납니다. 이런 위계, 가르침에 의한 진리의 느린 순환, 이 모든 것은 신비적 경험에 의해 단절됩니다. (307)

셋째. 신비주의가 가르침이라는 지본의 원칙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진보의 원칙은 사목권력의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통상 가르침의 길은 무지에서 인식으로 나아가는 반면 신비주의의 길은 어둠/빛, 상실/재발견, 부재/ 현전 등의 끊임없이 반전하는 작용을 따릅니다. 덧붙이자면 신비주의는 불확실하고 전적으로 모호한 경험, 그런 경험의 형태에 근거합니다. 신비주의에서 무지는 일종의 앎이며, 앎은 무지의 형태를 띱니다. 사목제도에서는 목자가 개인의 영혼을 지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혼과 신의 교류는 목자에 의해 격하(혹은 통제)되고서야 가능해지는 셈입니다. 사목은 신자와 신을 이어주는 길이었죠. 신비주의에서는 당연히 교류가 직접적입니다.

④성서

사목권력의 체제에서 목자 자신의 현전, 가르침, 개입에 비해 성서의 현저니 배경으로 밀려난 것은 자명합니다. 중세 내내 발전한 대항품행의 운동에서는 사목을 단절시키고 사목과 맞서는 데 사용하기 위해 텍스트, 성서로의 회귀가 이뤄집니다.(308) 왜냐하면 성서는 홀로 말하는 텍스트로서 사목의 중계는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⑤종말론적 신앙

목자의 역할을 실격시키는 또 다른 방식은 시대가 끝나고 있다, 신이 재림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신 자체가 참된 목자가 됩니다. 신 자신이 무리를 집결시키기 위해 되돌아오는 진정한 목자이니 지금 있는 목자들은 해촉될 수밖에 없죠. (309) 요아킴에게서 다소 직접적으로 파생된 유파들이 전개한 또 다른 종말론도 있습니다. 역사의 제3기가 도래했음을 단언하는 종말론입니다. 제1시대는 삼위일체의 제1위격이 예언자 아브라함으로 육화된 시대입니다. 제2시대는 제2위격이 육화된 시대입니다. 제1위격은 목자를 보냈지만, 제2위격은 자신을 육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입니다. 요아킴은 세계사의 제3시대가 도래할 텐데 그때 성령이 현세로 내려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육화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퍼집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결론: 일반적인 권력행사 방식의 분석에서 사목권력 개념을 참조하는 것이 목표로 하는 바

요컨대 실제 사목조직에서의 그리스도교는 수덕의 종교, 공동체의 종교, 신비주의의 종교, 성서의 종교, 종말론의 종교가 아닙니다. 앞선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첫 번째 이유가 이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310) 대체로 대항품행의 핵심요소였던 이런 주제들은 그리스도교에 완전히 외재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주제들은 이런저런 방향으로 끊임없이 다시 취해진 경계적 요소였죠. 예를 들어 신비주의, 종말론, 공동체 추구 같은 요소는 교호 자체에 의해서 부단히 다시 취해집니다. 온갖 대항품행 운동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던 교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 요소들을 다시 취해 순화시키려고 애썼죠. 이런 대항품행을 일정한 방식으로 재이식하려고 했던 개신교 교회가 (반종교 개혁을 통해 자신의 체계에 대항품행을 재도입해 재사용하려고 했던) 가톨릭 교회와 대대적으로 분리-분열되기 전까지 말입니다. 따라서 투쟁은 절대적 외부성의 형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반-사목 투쟁에 적합한 전술적 요소를 끊임없이 사용하는 형태로 일어납니다.

세 번째 이유로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제가 사목권력의 관점을 채택한 것은 16세기부터 발전한 통치성의 후경과 원경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는 점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권력의 관점이란 서로에게 외적인 요소들 사이의 어떤 인식가능한 관계를 포착하는 방법론입니다.(311) 사목-사목권력-사목구조가 서로 외적인 상이한 요소들, 즉 한편으로는 경제적 위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주제인 이 요소들의 연결점이자 양자의 교환장치라고 보지 않는다면, 이데올로기라는 낡은 개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집단, 계급 등의 갈망이 종교적 신앙 같은 것 속에서 표현되고 반영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목권력의 관점과 같은 권력구조 전체의 분석이라는 관점을 채택하면 반영이나 전사의 형태가 아니라, 전략이나 전술의 형태로 사태를 다시 포착하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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