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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없는 수단 1부2장(20.5.17 바다사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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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2020.5.17. 바다사자

 

2. 인권을 넘어서

1

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쇠퇴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난민은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이다(25).

 난민이라는 이 둘도 없는 형상에서 우리의 정치철학을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26).

 

2

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많은 유럽 국가들이 자국 시민의 귀화국적박탈과 국적박탈을 허용하는 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27). 이런 법들(그리고 그 결과 생겨나게 된 대량의 무국적자)은 근대 국민국가의 삶에서 어떤 결정적인 전환점을 표시하는 것이자, 인민과 시민이라는 소박한 관념으로부터의 결정적인 해방을 나타낸다.

 각종 국제위원회라는 조직들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충심으로 언급해도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적합하게 처리할 수도 없었음이 입증됐다. 그리하여 모든 물음이 경찰의 수중으로, 그리고 휴머니즘[인도주의]을 표방하는 단체의 수중으로 넘어갔다(28).

 

3.

 국민국가 체계에서 소위 신성하고 양도불가능한 인권은 어느 한 국가의 시민권이라는 형태를 더 이상 띠지 못하게 되자마자 모든 후견인을 상실한다(29).

 

4.

 인권은 벌거벗은 자연적 생명이 국민국가의 법적-정치적 질서에 등록됐다는 시초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국민국가란 출생이나 탄생(즉 인간의 벌거벗은 생명)을 자기 주권의 기반으로 삼는 국가를 뜻한다(30).

 권리는 인간이 즉각적으로 사라지는 시민의 전제(사실상 그 자체로는 드러나면 안 되는 전제)인 한에서만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이다(31).

 

5.

 난민이라는 주변적인 이 형상은 국가-국민-영토라는 낡은 삼위일체를 파괴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우리 정치사의 중심적 형상으로 간주될 만한 가치가 있다(32)

 

6.

 난민 개념을 인권 개념에서 과감히 해방시켜야 하며 피보호권을 난민 현상을 새겨 넣을 수 있는 개념적 범주로 더 이상 간주해서는 안 된다.

 오늘날 산업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안정적으로 거주하는 대규모의 비시민들이다. 이들은 국적을 취득할 수도, 본국으로 송환될 수도 없으며, 또한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본국의 보호를 누리고 싶어 하지 않을 때부터 이들은 마치 난민처(33)럼 ‘사실상 무국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들을 거류민이라 하는데 선진산업국의 시민들은 정치 참여의 법제화된 심급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이탈함으로써, 스스로 거류민으로, 안정적으로 거주하는 비시민으로 탈바꿈하는 분명한 경향을 보여준다(34).

7.

 유럽에서 몰살수용소가 다시 문을 열기 전에(이미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긴 하지만), 국민국가는 출생의 등록이라는 원리 자체, 그리고 이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국가-국민-영토(34)라는 삼위일체를 의문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 두 국민국가가 불확실하고 위협적인 경계선으로 분리되는 대신 두 정치공동체가 똑같은 지역에서, 일련의 상호간의 바깥영토를 통해 절합되어 상대 공동체로 서로 엑소더스하는 것도 상상해볼 수 있다. 여기는 더 이상 시민의 법/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피난처가 될 것이다. 비영토적 공간 또는 상호(35)간의 바깥 영토를 위한 공간으로 간주할 수 있다(36).

 국가들의 공간이 구멍 뚫리고 위상학적으로 변형되는 땅에서만, 그리고 시민이 스스로를 난민으로 인정할 수 있는 땅에서만, 오늘날 인류의 정치적 생존을 사유할 수 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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