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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문학, 정신분석프로이트 / 두려운 낯설음 / 201208 / 화니짱

 

두려운 낯설음 201208 화니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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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건들이 주어졌을 때 친숙한 것이 이상하게 불안감을 주고, 공포감을 주는 것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406) 엔치의 관점을 따른다면, 이상하게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무언가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방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잘 식별해 낼수록 사람들은 이상하게 불안감을 주는 사물이나 사건들에서 그런 감정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하게 불안감을 주는 것은 친숙하지 못한 것이라는 (이와 같은) 등식을 넘어서 보려고 한다. (407)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heimlich (homely)라는 작은 단어가 지니고 있는 여러 다양한 의미들 중에는 그 말의 반대어의 unheimlich (unhomely)의 의미를 지닌 것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친숙하고 편안한 것과 숨겨져 있고 은폐되어 있는 것은 대립되는 것도, 무관한 것도 아닌 것이다. (409) 영어 단어인 canny에도 이와 비슷한 다의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canny라는 단어에는 안락하고 편안한이란 뜻도 있지만 오묘한 마술의 힘을 부여받은이란 의미도 있다. (각주6)

 

2. 꿈 해석의 과정

엔치는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경우>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주는 적절한 예로 보여주고 있다. 간질발작이나 미친 사람들의 행동거지들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본다. (412) 독자를 애매모호한 상태에 방치해 둠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아니면 예를 들어 자동인형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불확실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모래 인간>에는 자동인형 올림피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눈을 빼가는 모래인간의 모티브가 이런 불안한 낯설음을 일으킨다. (414) 정신분석적 경험을 통해 우리는 눈을 상한다거나 시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어린아이들에게는 끔찍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419)

실제로 우리는 어른들이 아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경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고 하는 말(420)을 흔히 듣지 않는가? 한국의 속담으로는 <내 눈에 흙이 들어 가지 않는 한> (각주9) 꿈과 환상과 신화 등을 분석해 보면 우리는 눈을 잃어버려 장님이 될 수도 있다는 공파가, 많은 경우 거세 불안의 한 변형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된다. 오이디푸스라는 신화 속의 범죄자가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것도 거세라는 응징의 한 약화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실명 공포는 소설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모래인간은 매번 사랑의 축제에 훼방을 놓는 자처럼 소설에 등장한다. 모래인간은 불행한 대학생과 그의 약혼녀 사이를 갈라놓고 또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그녀의 오빠와 사이도 갈라놓는다. 소설의 이러한 특징들은 모래 인간을, 거세를 집행하는 자인 아버지의 위치에 놓게 되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421)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와 코펠리우스는 양가 감정에 의해 상반된 두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는 아버지의 이마고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한 사람은 장님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위협하고 있고, <좋은> 아버지인 다른 사람은 아이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용서를 구한다. 완벽하게 억압되어 있던 나쁜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은 콤플렉스의 다른 한 부분인 좋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형상화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죽음은 나쁜 아버지인 코펠리우스가 맡게 된다. 이 두 부성적 존재들은 주인공의 이후의 삶에서 각각 스팔란차니 교수와 안경상인인 코폴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교수는 이미 그 직책상 아버지의 한 모습이었고, 코폴라는 변호사 코펠리우스와 동일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공동 작업을 통해 네 명의 인물들이 부성적 이마고의 분열된 각 부분을 나타내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자동인형은 나타니엘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 대해서 취하고 있었던 여성적 태도를 의인화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스팔란차니 교수와 코폴라)들은 사실 원래 나타니엘이 갖고 있었던 두 아버지의 변형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안경 상인이 나타니엘의 눈을 파내서 올림피아에게 넣어 주려고한다는 스팔란차니의 말은 나타니엘과 올림피아를 동일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달리 이해해 볼 길이 없다. 올림피아는 말하자면 콤플렉스의 한쪽 부분인 셈인데, 다른 한쪽 부분은 나타니엘이라는 인물로 소설 속에 나타나 자신의 반쪽을 만나러 온 것이다. 나타니엘이 올림피아에게 정신 차릴 수 없이 매혹당하는 강박 관념적인 사랑에서 이 콤플렉스가 그에게 미치는 지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랑을 우리는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인데 이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현실에서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낯선 이방인이 되고 만다.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아버지에게 매인 한 청년은 여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이 정확한 심리의 메커니즘은 환자들에 대한 수많은 분석을 통해 입증된 것이기도 하다. (각주10)

 

호프만의 다른 소설인 <악마가 권하는 약들>에서 문제가 되는 모티프는 분신의 모티프인데, 이 모티프는 그 모든 발전 단계와 특성들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유사한 외관으로 인해 동일인으로 취급당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또 이 분신 관계는 한 인물의 정신적 움직임이 다른 인물에게로 즉각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통해 강조되어서 한 인물은 다른 인물의 지식과 감정과 모든 경험들에 관여하게 된다. 요컨대 자아의 분할, 구분, 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마침내 소설은 얼굴, 성격, 운명, 범죄에서 이름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되고 있고 동일한 인물이 지속적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424) 이 구절은 니체의 언급(<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부분(똑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을 연상하게 한다. (각주12)

분신의 모티프는 실제로 자아의 소멸에서 영속성을 보장하려는 욕망, 오토 랑크의 표현을 따르면 <죽음의 권능에 대한 강력한 부인>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불멸의> 영혼이 육체의 첫 번째 분신이라는 사실은 설득력이 있다. 죽음에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이러한 자아 분할은 생식에 관련된 상징을 다양화하거나 혹은 배가시키면서 꿈의 언어가 연출하는 장면들 속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나타낸다. 이러한 재현은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영역인 자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단계가 지나가게 되면 분신에 주어졌던 표식도 변형된다. 영원불멸의 표식이었던 것은 그래서 죽음을 예고하는 두려운 예언자가 되고 만다.

(-> SF영화 : 레플리카.)

최초의 나르시시즘이 없어졌다고 해서 분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분신의 재현은 자아가 후일 밟아 나가는 여러 단계에서 새로운 내용들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 속에서는(426)서서히 하나의 새로운 심급이 자리를 잡아 가게 되는데 이 심급은 옛날의 자아와 대립할 뿐만 아니라 자아를 관찰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 검열을 행하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심리적 움직임 속에서는 <윤리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감시 망상에 걸린 병적인 경우, 분신과 자아 사이에 생긴 균열로 인해 분신은 자아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되는데, 정신과 의사는 이 균열을 읽을 수 있다. 옛날의 자아를 마치 사물처럼 다룰 수 있는 이러한 심급이 존재한다는 것,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이 옛날의 <분신>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내용과 기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자기 비판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이미 극복된 옛 나르시시즘의 파편들에 속하는 것들 또한 <분신> 개념에 덧붙일 수 있다. (426) 또 의지 박약으로 인해 내려진 결정들을 지키지 못해서 자유의지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실행되지 못한 결정들도 분신의 몫으로 돌아간다.(427) 에베르스의 <프라하의 대학생>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약혼녀에게 결투에서 상대방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결투장을 향해 가고 있던 그는 이미 상대방을 죽인 자신의 분신을 만나게 된다. (각주15)

어떤 경우에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자아에 대한 의식이 겪게 되는 변천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단계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 세계와 타인의 관계에서 자아가 아직도 분명하게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로 퇴행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427)

다른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또한 대수롭지 않은 것이 비의도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 데자뷰)을 자아내게 되고 또 빠져나올 수 없는 숙명성을 믿게 한다는 것을 별 어려움없이 확인할 수 있다.

 

p430 : 무의식 속에서 실제로 우리는 충동에서 기인하는 <반복 강박>을 구별해 낼 수 있다. 이 강박 관념을 아마도 충동들 자체의 가장 내적인 속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일 텐데 쾌락 원칙을 넘어설 만큼 상당히 강력한 것이어서 어떤 정신적 움직임들의 경우에는 마치 악령에 사로잡힌 것 같은 양상을 띠게 한다. 이전의 모든 분석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내적인 반복 강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상하게 두려운 것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셀링은 이상하게 두려운 것이란 어둠 속에 있어야만 했으나 드러나 버린 어떤 것이라고 했다.(434)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는 논리학 교과서에서 흔히 보편적 긍정의 예로 거론되지만 그 어느 인간도 이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재 우리들이 갖고 있는 무의식 속에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435)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이 우리들 속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또 이 힘은 일정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외부로 표현될 수 있다. 이 힘은 옛날 의미를, 다시 말해 죽은 자는 산 자의 적이고 자신과 함께 새로운 삶을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산 자를 함께 끌고 갈 의도를 갖고 있다는 옛날의 의미(애니미즘, 정령사상)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436)

 

p439 : 신경증 환자들은 여자의 성기가 그들에게는 왠지 이상하게 두려운 것으로 느껴진다(450)고 조종 호소하곤 한다. 그러나 이때의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은 여자의 성기가 인간이 태어난 옛 고향home,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태초에 한번은 머물렀던 장소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생긴다. 흔히 우스개 소리로 우리는 <사랑은 향수병>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은 따라서 이 경우에도 자기 집인 것이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친근한 것이고, 친근한 것이지만 아주 오래전의 것이다. Unheimliche(두려운 낯설음)의 접두사un은 이 경우 억압의 표식일 것이다.

 

3.

p444 :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이 발생하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택해보자. 1)생각의 전능성 2) 욕망의 순간적인 실현 3) 숨어 있는 해로운 힘들 4) 죽은 자들의 돌아옴.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 방식을 <거쳐 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믿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입증될 날만을 노린 채 옛날의 것들이 그대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한 켠으로 비켜 놓았던 옛날의 믿음들이 사실로 입증되는 어떤 일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갖게 되고 다음과 같(445)은 판단들을 내리면서 이 감정을 한층 더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죽은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고 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도 사실이구나하는 생각 등. 반면에 이러한 정물사상적인 믿음이 자신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릴 모든 여지를 철저하고도 단호하게 없애 버린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p446 : 우리가 실제로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억압된>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들이 어떤 강한 인상에 의해 다시 살아나거나 혹은 <초극된> 원시적인 믿음들이 다시 새롭게 확인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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