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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강의(알튀세르) 1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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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1972225

 

마키아벨리와 자연권 철학자들의 정치적·이론적·철학적 세계는 하나의 양태 때문에, 즉 그들의 고찰 대상인 절대왕정, 절대적 정치권력의 존재 양상 때문에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p. 49).

 

마키아벨리에게 국가적 통일은 달성된 사실/기성사실이 아니라 달성해야 할 사실인 것입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존 가능성의 조건을 사고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 근본적 시작을 사고해야 한다는 전적으로 유례없고 근본적인 그 과업을 감내해야 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1) 달성해야 할 사실과 2) 시작이 이를테면 음악적인 의미에서 연주될 수 있는 것은 그들 사이의 연접 속에서라고 말입니다. 두 표현은 하나의 무성 철학, 즉 철학적 형식으로는 끝내 표현되지 못한 어떤 철학의 악보 같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집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거행된 적이 없는 철학적 시작의 악보입니다. 그런 만큼 마키아벨리가 철학 전체, 고전적인 철학에 이질적인 것으로 남게 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p. 50-51).

 

자연권 철학의 상황은 아직 철학이 아닌 이 마키아벨리의 상황과는 명백히 아주 다릅니다. 그 이론가들의 세계에서는 절대왕정 또는 통일 국가가 달성된 사실인 것입니다. 자연권 이론가들은 달성된 사실 속에서 사고하고 달성된 사실을 사고합니다.

 

자연권 철학의 대상은 정치권력일 텐데요. 그것은 달성해야 할 과업도 아니고, 존재와 무의 우연적 관계도 아니며, 사건이나 시작도 아닌, 실존하는 것,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정치권력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연과 마주침이라는 용어로, 사건 및 도래라는 용어로 사고되지 않고, 실존과 본질이라는 용어로 사고될 것입니다. 자연권 철학은 그러한 (자연권,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본질들을 근원적 본질 곧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는 근원적 주체에 속한 자연권의 본질과 관련짓습니다(p. 52).

 

마키아벨리는 달성해야 할 사실과 시작 속에서 사고하는데, 자연권 철학은 달성된 사실 속에서, 그리고 기원 속에서 사고하고 있습니다(p. 53).

 

기원시작, 사건

기원에 대한 사고는 기원과 자연/본성을 동일시하고 권리주체에게 명증한 본성을 부여한다.

- 18세기와 19세기의 전형적인 철학적 사고 형식

- 기원이 모든 본질의 자격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철학적 형식

 

그들 모두에게 절대왕정의 문제는 그에 관한 찬반을 떠나 기원의 상태에 의거한 국가의 기원이라는 철학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p. 54).

자연상태 → 사회계약 국가의 본성

마키아벨리에서 루소로 넘어감으로써 우리는 곧 세계를 바꾼다.

 

로크, 콩디야크

 

루소

 

칸트, 헤겔

 

철학이 철학사라는 계산서에 작성하지 않은 루소의 단어들, 어쩌면, 개념들, 추론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p. 55).

 

이를 위해서 저는 2논고, 인간들 간의 불평등의 기원과 기초들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발표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루소는 여러 군데서 아주 명쾌하게 말합니다. 사회의 기초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능한 다른 길이란 없으며 우리 모두 이 길을 따라야 한다, 또한 이 기원이 인간의 본성이요, 자연 상태의 인간이다 등등.

 

루소는 모든 기원의 철학자들 중에서도, 기원 속에서 사고하는 모든 자연권 철학자들 중에서도 기원의 개념 그 자체에 대해서 사고하는 유일한 인물(p. 60).

 

루소는 그 너머로 나아가기를 결심했고, 마땅히 그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고질적인 편견들의 수준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이 뿌리란, 사실상 철학자들, 모든 철학자들이 도달할 수 없었거나 도달할 줄 몰랐던 수준 내지 종착점이며, 그래서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연 상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p. 61).

 

모든 이론가들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게 다른 조건들, 곧 자연 상태를 지나 아주 오랜 후에 시민적 상태에서나 생겨날 수 있는 속성, 의미, 의미 작용 등을 가정했던 것, 다시 말해 전제했던 것입니다(p. 63).

 

자연상태의 인간

사회계약

원환(p. 65)

시민 사회 속 인간이 갖는 규정, 정념, 속성, 능력

시민사회 형성

 

이러한 위치 전환이 갖는 목표·기능·효과는 아주 단순하게도 사회 상태에서 실재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p. 65).

 

루소는 달성된 사실, 곧 지배 질서의 정당화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그것이 염원하고 있는 미래 사회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유토피아 주의에 대한 비판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p. 66).

 

루소의 테제들은 계몽주의 철학에 담긴 관념론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공공연하게 기원 속에서 사고하는 철학자는 기원을 그 개념 속에서 사고하는 과업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는 그 기원을 우리가 이제부터 가짜 기원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드러내는 셈입니다(p. 67).

 

가짜 기원의 현실성은 바로 그것의 기능, 곧 현재 군림하고 있는 질서의 정당화, 또는 앞으로 군림하기를 갈망한다는 질서의 정당화, 다시 말해 왕의 정당화인 것입니다(p. 68).

 

이론가들은 현재에 달라붙어 있는, 따라서 역사를 그저 관통해 버린다는 의미에서 비역사적인 하나의 기원을 연출하는 셈입니다.

 

이론가들은 다른 또 하나의 원환, 이론적이지 않고 실제적인 하나의 보편적인 원환에 종속돼 있다.” 그 원환은 바로 현재 사회이자 탈자연화된 사회, 곧 소외된 사회라는 원환입니다(p. 69).

 

왜 이론가들은 자연 상태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을까요?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p. 70).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이 겪은 모든 변양들의 역사를 통해서, 그 역사의 모든 효과들을 통해서 은폐되는 것입니다. 자연은 그 자신의 본성 상실의 전 역사를 통해 “탈자연화 되는” 것입니다(p. 72).

 

자연은 소외/외화 된다.’, ‘자연/본성은 자기와 다른 것으로만, 즉 자신의 대립물인 사회적 정념들 및 그러한 사회적 정념들에 종속되는 이성 자체로만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적 소외의 원환에 이어 나오는 세 번째 지점은 인간 과학의 원환입니다(p. 72-73).

 

인간 종의 모든 진보가 인간을 끊임없이 그 시초 상태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 수 록 그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식을 획득하는 수단을 스스로에게서 앗아 가는 골이 된다는 점이다.”

 

루소는 자연적 개인에게서 이성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인간 이성의 성숙은 인간의 탈자연화와 동시대적입니다. 따라서 이제 인간에 대한 과학은 은폐 속에, 망각 속에, 탈자연화 속에 갇힌 것이 되고, 탈자연화의 발생에 귀속됩니다. 인간에 대한 과학 일체는 정의상 기원을 망각합니다(p. 74).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론가들의 논증, 근거, 개념들이 기원에 결과를 투사하는 철학적 원환 속에서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는 것입니다(p. 75).

두 가지 해석

칸트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첫 번째 해석에서는 두 가지 항에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기원에의 호소의 원환이고, 둘째는 이성의 원환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소외의 원환은 무시하는 셈인데요. 기원의 원환에서 표면화되는 것은 바로 이성의 원환이며, 따라서 루소에게는 초월론적 오류론의 선취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성의 오류가 필연적 오류이기 때문에, 즉 자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바라는 이성의 필연적 오류이기 때문입니다(p. 76).

 

우리가 이제 그 세 번째 항(역사적 소외)을 재도입하게 된다면 우리는 세 가지 항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또 다른 해석을 옹호할 수 있게 됩니다. 루소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해석인데요. 그 두 가지 중 첫째는 바로 인간적·정치적 세계에 대한 인간 과학의 정치적 규정성 또는 인간 과학의 정치적 의존성 에 관한 일반 이론입니다(p. 77).

 

인간 과학이 탈자연화 및 소외라는 그러한 인간 세계를 통해서 규정됨으로써, 인간 과학은 그 자체로 대상이라는 형식으로 반영된 그 인간 세계의 목표만을 대상으로 갖는다는 것입니다.

 

루소가 우리에게 제공한 이론이 또 있는데요, 루소가 또한 철학적 기만의 일반 이론이라는 것을 동시에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기원을 통한 사고, 기원에서 기능하는 사고에 대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기만으로 개입하면서 기성 질서나 사회 개혁의 시도에 대해 미망 속에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타당성의 자격들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p. 77-78).

 

어떻게 루소는 원환들곧 첫째로는 사회 및 사회에 의한 과학 일체의 규정의 원환, 둘째로는 기원에의 호소, 즉 철학적 이성의 원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사실상 루소가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은 그가 그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루소가 거기서 빠져나왔다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어떻게 내놓을 수가 있는 걸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제 네 번째 지점, 곧 루소의 원한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주한 것입니다.

 

기원을 통한 사고에 대해 그렇게 근본적인 고발을 한 이후에 루소의 입장은 무엇일 수 있는가(p. 79).

 

첫째로, 이론가들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둘째로, 가짜 기원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셋째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 가짜 기원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면, 진짜라고 할 만한 전혀 다른 기원을 사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전혀 다른 기원을 사고하고 전혀 다른 수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단연 이러한 시도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루소에게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론가들이 가진 기원의 원환과 이성 및 인간 사회의 소외를 결부시키는 담론을 펼치기 위해서는,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탈자연화라는 그 간단한 말을 적고 발음하고 진술하기 위해서는, 탈자연화에 의존해서 잘못된 기원 이론에 대한 비판을 지휘하는 모든 일반 이론을 쌓아올리기 위해서는 루소 스스로가 이미 자연 및 올바른 기원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p. 80).

 

그러나 우리로서는 루소가 어떻게 거기에 있을 수 있고, 어떤 경로를 거쳤기에 거기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탈자연화라는 단어만이 루소의 독자적인 표현입니다. 이 탈자연화 이론은 완전하게 꼴을 갖춘 이론은 아닙니다. 아주 가느다란 탈출구만이 있을 뿐인데요. 인간의 영혼을 말하자면 거의 오인 가능할 정도로 그 외양을 바꾸었다.” 완전히 오인 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거의 오인 가능하다는 말이니까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몇몇 조건들하에서만, 특히 가짜 기원의 비판이라는 기본적인 선결 조건하에서만 진정 기원 및 자연인에 대한 인식에 가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p. 81).

 

순수 자연상태

 

루소가 도달했던 곳이 거기까지입니다. 다른 이들은 도달할 수 없었던 곳이 또 거기까지인 것이죠(p. 82).

 

주체로서 루소는 사회적 탈자연화 및 이론적 소외에 빠져있음에도 그 순수 자연 개념에 접근하는 상태에 있어야 하는데요.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개념은 주체에 의해 포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체 속에서 그 새로운 대상의 포착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수단을 밝히 드러내야 합니다.그러한 발견에 걸맞은 능력, 곧 이성이 아닌 마음입니다.

 

사회 상태는 우리가 가진 자연적 성향들을 억제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무효화할 수는 없는데, 그러한 성향들은 우리의 편견들을 무릅쓰고, 또 우리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여전히 말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p. 83).

 

저는 이성을 제쳐두고 본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즉 본성/자연이란 제가 가진 이성과 별개로 제 믿음을 지도하는 내면의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마음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지만 완전하게 사고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루소의 마음이 지닌 고유성은 바로 사고하는 마음이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을 이끌고, 이성을 인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p. 83-84).

 

루소에게서 이 마음의 개입과 함께 변하는 것은 그러한 주체성의 이름입니다. 17세기와 18세기 초의 경우처럼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마음인 것입니다. 이제 빛이 아니라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에서 마음으로, 빛에서 소리로의 그 자리 이동은 규정된 자리 이동입니다. 루소의 선택에 따라 규정된 것이 아닌, 개념들에 따라 규정된 자리 이동입니다(p. 85).

 

그것들은 지시체를 갖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외부 실재들에 대응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갖는 모든 의미는 철학 세계에 내재해 있습니다. 그것들이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철학적 대상들로부터가 아니라, 그것들의 철학적 개입으로부터 인 것입니다(p. 86).

 

마음과 소리는 하나의 철학적 경계에 대한 철학적 표시, 즉 이성과 빛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의 철학적 표시일 뿐입니다. 18세기 한복판에 있는 루소에게서 이 현존하는 모든 이성의 구축물에 대한, 이성의 관념론에 대한, 교정자 이성에 대한, 빛의 철학, 계몽주의 철학에 대한 경계 획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의 호소, 즉 마음과 소리의 그러한 이행·경계 획정·개입이 그 굳게 닫힌 탈자연화의 원환에서 빠져나오기라는 불가능한 위업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아직도 말을 걸고 있는 원환 밖 자연을 마음속에서 재발견하는 것입니다.내면을 통해 원환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제 원환에서 빠져나와 탈자연화의 전 역사 너머에, 즉 그 최초의 상태에 있는 자연인 순수 자연 상태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탈출을 통해서 기원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대상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명증함이 가진 통일 성하에서 마음과 소리로 이성과 빛을 대신하는 철학적 대체 현상이 일어남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계기들에 맞닥뜨리게 됩니다(p. 88).

첫째, 이성과 빛의 쌍으로부터 마음과 소리의 쌍으로 옮겨 가게 하는 자리 이동을 자연의 명증함 속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자리 이동은 사실상 예전의 철학적 사고 형식과 거리를 두면서 새로운 형식을 부과하는 일정한 경계 획정인 것입니다.

셋째, 형식들 간의 이러한 경계한쪽에는 이성과 빛을, 다른 한쪽에는 마음과 소리가 있는 그러한 경계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단지 형식들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철학적 대상인 것입니다(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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