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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삼교정립

 

위촉오 시대부터 400년가량(3~6세기) 다국화 시대 전개

서진왕조 몰락-남북조 시대((유목민):516/(중원의 문사. 귀족):동진----)

동북아세계는 서북방, 남방, 동방이라는 세 권역의 다양한 국가들의 역사, 그리고 보편화되는 중원문화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 시대에 이루어진 사상사적 흐름은 유(). (). () 삼교의 정립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이끌고 간 핵심적인 사상적 일반 문법은 도가사상이었고, 유교, 도교, 불교는 이 도가사상이라는 일반 문법의 관점을 통해서 이해되었다.

 

. 유교와 도교

유가철학은 한 제국에 이르러, 한 제국을 떠받치는 국가종교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종교라기보다는 사회의 통치를 위한 핵심적인 정치적/문화적 장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유교가 존속하는 결정적 힘이었다. 유교는 위촉오 시대 같은 해체적 시대에 경학에서 제자학으로 이행했다. 청류정신, 현학, 죽림칠현 등으로 도가와 착종되며 유가사상의 어떤 측면들을 보존, 형해(形骸)만 남은채로 지속되었다.

 

강북의 중국 지식인은 호족의 정치적-군사적 지배와 한 제국 이래 내려온 유교의 학문적-문화적 전통을 어떻게 조화시켜, 유교왕국을 다시 재건할 것인가에 몰두했다. 한 제국 이후 유가사상은 제국유교라 부를 수 있는 형태로 구체화되었고, 강북을 점령한 호족국가들은 군사봉건제라는 시스템 위에 서 있었기에 제국의 부활외 다른 방식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세기 혼란을 잠재우고 선비족 탁발부의 북위가 강북을 통일, 유교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북위는 서위와 동위로 나뉘게 되고, 서위가 다시 강북을 통일하는데, 중원의 강북은 북방에서 내려온 호족 군인들과 기존 한족 귀족-문사들의 관계에 의해 향방이 결정되었다.

 

강북이 혼란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밀려들었다. 강북의 선진문화는 강남의 지방문화를 압도했고, 상층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강남의 정치는 강북인과 강남인의 조화를 화두로 했다. 유교지식인은 예전보다 퇴락된 형태이긴 했지만 6조 내내 강남의 귀족제 사회를 형성했다.

 

흔히 다국화 시대의 유교를 쇠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지만, ‘실천의 측면은 그렇지 않다. 즉 이 시대는 유교가 무엇이며 어떤 잠재력과 한계를 갖는지를 역사적으로 실증해주는 시대였다. 또한 동북아세계 사유의 일반 문법으로서 보편화되어갔다.

 

2. 도교의 성립과 전개

도교는 종교화된 노자의 사상이다. . . 오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태평도와 오두미도에서 시작되었다.

태평도는 노자의 사유를 중심으로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철학사상들-한대 우주론인 元氣’, 음양론, 역학, 기학, 동중서의 형이상학과 역사철학, 황로사상, 유가-을 자체의 맥락에 맞추어 종합하고 있다. 최고신인 하느님은 황천(皇天)이며, 송대 이후로는 옥황상제로 칭해진다. 노자는 태상노군, 장자는 남화진인이며, 그 외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이 신들은 포용적이며, 아바타라(=화신)의 관계에 놓이기도 하며, 위계가 존재하는데 이는 인간세계의 직분을 반영한다.

도교의 세계는 연속성의 세계이며, 누구나 끝없는 노력을 통해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황천과도 같은 존재까지도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종민(種民)이 된 세계 즉 태평의 세계는 온 우주가 한 가족이 된 세계이다. 한대 유학은 국가 전체를 한 가족인 세계를 꿈꾸었다면, 도교는 온 우주가 한 가족인 세계를 꿈꾸었다.

도교에서의 입문은 대개 속죄회개로 이루어지며, 교리의 핵심 부분은 일반적 윤리의 성격을 띤다. 황천=도는 의지적 존재로, 자신의 의지를 자연에서는 기를 통해서, 역사적으로는 천사를 통해서 실현코자 한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고난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하는 데 있다. 즉 도교는 이상인 생명의 향유-하늘, , 사람이 서로 합하여 통하는 태평 또는 태화의 이상세계-를 현실 세계에 만들고자 했다.

도교의 이런 성격 때문에 종교와 정치권력은 이중적 관계를 맺었다. 다른세상/불로장생술, 천하/강호의 구도가 중원 왕조의 역사에서 계속되었다.

 

3. 유교와 노장사상

동북아 철학의 두 축-공자와 노자-이 한 제국에 이르러 일원화되며, 그 과정에서 공자의 사상은 지식인들의 일반문법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일원화가 깨어지고 다원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유교 지식인들은 두 상반되는 힘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나는 무너진 한 제국을 다시 세우고 새롭게 유교질서를 건설해야 하는 의무감과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스며들어오는 새로운 세계와 그것에 낯설게 감응해가는 자신들의 내면을 갈무리하는 것이었다.

 

강북은 호, 한의 대립구도에 있었다면, 강남은 후한의 청류로 이어져온 유교적 정체성과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고 싶은 충동으로 나아갔다. 한 유형은 현학으로, 한 유형은 죽림칠현으로. 이렇게 형성된 사상은 유. 도의 혼합된 모습이었다. . 도의 습합은 철학과문화의 차원에서 고급한차원에서 이루어졌고, 유교 지식인들의 자기 정검은 인물평의 형태를 띤 미학적 측면인간의 감성, 개성이 포함되었다.

6조 시대의 지식인들은 도교와 융합할 수 없었지만 도가철학에는 매료되었다. 이들이 가장 뛰어나게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적 표현이었다.

 

다국화 시대는 동북아문화가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간 시대이다. 당시 사람들의 삶 곳곳에서 볼 수 있거니와 특히 예술작품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자연에 대한 애호는 산수문학산수화를 낳았다. 그들이 그리고자 한 것은 눈에 비친 형태들과 색이 아니었다. 자연의 근원인 기()였고, 기가 담고 있는 생명력이었다. 인간을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장막을 거두고 통하게 함으로써 존재론적 전체를 감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해서 유교적 정치를 펼치고, ‘해서 도교적 예술을 창조한 동북아 지식인들의 구도는 정치에서 벽을 자연과 예술에서 낙을 찾았다.

 

도가적 유가/유가적 도가는 미학적 방식으로 표현, 초월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에 충실했고, 이성의 차원이 아닌 감성의 차원에 가치를 두었으며,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영원의 가치를 부여해 향유했다.

 

. 도교와 불교

1. 동북아세계에서의 불교

불교의 동진은 대승불교가 형성되어 발전해가던 시기에 이루어졌고, 동북아에서는 다원화 시기였다. 이 때문에 불교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지 않아도 되었다.

동북아인들은 삶보다 죽음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고, 불교의 업과 윤회라는 윤리적 인과는 많은 사람들이 삶에 존재하는 윤리적 모순이 해소된다고 믿었다. 죽음이 가져오는 불안을 해소해줌으로, 전래 초기 불교는 주술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초기 불경의 한역에서 신분윤리와 가족을 삶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유교와 가족을 버려야 득도한다고 보는 불교는 서로 화해할 수 없었다. 자연철학의 차이, 삭발하는 문제 등 인도에서 배태된 불교가 이식되려면 많은 해명들이 필요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방식은 북조와 남조의 경우가 달랐다. 북조의 경우 왕들은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불교에 있다고 보았기에 호의적이었고, 승려들은 왕의 후원이 필요했기에 왕을 붓다의 화신으로 떠받들기도 했다. 정치가 결여된 향촌사회에서 교육적, 문화적 역할을 수행. 이 과정을 통해 불교는 점차 중국화하기 시작했다. 남조의 경우 승려들은 남조 귀족들의 문화와 어떻게 어울릴까 고민했다. 이어주는 끈은 청담이었다.

청담은 동북아 특유의 논리학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교가 들어오면서 더욱 정교화되어 선문답으로 이어지게 된다. 불교는 기득권층과 정면 대결보다는 원만한 해결책을 구하며 자신들의 지분을 늘려갔다. 때로 불교는 유교의 역할까지도 대신했으며, 유력가문의 제사는 종종 승려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동북아 불교의 역사는 비대해진 불교 교단을 억누르고자 한 역사이기도 하다. 불교의 시대는 9세기까지 이어졌다.

 

2. 도가철학과 불가철학

동북아 지식인들에게 불교철학은 도가철학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졌다. 불교의 역경가들은 도가철학의 사유에 맞추어 번역했다. 이로써 격의불교가 전개되었으며, 도가적 사유와 불가적 사유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곽상은 만물은 자연에 의해 그 각각으로 주어진 것일 뿐이다. 주어진 것을 깨닫고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 시비를 따지려는 데에서 사회의 대립과 갈등이 야기된다고 논지를 펼쳤다. 무심자로서 성인이 등장해 시대의 혼란을 치유하기를 희구했다.

지둔에게 사물들은 자성이 없는 것들로,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인연에 따라 존재한다. 그 결과 끝없이 타자-화한다고 보았다.

승조는 사물들 각각의 본성은 각각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인과에 있어서도 필연적 인과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각들과 들이 외적/우연적 인과관계를 맺는 것으로 이해했다.

지둔과 승조 외에도 많은 불숭들이 노장사상을 경유해 불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한자문명권의 사유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도가철학 자체의 발전을 찾아보기는 힘든다.

 

. 불교와 유교

1.동북아 불교의 흥륭

불교는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동북아세계 전체로 퍼져 일반화되면서, 서서히 노장사상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보다 고유한 담론과 실천을 만들어나갔다. 또한 동북아 세계는 유. . 도 삼교를 포용코자 했으며, 중국의 이후 국가인 수는 종교가 국가에 포섭되는, 당 제국은 공존을 바래 국가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동북아 불교는 국가불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지만 세속과 구분되는 별도의 차원을 이룬다. 사람들은 윤리와 정치는 유교를 따랐지만, ‘저 세상에 대해서는 도교와 불교에 경도되었다.

존재론적 맥락에서 동북아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현실적경향이며, 불성(佛性)을 그 핵심으로 삼게 되었다. 더 나가 기복 신앙이 되어 정토종(淨土宗)’으로 표현 구원을 바라게 되었다. 불교적 진리의 인식이 아닌 아미타불, 극락세계 등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동북아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의 다른 갈래는 선불교다. 정토종이 대중을 구원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그 대척점에서 선불교는 불교적 깨달음의 심원하고 집한요 측면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불성의 세계. 스승과 제자 관계로 유지, 이들이 전하는 언어는 전제하는. 함축하는 . 객관적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사적 언어들이다.

동북아 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종합성이다. 동북아 불승들은 인도에서 이미 이루어진 여러 사상들을 사후적으로 구성하려 했다.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불린 이 작업은 천태종과 화엄종에서 두드러진다. 이러한 재구성은 불교사뿐 아니라 철학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졌다. 현상계와 실재계 그리고 그 사이를 한마음으로 수렴해보고자 했다. ‘()’()’()’의 통일. 현상의 여럿을 본질의 하나로 수렴해가면서도, 양자를 다시 상호적 원융으로 파악해가는 사유를 전개했다. 세계의 원융무애함은 더 나아가 세계에서 타자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극치에 달한다. ‘중중무진의 존재론이다. 존재론적 종합은 다시 인식론적 종합에 의해 보완되었다. 홀연한 깨달음과 점진적인 닦음을 둘러싼 논의로 교종과 선종의 합일을 주장했다. 성불은 돈오를 성취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돈오 없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불교적 진리를 깨달았다고 그 후 완벽한 붓다처럼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2. 유교지식인들의 각성

당 제국에 들어와 중국은 전체적으로 사회적 유동성이 커지게 되고, 상업과 도시, 화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원-근대적 세계가 도래하기에 이른다. 이런 변화는 전통적 가치보다는 사리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심화되고, 계급간의 소외감도 깊어져갔다. 당시 불교는 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교 측에서는 시대의 타락상을 목도하며 유교 본연의 실천정신을 불러내려 한 새로운 유자들-사대부-계층이 형성되었다. 전국각지에 서원(書院)이 들어서기 시작, 이는 사회 전체의 변화라기보다 지식인세계의 변화였다. 이 신유학은 향후 500년을 넘게 동북아철학의 일반 문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송대는 문치의 완성이자 유교를 부활시킨 시대이다. 귀족 계층의 주도권이 서민지주층의 사대부로 이전되는 시기로 이후 17~18세기, 19세기까지 동북아는 이 새로운 유학의 시대를 살았다. 이 과정은 과거제도와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과거제의 내용은 모두 유교경전이었다. -송 교체기 이후 동북아는 송. 거란. 고려. 서하. 베트남이 새로운 독립정권을 세우고, 운남에도 새로운 국가들이 들어서자 송은 당의 다원적 문화와 대비되는 일원적 문화를 세워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송대의 문치는 윤리적 존재들인 사대부 지식인들의 시대를 낳았다. 유학자들은 인간이란 스스로 노력해서 성인의 경지에 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이론적으로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불교의 불성 개념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곧 마음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청했다. 불승의 마음에서 사대부의 마음으로, 불교는 동북아 지식인들에게 낯선 무--의 사유를 제시했다.

유교가 보다 종합적인 사유를 창조해내려면 어떤 형태로든 불교적 무를 스스로 내재적으로 새롭게 개념화해내야 했다. 아울러 유자들은 도가철학 및 도교를 통해 제시된 사유들, ‘자연철학도 흡수해야 했다. 객관성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야말로 불교와의 차별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주요 과제였다. 이런 과제를 수행해내야 삼교정립의 시대로부터 삼교통합의 시대로 흐름을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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