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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성사81~149 아감벤 2022.7.3. 바다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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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아주 본질적인 기능을 했는데 법의 효력을 확인하는 기능을 했다(81). 12표법 체계에서 나타나는 ‘sacer eato’라는 정형구문은 저주의 일종으로 법의 구조 자체, 법이 현실과 관계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공인(82)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호모 사케르에는 그를 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게 만드는 ‘sacratio’는 저주의 확장일 따름이며 이를 통해 법이 미치는 한계가 규정된다. 나중에 형법이 세워질 터를 닦은 것은 정치적저주인 셈이다(83).

 

(17)

독신은 맹세의 일종이다. 다만 신의 이름이 선언이나 약속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부당하게, 의미론적인 내용과 무관하게 소리 내어 말해지는 맹세인 것이다(88). 맹세와 독신은 축복과 저주인 한, 언어라는 사건 자체 속에 공기원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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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적 형태의 독신은 하느님께 가해진 모욕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당하게 입에 담는 것이다(89). 신의 이름을 말하는 행위의 효력이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되자 시원적 형태의 독신은 하느님을 남용함에서 하느님을 험담함으로 되었다(90).

 

(18)

주술과 주문은 맹세로부터-정확하게 거짓맹세로부터-나온 것이다. 주술, 종교, 법이라고 부르는(94)데 익숙해져 있는 것들이 맹세에서는 여전히 미분화된 통일체로 나타난다. 주술·종교·법은 맹세에서 배태된 것, 말하자면 그 파편들인 것이다. ‘gravis religio(가혹한 종교)’와법은 축복과 ‘sacratio’, 맹세와 거짓맹세라는 특수한 제도들로 분리하고 전문화함으로써 신의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 태어나는 것이다.

맹세는 조건부 저주가 아니다. 저주, 축복이 맹세에서 문제가 되는 발화 경험이 분화되어 특수한 제도들로 생겨난 것이다(95).

 

(19)

신은 언어라는 사건 자체이다. 모든 이름 짓기, 모든 발화 행위는 하나의 맹세이며, 여기서는 로고스’(‘말씀속의 화자)가 자기 말의 실현을 서약한다. 그 안에서 실현되는 말과 사물(사태) 사이의 일치를 두고 맹세한다. 그리하여 신의 이름은 로고스의 힘의 유일한 징표이며 만일 그것이 거짓맹세가 되어버리는 경우에는 저주의 징표이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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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은 항상 비의적·종교적 사건이다(100). 명명과 지시의는 애당초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101).

 

(20)

이름들은 언어라는 강이 그것의 역사적 생성 안에서 낙오시킨 시원적 감탄사의 흔적인 것이다. 독신은 본성상 의미론적인 것이 아니라 외침이나 절규 같은(102) 것이기 때문에 모욕과 인접성을 보여준다. 모욕은 서술어들처럼 기능하기보다는 감탄문이나 고유명처럼 기능하는 것이며 독신의 부당한특성을 한층 더 강화하며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이름은 이중적으로 부당하게 취해진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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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와 푸닥거리exorcsim는 존재자를 불러냄, 초혼의 두 얼굴이다(106).

 

(21)

일신교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언어 자체를 이른다. 언어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곧 맹세이다. 언어는 로고스안에서 최고로 진실한 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한에서 하느님이다. 맹세하는 자는 하느님이고 인간이 다만 그러한 말의 화자일 뿐이지만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한 맹세 속에서 인간의 언어는 신의 언어와 교신한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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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의 언어를 낳고 또 계속 존(108)재하게 해주는 것이며 인간의 언어는 이 이름을 이루고 있는 문자들의 분해·재조합·배치에 다름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사이의 교류가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맹세인바, 하느님은 그분 자신을 걸고 맹세하며 인간은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한다(109).

 

(22)

신학적 주제와 절대 존재하는 철학적 주제의 연결은 존재론적이라고 규정되곤 했던 논증 형태로 수행된다(111). 하느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이름과 존재, 말과 사물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언어 경험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맹세에서처럼 말해지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이고 존재한다는 그러한 언어 경험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fides’, 맹세의 차원에서 로고스의 지위를 표현하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름 불려지는 것의 실존을 즉각적으로 현실화한다(112).

모든 맹세는 이름 중의 이름,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왜냐하면 맹세는 모든 말을 고유명으로 여기는 언어경험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실존은 인식의 결과도, 논리적 연역의 결과도 아니다. 기의로 나타낼 수 없고 다만 맹세될 수만 있는, 즉 이름으로 선언될 수만 있는 어떤 것이다. 믿음의 확실성은 하느님의 이름의 확실성이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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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에서 하느님의 이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확실성, ‘믿음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항상 참인 이름,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언어 경험을 이른다. 인간에게는 이 경험이 맹세이다. 모든 이름은 맹세이며, 모든 이름에서는 믿음이 관건인 것이다(115).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맹세한다는 것,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다.

 

(23)

수행적 표현이란 언어적 언표화이다. 수행적 표현들은 언어에서 말과 사물 사이의 연관이(116) 되는 어떤 단계의 잔여를 표상한다. 이것은 주술-종교적 단계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일 것이다.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사실의 효력을 획득하게 해주는 것은 수행적 표현의 자기 지시적 성격이다. 통상적인 지시적 성격의 유예를 통해서만 구성된다. 수행 동사는 지시적인 성격만을 갖는 발언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그러한 발언이 없다면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되고 만다(117). 수행적 표현은 말과 사실 사이의 지시적 관계를 자기 지시적 관계로 대체한다. 전자를 유예시킴으로써 자신을 결정적 사실로 내세운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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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수행적 힘이 유일신의 이름 안에 응축되면 여러 잡신들의 이름은 모든 효력을 잃고 언어적인 파산 수준에 떨어지며 지시적 의미만이 지각될 수 있는 것으로 남는다(120).

 

(24)

선언의 맹세와 약속의 맹세가 서로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은 맹세에서 문제가 되는 발화 경험이 상실되었음을 뜻한다. 맹세는 소리 내어 말하는 주체와의 관계만을 그것의 수행적 효력의 유일한 규준으로 가지는 말이다. 선언과 진실 말하기는 로고스의 공기원적인 두 얼굴인 것읻. 맹세의 진실성과 견고함은 수행성과 일치하고 신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은 어떤 사실적 증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소리 내어 부름으로써 수행적으로 현실화된다(121).

진실 말하기를 하나의 선언인 적, 맹세를 지시적 표현인 척, 신앙고백을 하나의 도그마인 척 말해보면 발화 경험은 파열되어 거짓맹세와 거짓말이 최종적으로 솟아나온다. 법과 종교는 바로 언어 경험에서 이러한 파열을(122) 막기 위한 시도에서 태어난다. 종교와 법은 로고스의 진실함과 신뢰성을 일련의 장치들을 통해 보증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한 장치들 가운데서도 맹세를 특수한 성사로 전문화하는 것- ‘권력의 성사’-이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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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와 학문이 로고스의 선언적 양상을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진실 말하기로부터는 법, 종교, , 문학이(124) 비롯된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진리와 오류 양쪽 모두에 거하는데, 거짓말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수행적 발화 경험을 보호하려고 애쓰며, 모든 선언적 담화 속에서 일어나는 진실 말하기를 경험한다(125).

 

(25)

믿음과 종교 사이의 대립은 실제로는 로고스의 두 가지 공기원적 특성 사이의 대립과 같다. ‘로고스는 진실 말하기(그러한 것으로서 법과 실정적 종교의 기원)이자 선언(그러한 것으로서 논리와 학문의 기원)인 것이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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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화에서 돈을 에워싸고 있는 성의 아우라는 생명체를 바치는 대신 일정 금액의 돈을 바쳤던 데 기원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sacramentum’으로서의 돈이란 사실상 생명과 대등한 것이다(136).

 

(27)

(1)주술-종교적 영역은 맹세에 논리적으로 선재하는 것이 아니며 차라리 종교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맹세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2)그리스도교는 말에 대한 믿음의 중심성을 종교적 경험의 본질적 내용으로 갖는데, 이러한 중심성은 맹세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로고스’, 곧 이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로고스의 종교이자 로고스의 신격화이다(137). (3) 살해될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벌거벗은 삶의 생산을 통한 권력의 시원적 수행으로서의 ‘sacertas’에 대한 해석은 맹세란 권력의 성사이기 이전에 이미 철저히 말로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인간의 봉헌이다. 맹세는 언어의 성사인 한에서 권력의 성사로 기능할 수 있다. 법은 본질적으로 저주와 한 몸이며, 저주와의 이러한 본래적 연관을 끊은 정치만이 장차 말을 달리 사용하고 또 법을 달리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138).

 

(28)

인류는 언어에 자신의 본성을 걸었던 것이다. 언어에 자신의 목숨을 건 생명체인 것이다(142).

 

(29)

말과 사물과 인간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윤리적인 연관이 깨지면 사실상 한편으로는 공허한 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 장치들이 대대적이고 유례없이 만연해 더 이상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삶 전반을 법으로 집요하게 틀어쥐려고 한다. 맹세의 쇠퇴기는 독신의 시대이기도 하다(145).

인간의 언어는 자신의 속을 비워내어 화자가 말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떠맡아야만 하는 어떤 형식을 자신 안에 마련한다는 사실에, 다시 말해 화자와 그의 언어 사이에 설정된 윤리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고 말해야만 하고, ‘말을 붙잡고떠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생명체이다(146).

철학은 본질적으로 맹세에 대한 비판이다. 철학은 인간을 언어에 연결시켜주는 성사적 결합을 의문에 부치며 그런 까닭에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고 말의 허망함에 빠지지도 않는다. 정치는 다만 오이코노미아’, 즉 벌거벗은 삶에 대한 빈말의 지배라는 형태를 띨 수 밖에 없는 이때 언어를 지닌 살아있는 인간이 극단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저항과 변화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또 다시 철학인 것이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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