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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연 170330(목) / 가라타니 고진 세미나 / 세계사의 구조 / 1부 3,4장 발제 / 화니짱

세계사의구조 1부2장~2부4장(17.03.30).hwp


제3장 세계제국

1.아시아적 전제국가와 제국

아시아적 전제국가는 복종과 보호라는 교환(교환양식B)을 통해 주변 공동체나 국가를 지배하에 둔다. 하지만 외연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수의 도시국가나 공동체를 포섭하는 세계시스템으로서의 세계=제국이다. 제국은 그때까지 위험하고 장애가 많았던 국가 사이의 교역을 용이하게 한다. 각 공동체나 소국가는 전쟁상태보다도 오히려 제국의 확립을 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제국의 형성은 교환양식B가 아니라 교환양식C가 중요한 계기가 된다.(167) 세계=제국에 불가결한 것은 세계화폐만이 아니다. 공동체를 넘어선 법, 국제법이 필요하다. 제국은 부족-국가의 내부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국 내 교육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 한 말이다. 제국의 세 번째 특징은 세계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제국은 부족국가를 통합함으로써 성립되는데, 그때 각각의 국가-공동체의 종교를 넘어서는 보편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런 세계종교는 다시 제국 안과 주변의 부족-국가에도 침투한다.(168) 제국의 네 번째 특징은 세계언어에 있다. 그것은 라틴어나 한자처럼 다수의 부족, 국가에 의해 사용되는 문자언어이다. 이상이 세계=제국에 공통되는 점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는데 크게 네 가지 타입으로 분류된다.

관개형 : 서야시아, 동아시아, 페루, 멕시코

해양형 : 그리스로마

유목민형 : 몽골

상인형 : 이슬람 (169)

세계=경제에서 중심-반주변-주변과 세계제국에서 중핵-아주변-주변은 각각을 구성하는 지배적 원리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세계=경제에서는 교환양식C이고, 세계=제국에서는 교환양식B이다. 따라서 세계=제국에서의 주변이나 아주변이라는 현상도 세계=경제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한다. 근대 이전의 세계시스템은 많은 세계=제국, 그 주변, 얼마되지 않은 아주변부, 그리고 권외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좋다. 근대세계시스템(세계=경제), 즉 자본주의적 시장이 세계를 뒤덮을 때 첫째로 권외는 국가에 둘러싸였다. 많은 미개인이 문명화를 강요당했다. 셋째로 세계=제국의 아주변부는 세계=경제에서는 반주변부에 놓였고, 매우 적지만 일본처럼 중심으로 이행한 케이스가 존재한다. 넷째로 구세계=제국의 중핵 또한 주변부로 내쫓겼다. 하지만 군, 관료 등의 국가기구를 갖춘 구세계=제국의 중핵은 그 주변부와 달리 세계=경제의 주변에 놓이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2.주변과 아주변

세계=경제의 발전은 세계=제국에 의해 억제되었다.교환양식C의 자율적 발전은 교환양식B에 의해 억제되었던 것이다.(174) 반면에 아주변은 중핵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전면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그것을 발전시켰다. 또 경제적으로 교환이나 재분배는 국가에 의한 관리가 적었고 시장에 맡겨졌다. 아주변에서 세계=경제가 발전한 것은 그 때문이다.(175) 로마제국의 근저에는 폴리스와 제국의 원리적 상극이 계속 존재했다. 이 문제는 근대에서 네이션=스테이트와 제국주의-지역주의라는 문제로서 반복된다.

3. 그리스

강수농업의 경우,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된다. 토지개발이 국가에 의한 대규모의 것이 아니라 개인(세대)에 의한 소규모의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 전체는 공동체의 소유라고 해도 토지를 개척한 개인이 그 사용권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된다. 그것이 사유재산이다.(176) 물론 그 경우에도 공동체적 소유 및 그것과 관련되는 호수원리가 남아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177)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자인 빈곤자가 소수의 부유계급을 억누르고 재분배에 의해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소노미아란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자유가 평등인 원리이다. 이것은 사회가 자유=유동적인 상태에서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폴리스 안에 불평등이나 전제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소노미아는 근본적으로 유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180) 그런 의미에서 이소노미아는 씨족사회의 구속을 부정함과 동시에 거기에 존재한 유동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씨족사회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바꿔말해 이오니아에서 교환양식C가 우월한 사회가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다. 거기에서는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달리 씨족공동체의 폐쇄성을 부정하는 사회가 존재했다. 따라서 이소노미아의 원리는 그와 같은 교환양식C에 교환양식A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것, 즉 교환양식D의 실현이라고 해도 좋다. 예를 들어, 아렌트는 이소노미아의 현대판을 ‘평의회’코뮤니즘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테네의 데모크라시가 현대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회제 민주주의)와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면,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는 그것을 넘어서는 시스템에의 열쇠가 됨이 분명하다.(181) 데모크라시라는 단어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 의해 초래되었다. 그것은 먼저 귀족의 권력기반이 되었던 낡은 부족제도를 폐지하고, 지역별로 새로운 부족을 창설하는 데 있었다. 이때 지연적인 성격을 가진 데모스가 출현했다. 이 데모스에 의한 지배가 바로 데모크라시다. 그것은 혈연적 관념으로서의 씨족사회를 부정하는 한편, 호수원리로서의 씨족사회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데모스는 상상의공동체(앤더슨)로서 근대의 네이션과 닮아있다.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는 그와 같은 내셔널리즘과 분리할 수 없다.(183)

4. 로마

로마는 그리스의 선례를 배우려고 했으나 차이 도한 두드러진다. 첫째로 아테네가 철저한 민주주의에 도달한 데에 반해, 로마에서는 그것이 철저하지 못했다.(186) 귀족은 다수의 비호민과 노예를 거느린 일종의 봉건제후였다. 민주화의 가능성이 부족했던 로마에서 계급문제의 해결은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즉 정복전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에 토지, 노예, 부를 배분하려고 했던 것이다.(187) 둘째로 로마가 아테네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에서 시민권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어서 여러 세대에 걸쳐 거주하는 외국인도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다.(188) 로마제국의 통치는 법의 지배에 의해 다수의 민족을 통치하는 방법이었다. 현실적으로 로마제국은 아시아의 제국 공통의 부역공납국가를 완성시킨 것이다. 그리스에 의해 열린 세계=경제는 로마제국 후기에 닫혔다.(189)

 

5. 봉건제

a. 게르만적 봉건제와 자유도시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에서는 봉건적인 국가들이 분립하고 수많은 자유도시가 생겨났다.(189) 그것이 바로 세계=경제이고, 이로부터 자본주의경제가 생겨났다. 그리스나 로마가 동양적 제국의 아주변에서 성립했다고 한다면, 소위 봉건제는 로마제국의 아주변, 즉 게르만의 부족사회에서 성립했다고할 수 있다. 인적 성실관계를 뒷받침하는 봉건제의 특징은 지배자 계층에 호수성의 원리가 남아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호수성의 원리는 주군의 전제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왕이 있어도 영주 중의 일인자라는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만 사회에는 씨족적 공동체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90)

게르만 공동체는 소유권이 애매한 채로 있었던 아시아적 공동체나, 사유지는 각호에 분할소유가 되었지만 공유지가 권력자에 의해 마음대로 이용되었던 고전고대의 공동체와는 기본적으로 달랐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인클로저가 가능했던 것도 토지의 소유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191) 서유럽의 봉건제에서 특필할 것은 자유도시(공동체)이다. 그것은 영주-농노관계에서 나온 사람들이 만든 호수적 계약에 기반을 둔 공동체이다. 이와 같은 자유도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봉건제이다. 바꿔 말해, 제국의 연약함이다. 자유도시는 상품교환양식의 원리에 근거하여 형성되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서약공동체였다.(192) 거기에는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이익을 추구하는 드라이브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가져오는 경제적 격차에 대해 상호부조적인 공동체(코뮌)를 회복하려고 하는 드라이브가 대항적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도시는 파리코뮌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운동, 코뮤니즘의 모체이기도 했다. 봉건제란 한마디로 말해 누구도 절대적 우위에 설 수 없는 다원적 상태이다. 그로부터 왕이 절대적 주권을 잡은 것은 15,16세기의 절대주의 왕권국가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동양적 전제국가에 존재했던 것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주의왕권이 동양적 전제국가와 다른 점은 상품교환(교환양식C)을 억제하기는커녕 그 우위를 확보하고 촉진함으로써 성립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부르주아혁명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b. 아주변으로서의 봉건제

그리스나 로마가 동양적 제국의 아주변에서 성립했다고 한다면, 소위 봉건제는 로마제국의 아주변 즉 게르만의 부족사회에서 성립했다.(193) 즉 이와 같은 특성은 서구 일반의 특징이 아니라 중핵, 주변, 아주변이라는 위치와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195) 프랑스나 독일이 로마제국 이래의 관념과 형식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 주변적 경향이 있었던 데에 반해, 영국은 아주변적이어서 보다 유연하고 프래그머틱하고 비체계적이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영국이 대륙으로는 향하지 않고 해양제국을 건설, 근대세계시스템(세계=경제)의 중심이 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96) 

제4장 보편종교

1. 주술에서 종교로

마지막으로 서술할 네 번째 교환양식은 세 가지 교환양식과 그 사회구성체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나 교환양식A와 닮아 있다. 이는 교환양식D가 제3사분면의 시장경제(C)상에서 제1사분면의 호수적 공동체(A)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 경우 교환양식A는 회복되지만, 더 이상 개개인을 공동체에 속박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교환양식C가 선행하지 않는 한, D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197) 베버는 종교의 발전을 주술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척도로 파악하고, 그것을 사회경제사적인 원인으로부터 설명했다. 주술사에서 사제계급으로의 변화를 발견하고, 이것을 씨족사회에서 국가사회로의 이행으로 설명했던 것이다.(198)

베버는 구제종교의 기도에 ‘받기 위해 준다’는 교환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주술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주술에서의 교환과 기도에서의 교환은 닮아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다름에 주목하지 않으면, 주술에서 종교로의 발전을 이해할 수 없다.(199) 주술이란 자연 내지 인간을 증여(공희)를 통해 지배하고 조작하는 것이고, 그것은 호수성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씨족사회 이후, 즉 국가사회에서는 너로서의 정령(아니마)이 신으로서 초월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 및 타자는 그저 조작해야 하는 ‘그것’이 되었다. 국가사회에 지배적인 교환양식B는 복종과 보호의 관계이다. 이것도 쌍무적이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복종에 대해 보호로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바꿔 말하면, 기도가 된다. 이것이 협소한 의미에서 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200) 기도는 주술과 다르고 지배자인 왕=사제, 그리고 초월적인 신에 대해 이루어진다. 여기에 평등주의적 요소는 없다.(201) 국왕은 황막한 모래 속에서 수확을 가져온다. 베버는 세계를 ‘무로부터 창출하는’ 신이라는 관념의 한 원천은 그것에 있다고 말한다.(202) 하지만 이와 같은 신은 진정으로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은 사람들의 기원=증여에 응하지 않으면, 인간에 의해 버려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공동체나 국가의 신은 전쟁에서 지면 내버려진다. 즉 여기에는 신과 인간의 호수성이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술적인 것이 잔존한다. 보편종교가 출현하는 것은 말하자면 기원에 대해 응답하지 않아도 버려지지 않는 신, 전쟁에서 져도 버려지지 않는 신이 출현할 때이다. 그것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2. 제국과 일신교

국가가 다른 공동체를 산하에 넣어가는 경우, 지배자의 신을 피지배자에게 강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피지배자의 신들은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그것들을 판테온에 넣어서 숭배한다. 신의 초월성은 국가(와)의 초월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국가가 멸망하면 신도 멸망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발전은 국가의 발전에 다름 아니다.(203) 화폐경제는 개인을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제국=코스모폴리스의 인민으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급진적 평등주의는 공동체에 존재했던 평등주의, 바꿔 말해 호수적 경제와 윤리를 파괴해버린다. 즉 그것은 빈부의 격차를 가져온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보편종교가 등장하는 전제이다. 요컨대 보편종교는 제국형성 과정에서 교환양식B의 지배하에 교환양식A를 교환양식C를 통해서 해체해갈 때, 이에 대항하는 교환양식D로서 출현한 것다.

 

3.모범적 예언자

보편종교는 각 지역에서 거의 같은 시기인 일정한 전환기에 생겨났다.(207) 그것은 도시국가가 서로 항쟁하고 광역국가를 형성할 때까지의 시기이며,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화폐경제의 침투와 공통체적인 것의 쇠퇴가 현저해지는 시기이다. 하지만, 보편종교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선행하는 공동체의 종교, 국가의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보편종교가 일정한 인격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보편종교를 초래한 인격이란 예언자이다. 이 예언자는 사제계급이 아니다. 둘째로 좀 더 중요한 것은 모범적 예언자를 생각할 때, 통상 철학자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이 종교적 예언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208) 사상을 필요로 하는 사태가 사상을 상품으로 만든다. 사상가 중 후세에 영향을 준 것이 공자와 노자이다. 그들은 특별히 종교를 이야기한 적은 없다. 하지만 후에는 종교의 개조로 간주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바로 모범적 예언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붓다도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는 인식도 없었다. 다만 그의 사는 방식이 모범적 예언자로서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이상의 예는 보편종교가 기존의 종교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 따라서 종교를 비판한 철학자와 보편종교의 개조를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4. 윤리적 예언자

일반적으로 말해, 제국의 주변부에는 유목민이 존재한다. 유목민의 기원은 원도시=국가의 단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목민은 원도시=국가가 국가와 농업공동체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회는 이미 씨족사회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였지만, 어떤 점에서 수렵채집민=씨족사회의 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분산되어 있지만, 제국으로부터의 압력이 높아지면, 그에 대항하여 연합한다. 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유목민 부족들(12부족)의 맹약공동체로서 시작되었다.(211) 그리고 이 공동체는 신과 인간의 계약인 호수적 교환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특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남유대왕국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이다. 이때도 많은 이들이 신을 버렸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바빌론에 끌려갔던 사람들 사이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국가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신이 폐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새로운 신 관념이 태어났다.(212) 그것은 국가의 패배를 신의 패배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로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수성의 부정이었다. 종교의 탈주술화는 이때 생겨났다. 이것을 초래한 것은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나 지식인이었다.(213) 통상 부족연합체로서의 국가가 형성될 경우, 계약은 쌍무적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도 내버려진다. 그런데 모세의 경우에는 일신교와의 계약을 신 쪽에서 강제적으로 진행시켰다. 그것은 쌍무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것이 가능했을까?(214) 프로이트의 해답은 모세와 그 신이 한번 살해되고, 이후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강박적인 형태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목민시대의 윤리는 전통이나 사제에 반하여 예언자를 통한 신의 언어로서만, 즉 인간의 의식, 의지에 반하는 형태로서만 회귀했던 것이다. 나는 교환양식D에서 교환양식A가 보다 고차원적으로 회복된다고 서술했는데, 이 경우 회복이라기보다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해야 한다.(215) 그것은 인간이 공상하는 자의적인 유토피아일 수 없다.

5. 신의 힘

보편종교로서의 유대교가 성립한 것은 바빌론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서다. 그들이 야훼를 믿은 것은 이제 부족이나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국가의 멸망과 함께 그와 같은 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때 포로가 되었던 자의 대부분이 지배계층이나 지식인층이었고, 주로 상업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같은 사건의 양면이다. 하나는 신이 부족이나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립한 개인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환양식D가 신의 힘을 통해서만 발동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16) 또 후자의 측면은 교환양식D가 공동체로부터 자립한 개개인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두 계기는 분리할 수 없다. 국가나 공동체를 넘어서 초월화된 신은 다른 한편으로 국가나 공동체에 의거할 수 없는 개인의 존재와 조응한다. 보편종교가 개인과 개인의 관계의 새로운 창출을 초래했다. 보편종교에서는 사랑이나 자비가 설파되고,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순수증여이다. 유대교는 민족의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형성하는 교단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즉 국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야훼를 믿는 집단으로서 새롭게 조직된 것이다. 즉 유대교는 유대민족이 선택한 종교가 아니라, 역으로 유대교가 유대민족을 창출한 것이다.(217) 물론 비유대인이 유대교도가 될 결우, 할례 등의 특수한 부족적 관습이 장애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모순이 노정되었다. 후에 이 모순이 유대교의 내부에서 현재화되었을 때, 보편성을 선택한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기독교가 보다 보편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으로 기독교는 특수한 것, 즉 다양한 공동체나 국가의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보편종교는 특수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모순을 끊임없이 의식함으로써 보편적이다.(218) 불교에서는 초월자를 무로 간주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도 우상숭배 금지를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현실에서 불교는 국가나 공동체에 종속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많든 적든 모든 보편종교에 해당되는 것이다.

6. 기독교

예수가 시사한 것은 국가, 전통적 공동체, 화폐경제 모두를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219)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무상의 증여를 의미한다. 예수의 교단은 엥겔스나 카우츠키가 강조한 것처럼 공산주의적이었다.(220) 보편종교의 초기단계에서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교환양식A의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되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바울의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지적한 것처럼 토템과 같은 기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울은 교단으로부터 그때까지 농후하게 유대적이었던 율법이나 습관을 폐기했다. 이렇게 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유대적 공동체를 넘어서 로마제국(세계제국)에 침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기독교단도 변질되었다. 처음에 사도들은 유목민처럼 유동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집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포교가 진행되자 말하자면 정주자의 집단이 된다. 즉 그것은 사제에 의해 통치되는 히에라르키한 집단이 되었다. 그들이 부정해온 바리새파적 교단조직과 닮아갔다. 동시에 기독교의 교회는 로마제국에 대하여 영합적이 되었다.(221) 초기단계에서는 복음서에도 씌어져 있는 것처럼 신의 나라가 지상에서 실현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다가온다고. 하지만 그와 같은 종말론적 열광이 가라앉자, 신의 나라는 천상화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비정치적이 된다. 이처럼 보편종교는 국가나 공동체에 침투함과 동시에, 역으로 그것들에 흡수되어버렸다.(222) 그 결과 서로마교회는 봉건제후의 분립상태가 된 서유럽에서 세계제국으로서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한, 기독교는 세계종교일지 모르지만 보편종교는 아니다.

7. 이단과 천년왕국

기독교는 유럽에 침투했지만, 그것은 공동체의 종교로서였다. 동지나 춘분의 농경의례를 크리스마스나 이스터라고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가 불가결했던 것은 제국멸망 후의 세계에서 제국으로서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난립한 왕국이나 봉건제후를 하나로 모았던 것은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로마교회였다.(223) 12세기가 되어 기독교는 되살아났다. 그것은 공동체의 질곡에서 해방된 민중 개개인들에 어필하고 사회적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새롭게 설파된 기독교의 특징은 첫째로 천상화되어 있는 신의 나라를 차안화하는 데에 있었다. 이것은 또 신의 나라가 역사적으로 실현된다는 견해가 된다. 두 번째 특징은 교회의 히에라르키를 부정하는 데에 있었다. 신분차별, 부의 차별, 남녀차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들 두 가지 요소가 교회나 봉건제사회에 대립하는 민중적 운동과 연결된 것은 명백하다.(224) 11세기에 출현한 카타리파는 신비주의, 즉 신(초월)은 개개인에 내재한다는 관점이 있었다. 이로부터 성직자의 히에라르키의 부정만이 아니라 만인의 평등, 남녀의 평등이라는 사고로 인도되었다. 당연히 교회는 이것을 이단으로 간주했지만, 운동은 점점 확대되었다. 그것은 봉건영주에게도 위협이었다. 따라서 카타리파는 교회와 봉건영주의 결탁(십자군)에 의해 잔혹하게 섬멸되었다. 종교개혁은 12세기부터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사회운동과 결부되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농민전쟁을 단호히 탄압하는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교회 측에 의해 중시되는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고,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내면으로 가두고 ‘신의 나라’를 천상화하는 것으로서이다.(225) 나는 보편종교에 의해 개시된 교환양식D가 자주 이단적 종교의 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현실의 사회운동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26) 하지만 교환양식D는 다른 형태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영향을 주어왔다. 왜냐하면 보편종교를 자신의 근거로 만들기 위해 도입한 국가는 그 결과 보편종교가 개시한 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규제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법 형성에서 법이나 국가의 윤리적 기초에 관한 이론이나 국제단체의 관념과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방법 등의 이론적인 면에 공헌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종교는 현실의 사회구성체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8. 이슬람교, 불교, 도교

불교는 윤회와 그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종교적 전통과 사제의 지배 가운데에서 그에 대한 탈구축적인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그런 문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 불교는 그것이 탈구축하려고 한 교의 그 자체를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보편종교의 공통된 특징은 왕=사제 비판이다. 하지만 모든 종교집단이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스스로가 부정한 길을 걸었다. 즉 국가종교가 되고, 성직자가 지배하는 체계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탈구축적인 힘을 전면적으로 잃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문맥에서 ‘원시교단으로 돌아가라’라는 형태를 취하는 종교개혁을 통해 되살아났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 예언자 마호메트를 통해서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상실된 유목민적인 호수적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228) 하지만 사제=왕권을 부정하는 이슬람교도세력이 확대되자 바로 교권국가가 되어버렸다. 예언자 마호메트 사후에 성직자=왕(칼리프)의 지배가 생겨난 것이다. 한편 이에대해 공동체(움마)를 회복하려는 운동이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이맘(지도자)에 의한 것이다. 특히 마호메트의 사위로 참살된 알리를 최초의 이맘으로서 숭상한 시아파에서 그러했다. 이와 같은 이맘신앙에서 교권국가를 뒤엎는 천년왕국적 사회운동이 여러 번 생겨났다.

불교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붓다가 행한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선행하는 공동체, 국가의 종교에 대한 탈구축이다. 그것은 윤회하는 동일적 자기를 환상으로서 배척하는 것으로 집약된다.(229) 그것은 카스트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윤회에 대한 부정이다. 또 윤회를 고행에 의해 해탈하는 것에 대한 부정, 더욱이 제의나 주술의 부정이다. 바꿔 말해 사제(바라몬)계급의 부정이다. 붓다의 교단이 공산주의적 유동집단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불교는 특히 상공업자와 여성 사이에서 퍼졌다. 제국을 형성시킨 아소카왕 시대에 불교는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이후 불교는 철학적으로 고도로 다듬어졌지만 농업공동체에는 침투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불교는 정치적으로 국교로서의 지위를 잃자, 불교를 흡수한 토속적 종교, 힌두교에 의해 대체되어버렸다. 하지만 불교에서 성직자=왕권을 부정하는 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인도의 바깥에서는 미륵신앙이 퍼졌고 그것이 각지에서 천년왕국운동을 낳았다. 그것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민중반란과 결부되었다. 하지만 그 후 불교는 영향력을 잃었다.(230)

공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인에 기초하여 다시 세우는 것을 설파했다. 인이란 교환양식으로 말하면 무상의 증여이다. 공자의 가르침의 에센스는 씨족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물론 단순한 전통의 회복이 아니며 사회변혁적인 면은 특히 맹자에 의해 강조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유교는 공동체적 제사나 혈연관계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사상으로서 기능했다. 다음으로 노자의 무위는 유교나 법가가 생각하는 유위(사회제도의 구축)의 무화, 즉 그 적극적인 탈구축을 지향하는 것이다. 노자는 집권적 국가만이 아니라 씨족사회 그 자체를 인위적인 제도로 부정했다. 공자가 씨족적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했다면, 노자는 유동적 수렵채집민의 생활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노자의 가르침도 통치사상의 일종으로서 기능했다. 그것은 통치자는 ‘법의 지배’에 위임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법가사상이 되기 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232) 진의 시황제는 제국을 확립하자 유교를 ‘지방분권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반법치주의적 사상’으로서 철저히 탄압했다. 소위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하지만 진 왕조는 극히 단명했고, 다음 한 왕조의 초기단계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국시가 되었다. 이것은 법과 공포를 통해 지배한 진 왕조 때문에 황폐해진 사회가 회복될 때까지는 유효했다. 하지만 3대째 황제인 무제는 유교를 씨족적 공동체의 기반에서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려고 했다. 한편 집권적 국가를 부정하고 있었던 유교도 법가의 중앙집권주의를 받아들여 변용되었다. 이후 유교는 국가질서를 공동체적 의례나 혈연적 유대로 고착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이후 유교의 역사에서 양명학처럼 인에 기초하는 사회변혁사상이 회복되고, 그것이 다양한 사회운동을 초래한 면도 놓쳐서는 안 된다. 노자의 사상은 이제 통치사상으로서 튕겨져 나와 통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유토피아주의와 아나키즘의 원천으로서 계속 존재했다. 중국사에서는 최초의 민중반란은 후한 말에 일어난 황건의 난이다. 이것은 도교에 기초한 천년왕국 운동이었다. 이것은 제국을 멸망시키는 계기를 만든 데에 그쳤지만, 이후 중국사에서 왕조의 교대시기에 자주 황건의 난과 닮은 종교적 사회운동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명 왕조의 태조 주원장은 그와 같은 운동의 지도자였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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